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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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려청자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문
1. 청자의 기원과 전래
2. 고려 청자의 발생 배경
3. 청자의 종류
4. 청자의 발달 과정

Ⅲ. 결론

본문내용

독특한 자기이다. 상감자기는 소지의 겉면에 무늬홈을 파고 거기에 바탕흙과는 다른 색흙을 밀어넣어 무늬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청자기 외에 백자기, 검은자기 등에 다 적용되었는데 가장 많이 쓰인 것은 청자기였다. 청자기에 상감을 하는 경우에는 바탕흙보다 철분이 훨씬 많이 섞인 색흙이나 백토를 상감재료로 썼다. 이 경우에 철분이 많은 색흙은 환원소성하여 흑갈색이나 검은색으로 나타나고 백토는 흰색으로 나타난다. 상감청자기의 일반적 특징은 선명하고 뚜렷한 무늬와 시원한 회청색 계통의 맑은색, 아름다운 형태가 유기적으로 잘 결합되어 진귀한 양상을 띠고 있는 것이다. 상감기법으로 장식된 무늬들은 어느것이나 다 음각이나 양각 등 조작적 기법으로 처리된 무늬들에 비하여 더 선명하고 뚜렷하며 바탕색깔과 유기적으로 통일되어 은근하게 안겨온다. 음각이나 양각법으로 처리된 무늬들은 바탕을 파거나 돋구어주는 방법으로 처리되었기 때문에 파진부위에 유약이 더 깊이 차면서 무늬를 나타낸다. 그러나 상감한 것은 바탕색깔과 다른 색흙을 이용한 것이기 때문에 서로 대조되면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한편 같은 색깔의 유약이기 때문에 무늬와 바탕이 자극적으로 대조됨이 없이 부드러우면서도 선명하게 살아난다. 이것은 상감기법이 조작적 기법과 회화적 기법이 배합되어 있는 특성과도 관련되어있다.
상감청자는 물병, 기름병, 꽃병, 화분류, 화장함, 자기베게 등 크기와 형태가 각이하다. 무늬는 동물무늬, 식물무늬, 환상무늬, 기하무늬 등이 있는데 이것들은 대체로 서로 배합되어 자연풍경을 재현한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9) 청자의 쇠퇴
몽고군의 침입으로 수십 년간에 걸친 사회 불안과 경제의 혼란으로 그처럼 정기어렸던 고려청자의 기품이 흐트러지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양상은 원종대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쇠퇴의 그림자는 청자의 기형, 태도와 유약, 번조수법 그리고 장식의장에 이르기까지 고루 미치게 되었다. 이것은 지나간 영광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운명적인 것이었다. 충렬왕 시대에 일시적으로 원 세력의 지배체제가 안정되면서 사회는 다시 평정을 되찾고 고려의 자예도 활기를 되찾는 듯했었지만 그 이후 얼마 안되어 다시 쇠퇴일로를 걷게 되고, 결국은 과거의 궤범에서는 점점 멀어져만 갔다. 청자상감의장은 과거의 양식을 그대로 계승하였으나 조잡하고 거칠었으며 그 표현에는 밀도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상감의장의 일부를 일정한 인형으로 압날해서 손쉽게 처리하는 등 매우 절제없는 풍조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그 다음 시대에 등장하는 조선시대의 인화문기법의 시원이 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 자기의 특징은 첫째로 그릇의 종류와 수량이 대폭 늘어나고 그릇형태가 대범해지고 살이 두터워지는 등 둔중한 감이 도는 것이며, 둘째로 색깔이 암회청색, 암갈황색으로 된 것이고, 셋째로 무늬가 복잡하게 장식되는 한편 많이 생략되고 간략화된 것과 새로운 무늬류가 등장한 것이다. 넷째로 자기에 간지명이나 소속기관명, 무덤명 등 제작 시기와 소속명을 명백히 밝힌 것 들이다.
