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대량학살의 개념
한국전쟁에서의 학살-학살 주체별 분류
사례 1 - 노근리 학살
사례2- 보도연맹
사례3- 인민군에 의한 학살
기타 사례- 거창, 마산, 고양의 학살사건
한국전쟁에서의 학살의 특징과 그 의미
민간인학살의 진상규명운동 과정
황정순 할머니
조직적 은폐, 강요된 망각
<참고문헌>
<참고 사이트>
한국전쟁에서의 학살-학살 주체별 분류
사례 1 - 노근리 학살
사례2- 보도연맹
사례3- 인민군에 의한 학살
기타 사례- 거창, 마산, 고양의 학살사건
한국전쟁에서의 학살의 특징과 그 의미
민간인학살의 진상규명운동 과정
황정순 할머니
조직적 은폐, 강요된 망각
<참고문헌>
<참고 사이트>
본문내용
조사 자료의 미(未)전승으로 대부분 피해자실태조사 수준에 그쳐 원인조사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1999년 외신에 의해 노근리 사건이 알려지고 2000년 AP통신이 '한국전쟁 발발 초기에 미군에 의한 즉결처형 등 학살이 있었다' 는 보도가 되고 민간인집단학살이 국제적 쟁점으로 부각되면서 국내에서도 점차 이 문제는 공론화 되었다. 이후 학계 및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공식적으로 문제 제기가 이어졌고, 전국 각지의 유족회는 그 동안 기울였던 자체조사 성과를 취합하는 한편, 지역단위의 개별적 활동한계를 극복하고자 학계와 종교계 및 시민사회단체와 연합해 통합적 모임을 결성해 지역별 실태조사를 실시하며 공동 대응해가고 있다. 그리고 2000년 11월부터 특별법안을 준비하여 국가가 공식으로 이 문제에 나서서 해결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http://www.genocide.or.kr/map/map_popup.htm 에서 발췌, 요약.
황정순 할머니
<전쟁과 여성>이라는 책에 황정순 할머니의 증언이 실려 있다. 이 할머니는 전쟁 중에 보도연맹 사건으로 남편을, 미군의 민간인 학살로 자식을 잃었다.
“음력 6월 초하루에 보도연맹으로 끌려갔다. 그때는 청년들이 다 가입했으니까. 면에서, 지서에서 가입한 사람들 그리로 오라 해서, 아무 죄가 없으니까 모여서 갔다 아이가.그래 갔는데 유월 초하루에 간 사람이 아직 안 오고 있다..(중략)..돌아온 사람은 5~6명 밖에 안돼..(중략).. 갔다 온다고 하니까 놀러 갔다 오는가 보다 했제. 내가 한 6년은 기다렸다 아이가. 겨울에 낙엽이라도 떨어지면 오나 싶고 그랬다. 젊을 적에는 방에서 눈물이 세월이고….”
할머니께 할아버지가 왜 보도연맹에 가입하셨는지 이유를 묻자 자신은 이유를 잘 모른다고.. 당시 남의 집살이 하던 사람들도 어릴 때부터 전부 가입했었다고 대답하셨다. 당시 보도연맹원 중 80%는 이념과 사상은커녕 좌와 우가 뭔지도 모르는 일반 민간인이었다고 한다.
“내가 아이를 보니까 고추가 올라와 있는 거라. 남자애들은 죽으면 고추가 올라간다 하데. 그래서 내가 아들을 땅에 눕혀놓고… 후, 그건 말로 다 못한다..(중략)..아이를 눕혀놓고 있으니까 산에 올라갔던 사람들이 다 내려오는 기라. 우리도 가보자 해서 작대기 하나씩 짚고 가니까, 피가 흰 옷에 묻어 꺼멓고 빳빳한 기라. 그때만 해도 옷을 삼베로 해서 입었거든. 그때 물이 먹고 싶어 미치겠는 기라. 우리 시할매가 물 떠온다 했는데, 산에 코쟁이가 있어 무서워 가지도 못하고…”
할머니가 겪은 이 사건은 바로 마산 곡안리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황정순 할머니의 어린 아들은‘작전지역에서 움직이는 민간인’이었고 따라서‘적’이었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 할머니는 아들의 시신을 직접 땅에 누이고 이후 마을 주민들과 함께 거제도로 피난 가셨다고 한다. 이후 총상을 입고 친정인 마산, 할머니의 아버지가 계셨던 부산 등으로 이동하며 치료를 받으셨고 이후 곡안리로 돌아와 홀로 농사를 지으며 시어머니 부양과 시누이의 병간호를 하며 사셨다고 한다.
