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목 차
1. 영화의 등장
Ⅰ) 영화의 기본원리
Ⅱ) 주요인물
2. 무성영화 시대 (1895 ~ 1930)
Ⅰ) 특징
Ⅱ) 주요 인물
Ⅲ) 주요 사건
3. 발성영화 -> 유성영화 (1927 ~ )
Ⅰ) 특징
Ⅱ)주요 나라별 사건
4. 디지털 영화
I) 정의
II) 디지털 영화 제작의 장점
III) 디지털 영화 제작의 단점 (문제점)
IV) 디지털 영화 미래 전망
V) 결론&정리 : 필름영상에서 디지털 영상으로의 전환
5. 한국 영화
I) 한국 영화의 탄생 조짐(1800년대 말~1900년대 초)
II) 한국 영화의 탄생
III) 극영화시대(1923~1934)
IV) 발성영화 시대(1935~1939)
v) 유성영화 시대(1940~)
1. 영화의 등장
Ⅰ) 영화의 기본원리
Ⅱ) 주요인물
2. 무성영화 시대 (1895 ~ 1930)
Ⅰ) 특징
Ⅱ) 주요 인물
Ⅲ) 주요 사건
3. 발성영화 -> 유성영화 (1927 ~ )
Ⅰ) 특징
Ⅱ)주요 나라별 사건
4. 디지털 영화
I) 정의
II) 디지털 영화 제작의 장점
III) 디지털 영화 제작의 단점 (문제점)
IV) 디지털 영화 미래 전망
V) 결론&정리 : 필름영상에서 디지털 영상으로의 전환
5. 한국 영화
I) 한국 영화의 탄생 조짐(1800년대 말~1900년대 초)
II) 한국 영화의 탄생
III) 극영화시대(1923~1934)
IV) 발성영화 시대(1935~1939)
v) 유성영화 시대(1940~)
본문내용
연간 146일이상 한국영화 상영을 의무화하고 있으나 문화관광부 장관이 20일, 지방자치단체장이 20일 등 연간 40일 범위 안에서 필요하다고 인정하면 줄여줄 수 있는 재량권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에 하한선은 106일로 봄.
- 1960년대 초반 필름값이 너무 비싸서 하프 사이즈라는 기묘한 촬영방식이 한때 유행. (35mm 필름을 반으로 나누어 촬영하는 방식)
- 1960년대 대표적인 영화 : 굴비(김수용), 하녀(김기영), 오발탄(유현목), 아낌없이 주련다(유현목), 벙어리 삼룡이(신상옥), 남과 북(김기덕), 갯마을(김수용)
· 우리나라 영화산업의 침체기(1970년대)
- 한국영화의 본격적인 컬러시대로의 진입.
- TV시대 도래와 유신체제하의 가혹한 검열과 레저 산업의 활기로 인해 영화산업의 침체기.
- 1977년 영화제작에 앞서 사전에 시나리오 심의.
- 1970년대 대표적인 영화 : 세 남매(전조영), 무녀도(최하원), 효녀 청이(신상옥), 다정다한(최하원), 별들의 고향(이장호), 토지(김수용), 어머니(임원식)
·소재의 다양한 접근과 영화적 해석으로 새로워지는 한국영화(1980년대)
- 1980년대 영화계의 불황이 계속됨.
영화의 해외진출이 활발해짐(이유: 광주민주화운동과 뛰는 물가와 영화인구와 영화관이 줄어듬)
검열이 개방되고 완화됨.
- 1980년 12월TV가 컬러 TV로 전환
- 1982년 동시녹음 가능해짐.
- 1985년 개정된 새 영화 법이 시행됨.(검열제도가 심의제로 바뀜)
등급심사제도 표방
- 1989년 비디오세트의 보급이 확산되어 본격적으로 비디오 시대가 열림.
