임칙서와 아편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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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임칙서와 아편전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목 차
1. 사랑받는 관료
2. 아편 문제
3. 흠차 대신으로서
4. 아편 전쟁의 발달
5. 전쟁의 결과
6. 그 인품

본문내용

이리포 등이 영국측과 교섭하게 되었다. 이리포는 아편 2만 상자를 몰수당하여 영국측이 임칙서를 증오할 것이라 생각하고 교섭할 때, “임칙서는 파면되었습니다. 경하해 마지않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영국대표 블레머 준장은, “임칙서 씨는 훌륭한 재능과 용기를 지닌 총독이었습니다. 다만 아깝게도 외국 사정을 잘 알지 못했을 뿐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시종일관 의연했던 임칙서의 자세는 적으로부터도 존경을 받았다. 블레머는 임칙서가 외국 사정을 잘 알지 못했다고 말했지만 사실 쇄국상태에 있던 청나라에서 임칙서는 “차이니즈 레포지트리”를 한역해서 열심히 읽고 연구 했다. 신강에 좌천됐을 때에도 임칙서는 열심히 러시아의 정세를 연구했다. 만년의 임칙서는 장차 중국의 우환이 되는 것은 영국이 아니라 러시아일 것이라고 예견할 정도로 외국 사정에 있어서는 청국 내 누구보다 많이 알게 된다.
이후 임칙서는 신강에서 돌아올 수 있는 허가를 받아 총독에 임명되었으나 조강지처 정숙경을 잃고 병을 이유로 퇴임을 자원했다. 65세가 되던 해에 광서 동란으로 인해 다시 흠차대신으로 기용되어서 고향인 복건에서 서행하여 조주에 도착했으나 그곳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양력 11월 22일의 일이다.
6. 그 인품
중국 역사상 가장 사랑받는 인물 다섯 명을 들라고 하면 임칙서를 절대로 빼놓을 수가 없다. 특히 성실하기 그지없고 청렴결백한 점은 우러러볼 만하다. 임칙서는 39세에 강소 안찰사가 되었는데, 그 때까지 주로 관리들만 접해온 사람들의 눈에 그는 깨끗하게 보여서 그를 ‘임청천’이라 불렀다고 한다. 푸른 하늘처럼 공명정대하다는 뜻이다.
임칙서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건륭 50년 여름, 임칙서는 복건 후관현에서 태어났다. 마침 그때 소나기가 쏟아져서 복건 순무 서사증이 오막살이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그때 출산했다는 전갈을 듣고 서당에서 황급히 돌아오던 아버지는 자기 집 처마 밑에 순무가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칙서라는 이름은 순무서사증을 본받는다는 뜻이라고 한다.
임칙서는 3남 8녀 중의 차남이었다. 모두 한 어머니의 소생이었음을 그는 자랑스럽게 여겨 종종 그 사실을 글로 썼다. 그리고 그의 집은 몹시 가난했다. 어머니는 조화기술을 배워 서당에서 받은 아버지의 급료에 보태 가계를 도왔다. 그의 자매는 모두 어머니의 조화 만드는 일을 거들었다. 그도 거들려고 했으나,
“사나이는 공부를 해야한다.”고 하며 어머니가 꾸짖었다고 한다.
“당시의 가난함은 차마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는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고급관료가 되어 입신 출세한 사람들은 빈궁한 가정 출신이었음을 흔히 감추기 마련이지만, 임칙서는 오히려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떳떳하게 생각했다. 그는 종종 가난했던 시절의 일들을 되풀이하여 글로 표현하고는 했는데 그것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 마음과 경험은 마치 어제 일과 같다.” 하고 항상 되새기고 있다. 초심을 잊지 않는다기보다도 그것이 원래 그의 성격이었다고 말할 수 있음직하다.
그는 정말 사려깊고 고상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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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7페이지
  • 등록일2005.12.08
  • 저작시기2005.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2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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