할머니는 세상이 좋아졌다며, 아무리 생각해도 새삼 세상이 좋아졌다는 걸 느낀다며 그런 얘기를 평생 못하고 살 줄 알았다고 하셨다. 김현아. 《전쟁과 여성》. 여름언덕. 2004
조직적 은폐, 강요된 망각
한국전쟁 당시 남북한 국가권력의 방조와 묵인 하에, 그리고 ‘자유세계’를 지키러 온 미군에 의해 무수히 많은 민간인 학살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1953년 7월 정전협정을 맺으면서 사실상 전면전으로의 전쟁은 종결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벌어졌던 무수히 많은 민간인 학살 사건이 아직 규명되고 있지 않은 채 학살의 피해자들은 5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지옥과 같은 학살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생존자와 그 가족들은 정권의 정당성을 위한 이데올로기로 인해 주변화 되어 묻혀진 채 그 지옥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온 생애를 통해 그 기억을 끌어안고서 살아왔다.
국가는 이들을 세 번 죽인 셈이다. 한국전쟁 당시의 학살이 첫 번째이고, 1960년 당시 진상규명 요구를 탄압한 것이 두 번째이며, 유가족과 자식들을 모두‘빨갱이’로 취급하여 1980년까지 이들을 연좌제로 묶은 것이 세 번째이다. 이들은 학살당한 사실조차 ‘학살’당한 채 ‘생존’을 위해 침묵해 온 것이다.
1949년 12월 경북 문경 지역에서 국군에게 학살당한 사람들의 호적에는 이들이 ‘공비’에 의해 학살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경남 거창에서 국군에게 학살당한 사람들의 호적에도 ‘사유미상’으로 기록되어 있다. 좌익 혐의를 받지 않기 위해 생존자와 피학살자의 유족들은 함구했고 그들의 자녀들은‘빨갱이의 가족’이기에‘연좌제’등의 불이익을 당하며 살아왔다. 그리하여 상당수의 피해자들은 자식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김동춘, 《전쟁과 사회》, 돌베게, 2000, p.197~200 발췌, 요약.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의 국가권력은 이들의 진상규명 요구를 그들 정권의 정당성을 지키기 위해 반공이데올로기의 잣대로 억압해왔다. 이는 한국전쟁 이후의 한국사회가 한국전쟁을 어떻게 바라보고 규정지어 왔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단적인 예일 것이다.
<참고문헌>
김동춘, 《전쟁과 사회》, 돌베게, 2000
박명림, 《한국 1950: 전쟁과 평화》, 나남출판사, 2002
김현아, 《전쟁과 여성》, 여름언덕, 2004
강정구, <한국전쟁과 양민학살의 양태분석>, 『현장에서 미래를』 58, 2000
전성호, <북한의 6.25 양민학살 1번지-전남 영광>, 1987.
연합뉴스 2004년 2월 2일 뉴스
<참고 사이트>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http://www.genocide.or.kr/
한국전쟁 시절의 대량학살에 대한 실태와 그 의미에 대한 분석
대량학살의 개념
한국전쟁에서의 학살-학살 주체별 분류
사례 1 - 노근리 학살
사례2- 보도연맹
사례3- 인민군에 의한 학살
기타 사례- 거창, 마산, 고양의 학살사건
한국전쟁에서의 학살의 특징과 그 의미
민간인학살의 진상규명운동 과정
황정순 할머니
조직적 은폐, 강요된 망각
<참고문헌>
<참고 사이트>
1999년 외신에 의해 노근리 사건이 알려지고 2000년 AP통신이 '한국전쟁 발발 초기에 미군에 의한 즉결처형 등 학살이 있었다' 는 보도가 되고 민간인집단학살이 국제적 쟁점으로 부각되면서 국내에서도 점차 이 문제는 공론화 되었다. 이후 학계 및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공식적으로 문제 제기가 이어졌고, 전국 각지의 유족회는 그 동안 기울였던 자체조사 성과를 취합하는 한편, 지역단위의 개별적 활동한계를 극복하고자 학계와 종교계 및 시민사회단체와 연합해 통합적 모임을 결성해 지역별 실태조사를 실시하며 공동 대응해가고 있다. 그리고 2000년 11월부터 특별법안을 준비하여 국가가 공식으로 이 문제에 나서서 해결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http://www.genocide.or.kr/map/map_popup.htm 에서 발췌, 요약.
황정순 할머니
<전쟁과 여성>이라는 책에 황정순 할머니의 증언이 실려 있다. 이 할머니는 전쟁 중에 보도연맹 사건으로 남편을, 미군의 민간인 학살로 자식을 잃었다.
“음력 6월 초하루에 보도연맹으로 끌려갔다. 그때는 청년들이 다 가입했으니까. 면에서, 지서에서 가입한 사람들 그리로 오라 해서, 아무 죄가 없으니까 모여서 갔다 아이가.그래 갔는데 유월 초하루에 간 사람이 아직 안 오고 있다..(중략)..돌아온 사람은 5~6명 밖에 안돼..(중략).. 갔다 온다고 하니까 놀러 갔다 오는가 보다 했제. 내가 한 6년은 기다렸다 아이가. 겨울에 낙엽이라도 떨어지면 오나 싶고 그랬다. 젊을 적에는 방에서 눈물이 세월이고….”