- 1980년대 대표적인영화 : 피막(이두용), 만다라(임권택), 애마부인(정인엽), 바보선언(이장호), 땡볕(하명중), 어우동(이장호), 기쁜 우리 젊은 날(배창호),
달마가 동쪽으로 간 이유는(배용균)
· 대중과 문화의 접점에 선 한국 영화(1990년대)
- 1994년 영화는 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를 받아야하며 심의결과에 따라 4개의 관람등급으로 구분되고 결정.
* 관람등급 : 연소자 관람가, 중학생 이상 관람가, 고등학생 이상 관람가, 연소자 관람불가
- 1996년 10월 4일 헌법재판소는 사전검열은 헌법위반이라고 판결.
→ 이후 등급 심사제도 필요성이 시급해짐.
- 1997년 IMF로인해 영화산업 다시 침체되기 시작함.
- 1990년대 새로운 제작형태의 영화들이 주목 받기 시작: 독립영화, 혹은 단편영화라고 불리는 영화.
헐리우드 영화가 압도적. 한국영화가 제작되는 양보다 수입되는 외국영화의 양이 많아지는 역조현상이 생김.
영화수출은 꾸준히 증가. 해외영화제 적극참가.
대기업이 영화제작에 참여하는 양상을 띰.
후반에 이르러 컴퓨터 그래픽에 의한 특수기술이 위력을 나타내기 시작함.
컴퓨터 애니메이션 도입.
영화 진흥공사는 현상기술의 현대화를 위해 현상시설을 운영하였고, 디지털 녹음에 착수하여 기술 발전에 큰 업적을 세움.
- 1990년대 대표적인 영화 : 개벽(임권택),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박종원), 서편제(임권택), 투캅스(강우석), 닥터봉(이광훈), 은행나무 침대(강제규, 박철민), 약속(김유진)
<스크린쿼터제 문제>
현재 프랑스, 스페인 등 전세계 10개국 이상이 현재 스크린 쿼터를 채택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는 최근 자국 내 총 영화관의30% 가량을 일본 영화 전용 상연관으로 정하는 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여러 정책을 펼치고 있다. 이러한 일본 정부의 노력은 일본이 자국 영화의 시장 점유율 40%를 유지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프랑스는 방송쿼터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국내 영화와 TV를 뒷받침하기 위해 영화표·텔레비전 채널·비디오 테잎에 대한 세금을 부과하여 문화기금으로 사용하고 있다.
스크린 쿼터제는 일종의 무역장벽이기 때문에 현재 이를 시행하고 있는 나라들의 경우 미국의 압력에 의해 그 일수를 축소했거나 향 후 축소계획을 갖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1985년 9월부터 미국영화수출협회가 한국정부는 불공정한 무역규제와 과도한 검열 등으로 수입장벽을 쌓고 있다고 미국통상대표부에 제소한 것을 계기로 스크린 쿼터 논쟁은 해가 갈수록 가열되고 있다.
한국이 WTO에 가입할 때 난관을 겪은 것도 스크린 쿼터제였다. 문화의 주체성을 확보하려는 국민들의 열망에 따라 당국은 강경하게 맞섰으나 신통한 결과를 얻지 못하고 이 문제는 다자간 협상으로 넘겨졌다. 미국은 끈질기게 밀어붙였으나 나중에는 스크린 쿼터 페지에서 한발짝 물러나 스크린 쿼터 축소로 전술을 바꿨다. 정부도 끈질기게 저항해 왔지만 자동차, 철강 등 수출전략과 맞물리면서 계속 강력한 압박을 받고 있다. 통상외교부는 다른 경제적인 이익을 위해 스크린 쿼터를 양보하자는 입장에 있고, 문화관광부는 보다 강하게 대처하고 있긴 하지만 현재 낙관할 만한 상황은 아니다.
<스크린쿼터제 축소에 대한 양측의 입장>
1) 영화인을 중심으로 하는 ‘스크린쿼터’ 수호론자
- '스크린쿼터'를 없앤 다른 나라(맥시코 등)의 경우 이로 인해 자국영화의 경쟁력은 상실되게 되었고,존립기반마저 흔들리고 있으며, 이는 특히 헐리웃 영화의 시장 지배력을 넓히게 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세계적 문화의 잠식을 우려한다는 대 전제를 가지고 있다.또한 이제 막 중흥기를 맞이한 한국영화의 성장이 아직 '미완의 대기' 이며, 앞으로 지속적으로 발전되는 틀을 만들어 놓았을 뿐인데, 벌써 제도 자체를 폐지시키는 것은 결국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소중한 문화의 단면을 잘라낸다는 것이다.
