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대사 ] 선덕여왕의 즉위배경과 업적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한국고대사 ] 선덕여왕의 즉위배경과 업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선덕여왕의 즉위 배경
1. 사회적 배경
2. 정치적 배경

Ⅲ. 지기삼사를 통해 본 선덕여왕

Ⅳ. 선덕여왕의 업적
1. 문화적 업적
2. 정치적 업적

Ⅴ. 결론

본문내용

공으로 국내외정세가 어지러운 시기였다. 진평왕 재위 54년 동안 무려 12번의 전쟁을 치러냈는데, 이들의 침공은 선덕여왕 시대에 와서도 그대로 이어지며, 더 한층 가속화된다.
638년 10월에 고구려가 七重城을 공격해 오자 11월에 이를 격퇴하였으며, 11년과 14년에는 무려 3차례의 침공을 받았다. 642년에는 백재의 의자왕에게 미후성 등 서쪽의 40여성을 잃는 최대의 위기에 놓였다. 이어 백제가 고구려와 모의하여 唐項城을 빼앗아 羅唐의 통로를 끊어버리자 선덕여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급파하여 당 태종은 고구려와 백제에 중지 요청 명령을 내린다. 백제 의자왕은 당 태종의 말에 따라 군사를 철수하였다.
이어서 백제에게 大耶城이 함락되자 金春秋를 고구려에 보내어 구원을 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643년에 다시 고구려 ·백제의 침입을 당나라에 호소하고 원군을 간청하였으며 이듬해 金庾信을 압량주(押梁州:지금의 慶山) 軍主에 임명하여 그로 하여금 백제에게 빼앗긴 성을 회복하게 하였다. 645년에 당태종이 고구려에 원정하자 원군을 보냈으나 다시 백제에게 서변 7성을 빼앗겼다.
내정에서는 善政을 베풀어 민생을 향상시켰고 구휼사업에 힘썼다. 그 좋은 본보기로, 여왕이 친히 내을신궁에 가서 백성들이 평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제사를 지내기도 했는가 하면, 가뭄이나 장마가 져서 백성들의 생활이 어렵게 되면 세금을 면제해 주었고, 죄수들이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는 기색이 있으면, 그들을 옥에서 풀어 주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기도 했다.
이러한 선덕여왕의 업적은 탁월한 인재 등용에 있었다고도 말 할 수 있는데, 자장, 김춘추, 김유신 등의 배출을 들 수 있다. 당시 신라 귀족들 사이에 김춘추와 김유신은 곱지 않은 존재였다. 김춘추는 조부 진지왕이 정치가 음란하다는 이유로 신라 귀족들에 의해 폐위된 불명예스런 왕가의 후손이다. 따라서 신라 정치에 있어서 상당히 입김이 세었고 보수적인 신라 진골 귀족들에게 김춘추 가문은 매우 못마땅했다. 김유신 역시 진골 귀족이라고는 하지만 신라 정통 귀족이 아닌 가야 왕실의 후손이었다. 김유신과 김춘추는 일단 신분상에 이러한 장애를 안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선덕여왕 때는 왕권이 귀족들의 힘을 누르는 데는 약했었고, 따라서 즉위 초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신라 귀족과의 사이에서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진평왕 53년에 발생한 칠숙과 석품의 반란은 선덕여왕 즉위 문제를 놓고 발생한 반란으로 추정하는 경우가 많으며, 선덕여왕 말년의 비담의 난은 귀족회의 대표인 상대등 비담이 일으킨 반란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인재 발탁에 있어서 가문이나 혈통이 아닌 현재의 개인적 역량과 자질에 둔 점을 역사평론가 이덕일 씨는 "여성이라는 자신의 핸디캡을 우수한 김춘추와 김유신이라는 인재들의 중용으로 맞섰고, 이 전략은 결과적으로 성공을 거두어 그가 중용한 두 인물은 나중에 삼국통일의 주역이 되었다. "라고 말한다.
