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전쟁론 주요내용 요약
2.군사목표
3.절대전쟁과 현실전쟁의 차이점
4.전쟁론이 난해, 오해되고 있는 이유
* 참고 : 클라우제비츠는 누구인가
2.군사목표
3.절대전쟁과 현실전쟁의 차이점
4.전쟁론이 난해, 오해되고 있는 이유
* 참고 : 클라우제비츠는 누구인가
본문내용
받고 있는 이유기도 한 것으로 전쟁이라는 사회현상을 변증법에 의해 구명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변증법이란 정립과 반정립이 대립을 거쳐 정립(종합)에 도달하는 사상과 실존의 논리적인 발전이요 사고 방법이며, 그것의 본질은 대립이 변화나 운동의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일례로 클라우제비츠는 최초에 적군의 타도격멸을 목표로 하는 절대전쟁을 신봉하다가 다음에는 국경부근에서 적의 영토일부를 정복하려는 현실전쟁으로 전환함으로써 ‘전쟁이란 다른 수단을 가지고 하는 정책의 계속이다’라는 것으로 발전해간 것을 들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전쟁론은 그 연구 방법론적 측면에서 포괄적이며 학제적 연구 방법에 의한 철학적 요소 등으로 인해 난해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2. 전쟁론은 왜 오해되는가?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이 오해를 받고 있는 가장 큰 원인은 절대전쟁과 현실전쟁의 견해가 혼재되어 있는 미완성 작품 이라는 데서 연유한다.
그는 초기에 절대 전쟁의 관점에서 집필을 시작했으나 40대 후반에 이르러 현실전쟁으로 전향하게 되는데, 1827년 7월 10일자 각서(알리는 글)에 의하면 “1편에서 6편까지의 개작”을 언급하면서, 개작을 통해 “잡티와 같은 내용들은 제거되고 분열과 균열은 결합되며, 보편적인 사실들은 보다 확고한 사상과 형태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1830년 포병 감으로 임명되면서 수정작업은 중단되었고, 1831년 병사함으로써 미완성 작품으로 남게 되었다.
※전쟁론의 절대전쟁과 현실전쟁의 분류
절 대 전 쟁
현 실 전 쟁
제1편, 전쟁의 본질(제1장 제외)
제2편, 전쟁 이론
제3편, 전략
제4편, 전투
제5편, 전투력
제6편, 방어
제1편, 제1장 전쟁이란 무엇인가
제7편, 공격
제8편, 전쟁계획
■ 참고 : 클라우제비츠는 누구인가?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는 1780년 6월 1일 프로이센의 부르크에서 태어났고, 1831년 11월 16일 콜레라 증상으로 사망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정치, 경제, 사회구조의 혁명시대였으며, 나폴레옹, 헤겔, 괴테, 하이네, 등 걸출한 인물들이 배출된 격변의 시대였다. 클라우제비츠의 할아버지는 할레대학의 신학 교수였고, 아버지는 7년 전쟁에 참여했던 프로이센군 장교였다.
그는 1792년 12세의 미소년으로 군문에 들어선 후1793년 13세에 사관생도로서 프랑스군을 라인란트에서 축출하기 위한 마인츠 재탈환 전투에 참가했다. 그가 소위로 임관한 것은 16세 때인 1795년, 그 후 요새방어부대에 근무하면서 대위로 진급했고, 1801년에는 베를린 전쟁학교에 입교하여 3년간 전쟁수업에 열중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당시 교장이었던 샤른호르스트(Gehard von Scharnhorst)와의 역사적인 인연이 시작된다. 후일 샤른호르스트를 ‘정신적 아버지’로 부를 정도로 클라우제비츠가 전쟁연구에 정진하도록 가르쳐주고, 그의 운명을 결정한 인물이다.
1804년 전쟁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클라우제비츠는 프로이센의 아우구스트 황태자의 전속부관으로 발탁된다. 그는 이 기간 동안 나폴레옹이 1804년 프랑스의 황제로 등극하기까지 승승장구하는 과정을 깊은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다. 1805년 25세가 되던 해에 대위로 진급했고 마리와 약혼했다. 이때에 그는 당대 최고의 군사이론가였던 뷜로의 전략이론을 반박하는 논문을 군사지에 기고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806년 청년 클라우제비츠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과정과 프로이센의 군사적, 정치적 붕괴를 체험했다. 그는 아우구스트 황태자와 함께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패배한 후 프랑스군의 포로가 되어 1807년 7월까지 약 10개월 동안 프랑스에 억류되어 있었다. 그해 11월에 귀국해서는 육군 장관 샤른호르스트 장군의 참모가 되어 프로이센군의 재편성 사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1808년 까지가 클라우제비츠의 성장기 또는 청년기라면, 프로이센군에 재 편입 되는 시점부터 1816년 까지는 그가 왕성하게 활동했던 기간이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다양하고 특별한 경험과 인상을 축적하면서 프로이센 패배의 정치적, 사회적, 군사적 원인들을 파악하게 된다.