2) 스크린쿼터를 폐지를 주장하고 있는 국가 경제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
- 이미 WTO 시장으로 변환한 현 시점에서 영화라는 것도 결국 시장 경제의 논리에 맞게 개방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를 고수하자는 것은 고립되는 영화 시장의 자멸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미 검증된 한국영화의 경쟁력이라면(특히 해외영화제 수상, 거듭되고 있는 한국 영화의 훌륭한 수출실적)이제는 그것이 흥성대원군의 쇄국정치의의미와 다름이 없다는 주장이다. 덧붙이면 자꾸 보호를 하자는 것은 결국 영화인들 스스로의 ‘제 밥그릇 챙기기’라는 비하적인 반응도 있다.
- 1960년대 초반 필름값이 너무 비싸서 하프 사이즈라는 기묘한 촬영방식이 한때 유행. (35mm 필름을 반으로 나누어 촬영하는 방식)
- 1960년대 대표적인 영화 : 굴비(김수용), 하녀(김기영), 오발탄(유현목), 아낌없이 주련다(유현목), 벙어리 삼룡이(신상옥), 남과 북(김기덕), 갯마을(김수용)
· 우리나라 영화산업의 침체기(1970년대)
- 한국영화의 본격적인 컬러시대로의 진입.
- TV시대 도래와 유신체제하의 가혹한 검열과 레저 산업의 활기로 인해 영화산업의 침체기.
- 1977년 영화제작에 앞서 사전에 시나리오 심의.
- 1970년대 대표적인 영화 : 세 남매(전조영), 무녀도(최하원), 효녀 청이(신상옥), 다정다한(최하원), 별들의 고향(이장호), 토지(김수용), 어머니(임원식)
·소재의 다양한 접근과 영화적 해석으로 새로워지는 한국영화(1980년대)
- 1980년대 영화계의 불황이 계속됨.
영화의 해외진출이 활발해짐(이유: 광주민주화운동과 뛰는 물가와 영화인구와 영화관이 줄어듬)
검열이 개방되고 완화됨.
- 1980년 12월TV가 컬러 TV로 전환
- 1982년 동시녹음 가능해짐.
- 1985년 개정된 새 영화 법이 시행됨.(검열제도가 심의제로 바뀜)
등급심사제도 표방
- 1989년 비디오세트의 보급이 확산되어 본격적으로 비디오 시대가 열림.
- 1980년대 대표적인영화 : 피막(이두용), 만다라(임권택), 애마부인(정인엽), 바보선언(이장호), 땡볕(하명중), 어우동(이장호), 기쁜 우리 젊은 날(배창호),
달마가 동쪽으로 간 이유는(배용균)
· 대중과 문화의 접점에 선 한국 영화(1990년대)
- 1994년 영화는 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를 받아야하며 심의결과에 따라 4개의 관람등급으로 구분되고 결정.
* 관람등급 : 연소자 관람가, 중학생 이상 관람가, 고등학생 이상 관람가, 연소자 관람불가
- 1996년 10월 4일 헌법재판소는 사전검열은 헌법위반이라고 판결.
→ 이후 등급 심사제도 필요성이 시급해짐.
- 1997년 IMF로인해 영화산업 다시 침체되기 시작함.
- 1990년대 새로운 제작형태의 영화들이 주목 받기 시작: 독립영화, 혹은 단편영화라고 불리는 영화.
헐리우드 영화가 압도적. 한국영화가 제작되는 양보다 수입되는 외국영화의 양이 많아지는 역조현상이 생김.
영화수출은 꾸준히 증가. 해외영화제 적극참가.
대기업이 영화제작에 참여하는 양상을 띰.