살펴보면 1230년대부터 고려조가 쇠망해 버리는 1392년 무렵까지 고려의 자예는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그리고 간단없이 그 하한선을 더듬었다. 고려청자의 두드러진 곡선의 아름다움은 시대가 내려올수록 흐트러져서 우아 단정하기보다는 혼란한 사회에 알맞는 무겁고 둔한, 즉 실용성과 가능만을 생각하는 안이한 편화의 조형으로 바뀌어 가는 경향이 짙어만 갔다. 160년 동안에 걸친 긴 경로를 하나로 묶어서 쇠퇴기라고 본 것은, 고려의 국정이 그러했듯이 고려의 자예 또한 고려의 국운과 너무나 닮은 경로를 밟고 있었기 때문이다.
10) 조선도자 준비기 : 14세기 후반
공민왕(恭愍王:1375-1388년)으로 이어지는 14세기 후반은 격동의 시기로 조선도자(朝鮮陶磁) 분청자기(粉靑磁器)의 준비기였다. 이 시기에 있어 40여년간의 왜구들의 극심한 침략과 홍건족의 침입으로 청자제작의 중심지인 강진.부안의 청자가마들이 파괴되고 대신 전국내륙지방 곳곳에 제작되었던 초기분청자와 유사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릇내외면(器內外面) 구연부(口緣部) 아래 당초문대(唐草文帶)가 완전 초문화(草文化)되며 보상당초문(寶相唐草文)이 단순 반원형에 근접한다. 즉 이 시기는 고려시대 청자요지의 대표적인 가마인 부안, 강진요(窯)를 대신하여 내륙지방에 세워져 대량생산(大量生産)의 기반이 조성, 15세기 세종년간의 도자(陶磁)가 그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Ⅲ. 결론
고려시대에는 단군숭배의 전통적인 토속신앙과 불교·노장·풍수도참사상 등을 배경으로 청자를 주로 생산하고 세련시켰다. 12세기 전반에 비색순청자로서 유례가 없는 독특한 특색을 나타냈으며, 12세기 중엽에는 유약을 맑게 발전시켜 청자상감으로서 다시 한번 꽃을 피웠다. 고려청자는 은은하면서도 맑고 명랑한 비색, 조각도의 힘찬 선을 지니고 기물과 일체가 된 시적인 운치가 있는 상감문양, 유연하고 유려한 선 등 우리나라의 도자기 중 가장 아름답다.
박물관에 가서 보면 우리나라 도자기 중에 단연 돋보이는 것은 고려청자이다. 위에서 얘기한 아름다움 역시 다 고려청자의 아름다음이지만 역시 사람의 마음을 끄는 것은 고려청자의 아름다운 푸르른 그 빛깔이다. 고려청자의 비색이라고 불리는 그 색은 마치 비취옥과 같은 빛깔로 완전히 푸르지도 않고 풀색도 아닌 청록색 계통으로 보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중국의 두껍고 짙푸른 색의 청자와는 달리 맑고 명쾌한 색이 사람의 감탄을 자아낸다. 그 색에는 마치 도공의 영혼이 담겨 있어 오랜 시간이 흘러도 그 청명한 색깔을 지켜주는 것 같다.
우리는 여지 껏 이런 우리의 문화유산에 대해 무관심했었다. 박물관에 가서 고려청자를 보고도 그 색이 어떠했는지 모르는 사람도 많다. 나 역시 고려청자에 관해 흥미가 있어서 이 주제를 택해서 쓰면서도 자세히 기억나는 청자는 몇 개 안되었다. 색감에 대해서는 관심있게 보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기억이 나지만 고려청자의 모양이나 문양에 관해선 사진을 보며 흐릿해진 기억을 되살린 것이 대부분이다. 우리는 우리의 조상의 얼이 담긴 고려청자 뿐 아니라 모든 문화유산에 대해 관심과 사랑을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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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1.02
  • 저작시기2005.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30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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