1809년 프로이센군에 복귀하여 장군참모장교로 임명되었으며, 1810년 10월 30세에 소령으로 진급한다. 그해 그는 베를린 전쟁학교 교관이면서 황태자와 그의 동생(후에 프로이센 황제 빌헬름 1세)에게 전쟁학을 강의했으며, 12월 마리와 결혼 했다. 이들 부부의 금슬은 좋았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마리는 클라우제비츠의 전쟁연구에 조력하고, 후일 클라우제비츠가 사망한 후 그를 대신하여 전쟁론을 출간할 수 있었다.
1812년 프로이센이 나폴레옹과 동맹을 체결하자 프로이센군을 떠나 러시아군에서 복무했다. 1812년 전역에서 그는 러시아군 대령이요 참모로서 프랑스군의 공격에 맞서 싸웠으며, 러시아군이 후퇴작전에서 모스크바가 황폐화된 후에 진행된 나폴레옹군의 참사를 직접 목격하는 증인이 되었다. 1813년 3얼 클라우제비츠가 대 프랑스전에 참가하기 위해 프로이센군에 복귀하기를 희망했지만 프레드리히 3세는 이를 거부했다. 그는 러시아 군복을 입은 채 샤른호르스트의 비공식 보좌관 역할을 했으며, 1813년 다국적군으로 편성된 발모덴 군단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었지만 중요한 임무는 아니었다.
1818년 38세에 소장으로 진급했다. 개혁파였던 그는 한직으로 밀려나 39세부터 1830년 까지 전쟁학교 교장으로 봉직했다. 클라우제비츠는 이 기간 중 전쟁론을 집필했으며, 자신의 사상과 정신을 집대성할 수 있었다. 그는 정치적 관점에서 전쟁을 규명하고 철학적 이성으로 전쟁의 본질을 파헤치는 데 군인적인 열정을 쏟았다.
1830년 8월 제2 포병감으로 전출되었고, 51세 되던 해인 1831년 11월 16일 브레슬라우에서 사망했다.
<참고문헌>
이종학,『전략이론이란 무엇인가』, 대전 : 충남대출판부, 2005.
이종학,『클라우제비츠와 전쟁론』, 서울 : 주류성, 2004.
이종학,『군사전략론』, 서울 : 박영사, 1992.
이종학,『군사논문선』, 경주 : 서라벌군사연구소, 1991.
유제승 역,『전쟁론』, 서울 : 책세상, 2002.
일례로 클라우제비츠는 최초에 적군의 타도격멸을 목표로 하는 절대전쟁을 신봉하다가 다음에는 국경부근에서 적의 영토일부를 정복하려는 현실전쟁으로 전환함으로써 ‘전쟁이란 다른 수단을 가지고 하는 정책의 계속이다’라는 것으로 발전해간 것을 들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전쟁론은 그 연구 방법론적 측면에서 포괄적이며 학제적 연구 방법에 의한 철학적 요소 등으로 인해 난해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2. 전쟁론은 왜 오해되는가?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이 오해를 받고 있는 가장 큰 원인은 절대전쟁과 현실전쟁의 견해가 혼재되어 있는 미완성 작품 이라는 데서 연유한다.
그는 초기에 절대 전쟁의 관점에서 집필을 시작했으나 40대 후반에 이르러 현실전쟁으로 전향하게 되는데, 1827년 7월 10일자 각서(알리는 글)에 의하면 “1편에서 6편까지의 개작”을 언급하면서, 개작을 통해 “잡티와 같은 내용들은 제거되고 분열과 균열은 결합되며, 보편적인 사실들은 보다 확고한 사상과 형태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1830년 포병 감으로 임명되면서 수정작업은 중단되었고, 1831년 병사함으로써 미완성 작품으로 남게 되었다.
※전쟁론의 절대전쟁과 현실전쟁의 분류
절 대 전 쟁
현 실 전 쟁
제1편, 전쟁의 본질(제1장 제외)
제2편, 전쟁 이론
제3편, 전략
제4편, 전투
제5편, 전투력
제6편, 방어
제1편, 제1장 전쟁이란 무엇인가
제7편, 공격
제8편, 전쟁계획
■ 참고 : 클라우제비츠는 누구인가?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는 1780년 6월 1일 프로이센의 부르크에서 태어났고, 1831년 11월 16일 콜레라 증상으로 사망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정치, 경제, 사회구조의 혁명시대였으며, 나폴레옹, 헤겔, 괴테, 하이네, 등 걸출한 인물들이 배출된 격변의 시대였다. 클라우제비츠의 할아버지는 할레대학의 신학 교수였고, 아버지는 7년 전쟁에 참여했던 프로이센군 장교였다.