후반에 이르러 컴퓨터 그래픽에 의한 특수기술이 위력을 나타내기 시작함.
컴퓨터 애니메이션 도입.
영화 진흥공사는 현상기술의 현대화를 위해 현상시설을 운영하였고, 디지털 녹음에 착수하여 기술 발전에 큰 업적을 세움.
- 1990년대 대표적인 영화 : 개벽(임권택),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박종원), 서편제(임권택), 투캅스(강우석), 닥터봉(이광훈), 은행나무 침대(강제규, 박철민), 약속(김유진)
<스크린쿼터제 문제>
현재 프랑스, 스페인 등 전세계 10개국 이상이 현재 스크린 쿼터를 채택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는 최근 자국 내 총 영화관의30% 가량을 일본 영화 전용 상연관으로 정하는 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여러 정책을 펼치고 있다. 이러한 일본 정부의 노력은 일본이 자국 영화의 시장 점유율 40%를 유지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프랑스는 방송쿼터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국내 영화와 TV를 뒷받침하기 위해 영화표·텔레비전 채널·비디오 테잎에 대한 세금을 부과하여 문화기금으로 사용하고 있다.
스크린 쿼터제는 일종의 무역장벽이기 때문에 현재 이를 시행하고 있는 나라들의 경우 미국의 압력에 의해 그 일수를 축소했거나 향 후 축소계획을 갖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1985년 9월부터 미국영화수출협회가 한국정부는 불공정한 무역규제와 과도한 검열 등으로 수입장벽을 쌓고 있다고 미국통상대표부에 제소한 것을 계기로 스크린 쿼터 논쟁은 해가 갈수록 가열되고 있다.
한국이 WTO에 가입할 때 난관을 겪은 것도 스크린 쿼터제였다. 문화의 주체성을 확보하려는 국민들의 열망에 따라 당국은 강경하게 맞섰으나 신통한 결과를 얻지 못하고 이 문제는 다자간 협상으로 넘겨졌다. 미국은 끈질기게 밀어붙였으나 나중에는 스크린 쿼터 페지에서 한발짝 물러나 스크린 쿼터 축소로 전술을 바꿨다. 정부도 끈질기게 저항해 왔지만 자동차, 철강 등 수출전략과 맞물리면서 계속 강력한 압박을 받고 있다. 통상외교부는 다른 경제적인 이익을 위해 스크린 쿼터를 양보하자는 입장에 있고, 문화관광부는 보다 강하게 대처하고 있긴 하지만 현재 낙관할 만한 상황은 아니다.
<스크린쿼터제 축소에 대한 양측의 입장>
1) 영화인을 중심으로 하는 ‘스크린쿼터’ 수호론자
- '스크린쿼터'를 없앤 다른 나라(맥시코 등)의 경우 이로 인해 자국영화의 경쟁력은 상실되게 되었고,존립기반마저 흔들리고 있으며, 이는 특히 헐리웃 영화의 시장 지배력을 넓히게 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세계적 문화의 잠식을 우려한다는 대 전제를 가지고 있다.또한 이제 막 중흥기를 맞이한 한국영화의 성장이 아직 '미완의 대기' 이며, 앞으로 지속적으로 발전되는 틀을 만들어 놓았을 뿐인데, 벌써 제도 자체를 폐지시키는 것은 결국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소중한 문화의 단면을 잘라낸다는 것이다.
2) 스크린쿼터를 폐지를 주장하고 있는 국가 경제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
- 이미 WTO 시장으로 변환한 현 시점에서 영화라는 것도 결국 시장 경제의 논리에 맞게 개방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를 고수하자는 것은 고립되는 영화 시장의 자멸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미 검증된 한국영화의 경쟁력이라면(특히 해외영화제 수상, 거듭되고 있는 한국 영화의 훌륭한 수출실적)이제는 그것이 흥성대원군의 쇄국정치의의미와 다름이 없다는 주장이다. 덧붙이면 자꾸 보호를 하자는 것은 결국 영화인들 스스로의 ‘제 밥그릇 챙기기’라는 비하적인 반응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