선덕여왕의 인사정책 중 두드러진 인물로 자장이 있다. 그는 선덕여왕 11년 대야성 함락 등 신라의 위기로 인하여 국왕의 요청으로 당나라에서 귀국한 후 난국을 수습해 나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Ⅳ. 결론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에 대한 평가를 사람들은 어떻게 내리고 있을까? 김부식은 『三國史記』에서 선덕여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덕만은 성품이 너그럽고 인자하거 슬기롭다. …하늘로 말하자면 양은 굳세고 음은 유약하며, 사람으로 말하자면 남자는 높고 여자는 낮다. 하물며 어찌 늙은 할머니를 규방에서 나와 국가의 정사를 다스리게 하는가? 신라는 여자를 붙들어 왕위에 있게 했으니 진실로 난세의 일며, 이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김부식의 말을 곱씹어 볼수록 재미있다. 우선 그는 한 인간으로서 선덕여왕의 품성을 너그럽고 인자하고 슬기롭다고 한 데서는 긍정적이다. 그러나 여성이 왕이 된 것은 매우 못마땅해하고 있다. 그의 생각대로라면 여왕, 그것도 늙은 할머니 왕이 나라를 다스렸다면 당연히 망해야 함이 옳은데, 오히려 통치를 잘했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내 보이고 말았다. 반면 「조선명인전」의 문일평은 선덕의 품성과 통치자로서의 탁월함을 극찬한다. 소외된 이들을 사랑으로 감싸고 성정이 너그럽고 자예스러우면서도 인재의 기용함에도 남달랐던 眼目은 통치자로서의 여왕의 면모를 돋보이게 하는 부분이다. 문화유산에 있어서도 뚜렷한 업적을 남기고 있다. 첨성대를 제외한 모두가 불교의 산물이다. 물론 불교가 거의 삼국시대 전반에 걸쳐 문화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지만, 특히 선덕여왕 때 두드러지게 많다. 여왕은 불심으로 나라를 잘 다스렸으며, 백성들에게 복과 덕을 가져 주었다. 이것은 여왕의 치적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분황사, 영묘사, 생의사, 부인사, 통도사, 월정사, 등 수많은 사찰 건립, 황룡사 9층석탑 등의 문화유산을 고려해볼 때 그가 얼마나 佛心으로써 통치했으며 평화의 나라 불국토를 꿈꾸었는지 충분히 짐작 할 수 있다. 선덕여왕은 이처럼 재위기간동안 평탄치 못했던 국내외 정세 속에서도 1000년신라사에 있어 중요한 축을 이루었던 역사적인 여성인물인 것이다.
참 고 문 헌
박순정, 『선덕여왕을 클릭하면 큰 지혜가 보인다』, 서울 :오늘, 2000.
鄭容淑, 『新羅 善德王代의 정국동향과 毗曇의 亂』, 一潮閣, 1994.
, 「신라의 女王들」, 『한국사 시민강좌』15집, 一潮閣, 1994.
황원갑, 『한국사를 바꾼 여인들』, 책이있는 마을, 2002.
朴勇國, 「善德王代 初의 政治的 實狀」,『慶北史學』23집, 慶北大學校 文理科大學 史學科, 2000.
김기흥, 『천년의 왕국 신라』, 창작과 비평사, 2000.
강재철, 『善德王知幾三事條 說話의 歷史的 理解』, 集文堂, 2000.
일연 · 이민수 옮김, 『삼국유사』, 을유문화사, 1994.
김부식 · 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1996.
원작KBS역사스페셜/정종목, 『역사스페셜』124~143p, 효형출판, 2001.
인터넷 싸이트
네이버, www.naver.com
주간한국, www.hankooki.com [역사 속 여성이야기] 선덕여왕
  • 가격1,800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06.02.14
  • 저작시기2006.0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36874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