그는 1792년 12세의 미소년으로 군문에 들어선 후1793년 13세에 사관생도로서 프랑스군을 라인란트에서 축출하기 위한 마인츠 재탈환 전투에 참가했다. 그가 소위로 임관한 것은 16세 때인 1795년, 그 후 요새방어부대에 근무하면서 대위로 진급했고, 1801년에는 베를린 전쟁학교에 입교하여 3년간 전쟁수업에 열중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당시 교장이었던 샤른호르스트(Gehard von Scharnhorst)와의 역사적인 인연이 시작된다. 후일 샤른호르스트를 ‘정신적 아버지’로 부를 정도로 클라우제비츠가 전쟁연구에 정진하도록 가르쳐주고, 그의 운명을 결정한 인물이다.
1804년 전쟁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클라우제비츠는 프로이센의 아우구스트 황태자의 전속부관으로 발탁된다. 그는 이 기간 동안 나폴레옹이 1804년 프랑스의 황제로 등극하기까지 승승장구하는 과정을 깊은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다. 1805년 25세가 되던 해에 대위로 진급했고 마리와 약혼했다. 이때에 그는 당대 최고의 군사이론가였던 뷜로의 전략이론을 반박하는 논문을 군사지에 기고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806년 청년 클라우제비츠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과정과 프로이센의 군사적, 정치적 붕괴를 체험했다. 그는 아우구스트 황태자와 함께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패배한 후 프랑스군의 포로가 되어 1807년 7월까지 약 10개월 동안 프랑스에 억류되어 있었다. 그해 11월에 귀국해서는 육군 장관 샤른호르스트 장군의 참모가 되어 프로이센군의 재편성 사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1808년 까지가 클라우제비츠의 성장기 또는 청년기라면, 프로이센군에 재 편입 되는 시점부터 1816년 까지는 그가 왕성하게 활동했던 기간이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다양하고 특별한 경험과 인상을 축적하면서 프로이센 패배의 정치적, 사회적, 군사적 원인들을 파악하게 된다.
1809년 프로이센군에 복귀하여 장군참모장교로 임명되었으며, 1810년 10월 30세에 소령으로 진급한다. 그해 그는 베를린 전쟁학교 교관이면서 황태자와 그의 동생(후에 프로이센 황제 빌헬름 1세)에게 전쟁학을 강의했으며, 12월 마리와 결혼 했다. 이들 부부의 금슬은 좋았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마리는 클라우제비츠의 전쟁연구에 조력하고, 후일 클라우제비츠가 사망한 후 그를 대신하여 전쟁론을 출간할 수 있었다.
1812년 프로이센이 나폴레옹과 동맹을 체결하자 프로이센군을 떠나 러시아군에서 복무했다. 1812년 전역에서 그는 러시아군 대령이요 참모로서 프랑스군의 공격에 맞서 싸웠으며, 러시아군이 후퇴작전에서 모스크바가 황폐화된 후에 진행된 나폴레옹군의 참사를 직접 목격하는 증인이 되었다. 1813년 3얼 클라우제비츠가 대 프랑스전에 참가하기 위해 프로이센군에 복귀하기를 희망했지만 프레드리히 3세는 이를 거부했다. 그는 러시아 군복을 입은 채 샤른호르스트의 비공식 보좌관 역할을 했으며, 1813년 다국적군으로 편성된 발모덴 군단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었지만 중요한 임무는 아니었다.
1818년 38세에 소장으로 진급했다. 개혁파였던 그는 한직으로 밀려나 39세부터 1830년 까지 전쟁학교 교장으로 봉직했다. 클라우제비츠는 이 기간 중 전쟁론을 집필했으며, 자신의 사상과 정신을 집대성할 수 있었다. 그는 정치적 관점에서 전쟁을 규명하고 철학적 이성으로 전쟁의 본질을 파헤치는 데 군인적인 열정을 쏟았다.
1830년 8월 제2 포병감으로 전출되었고, 51세 되던 해인 1831년 11월 16일 브레슬라우에서 사망했다.
<참고문헌>
이종학,『전략이론이란 무엇인가』, 대전 : 충남대출판부, 2005.
이종학,『클라우제비츠와 전쟁론』, 서울 : 주류성, 2004.
이종학,『군사전략론』, 서울 : 박영사, 1992.
이종학,『군사논문선』, 경주 : 서라벌군사연구소, 1991.
유제승 역,『전쟁론』, 서울 : 책세상,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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