할머니께 할아버지가 왜 보도연맹에 가입하셨는지 이유를 묻자 자신은 이유를 잘 모른다고.. 당시 남의 집살이 하던 사람들도 어릴 때부터 전부 가입했었다고 대답하셨다. 당시 보도연맹원 중 80%는 이념과 사상은커녕 좌와 우가 뭔지도 모르는 일반 민간인이었다고 한다.
“내가 아이를 보니까 고추가 올라와 있는 거라. 남자애들은 죽으면 고추가 올라간다 하데. 그래서 내가 아들을 땅에 눕혀놓고… 후, 그건 말로 다 못한다..(중략)..아이를 눕혀놓고 있으니까 산에 올라갔던 사람들이 다 내려오는 기라. 우리도 가보자 해서 작대기 하나씩 짚고 가니까, 피가 흰 옷에 묻어 꺼멓고 빳빳한 기라. 그때만 해도 옷을 삼베로 해서 입었거든. 그때 물이 먹고 싶어 미치겠는 기라. 우리 시할매가 물 떠온다 했는데, 산에 코쟁이가 있어 무서워 가지도 못하고…”
할머니가 겪은 이 사건은 바로 마산 곡안리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황정순 할머니의 어린 아들은‘작전지역에서 움직이는 민간인’이었고 따라서‘적’이었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 할머니는 아들의 시신을 직접 땅에 누이고 이후 마을 주민들과 함께 거제도로 피난 가셨다고 한다. 이후 총상을 입고 친정인 마산, 할머니의 아버지가 계셨던 부산 등으로 이동하며 치료를 받으셨고 이후 곡안리로 돌아와 홀로 농사를 지으며 시어머니 부양과 시누이의 병간호를 하며 사셨다고 한다.
할머니는 세상이 좋아졌다며, 아무리 생각해도 새삼 세상이 좋아졌다는 걸 느낀다며 그런 얘기를 평생 못하고 살 줄 알았다고 하셨다. 김현아. 《전쟁과 여성》. 여름언덕. 2004
조직적 은폐, 강요된 망각
한국전쟁 당시 남북한 국가권력의 방조와 묵인 하에, 그리고 ‘자유세계’를 지키러 온 미군에 의해 무수히 많은 민간인 학살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1953년 7월 정전협정을 맺으면서 사실상 전면전으로의 전쟁은 종결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벌어졌던 무수히 많은 민간인 학살 사건이 아직 규명되고 있지 않은 채 학살의 피해자들은 5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지옥과 같은 학살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생존자와 그 가족들은 정권의 정당성을 위한 이데올로기로 인해 주변화 되어 묻혀진 채 그 지옥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온 생애를 통해 그 기억을 끌어안고서 살아왔다.
국가는 이들을 세 번 죽인 셈이다. 한국전쟁 당시의 학살이 첫 번째이고, 1960년 당시 진상규명 요구를 탄압한 것이 두 번째이며, 유가족과 자식들을 모두‘빨갱이’로 취급하여 1980년까지 이들을 연좌제로 묶은 것이 세 번째이다. 이들은 학살당한 사실조차 ‘학살’당한 채 ‘생존’을 위해 침묵해 온 것이다.
1949년 12월 경북 문경 지역에서 국군에게 학살당한 사람들의 호적에는 이들이 ‘공비’에 의해 학살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경남 거창에서 국군에게 학살당한 사람들의 호적에도 ‘사유미상’으로 기록되어 있다. 좌익 혐의를 받지 않기 위해 생존자와 피학살자의 유족들은 함구했고 그들의 자녀들은‘빨갱이의 가족’이기에‘연좌제’등의 불이익을 당하며 살아왔다. 그리하여 상당수의 피해자들은 자식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김동춘, 《전쟁과 사회》, 돌베게, 2000, p.197~200 발췌, 요약.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의 국가권력은 이들의 진상규명 요구를 그들 정권의 정당성을 지키기 위해 반공이데올로기의 잣대로 억압해왔다. 이는 한국전쟁 이후의 한국사회가 한국전쟁을 어떻게 바라보고 규정지어 왔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단적인 예일 것이다.
<참고문헌>
김동춘, 《전쟁과 사회》, 돌베게, 2000
박명림, 《한국 1950: 전쟁과 평화》, 나남출판사, 2002
김현아, 《전쟁과 여성》, 여름언덕, 2004
강정구, <한국전쟁과 양민학살의 양태분석>, 『현장에서 미래를』 58, 2000
전성호, <북한의 6.25 양민학살 1번지-전남 영광>, 1987.
연합뉴스 2004년 2월 2일 뉴스
<참고 사이트>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http://www.genocide.or.kr/
한국전쟁 시절의 대량학살에 대한 실태와 그 의미에 대한 분석
대량학살의 개념
한국전쟁에서의 학살-학살 주체별 분류
사례 1 - 노근리 학살
사례2- 보도연맹
사례3- 인민군에 의한 학살
기타 사례- 거창, 마산, 고양의 학살사건
한국전쟁에서의 학살의 특징과 그 의미
민간인학살의 진상규명운동 과정
황정순 할머니
조직적 은폐, 강요된 망각
<참고문헌>
<참고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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