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선덕왕의 지기삼사(善德王知幾三事)
진덕왕(眞德王)
김유신(金庾信)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
진덕왕(眞德王)
김유신(金庾信)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
본문내용
되 일이 急(급)하니 人力(인력)으로는 할 수 없고 오직 神術(신술)이라야 救(구)할 것이라 하고 이에 星浮山(성부산)에 壇(단)을 設(설)하고 神術(신술)을 닦을새, 忽然(홀연)히 큰 독만한 光色(광색)이 壇上(단상)에서 나타나더니 별이 北(북)쪽으로 날라갔다【이로 因(인)하여 星浮山(성부산)이라 하나 山名(산명)에 있어서는 다른 說(설)이 있다. 山(산)이 都林(도림)의 南(남)쪽에 있어 한 봉오리를 솟친 그것이다. 서울에 한 사람이 있어 벼슬을 求(구)하려 하여 아들에게 큰 횃불을 만들라고 하여 밤에 이 山(산) 위에 올라 켜들게 하였다. 이날밤에 서울 사람들이 불을 바라보고 모두 말하기를 이상한 별이 그곳에 나타났다 하니 王(왕)이 듣고 두려워하여 사람을 모아 기도하라 하였다. 그 아비가 장차 거기에 應募(응모)하려 하였다. 日官(일관)이 아뢰되 이것은 큰 怪變(괴변)이 아니요 다만 한 집에 아들이 죽고 아비가 우는 징조라 하여 드디어 그만두었다. 이날밤에 그 아들이 山(산)에서 내려오다가 범에게 물려 죽었다】. 漢城中(한산성중)의 군사들은 救援兵(구원병)이 오지 아니함을 원망하며 서로 바라보고 울 뿐이었다. 賊(적)이 급히 치려할 때 갑자기 光彩(광채)가 南(남)쪽 하늘 끝에서 날라와서 벼락불이 되어 (敵:적의) 砲石三十餘所(포석30여소)를 쳐부수고 賊軍(적군)의 弓箭(궁전)과 矛戟(모극)이 분쇄되고 군사들이 모두 땅에 엎어지더니 얼마 후에 깨어나서 모두 흩어져 돌아가고, 우리 군사도 돌아왔었다. 太宗(태종)(武烈王:무열왕)이 처음 卽位(즉위)하였을 때 一頭二身八足(1두2신8족)의 도야지를 바치는 사람이 있었다. 解釋(해석)하는 자가 말하되 반드시 六合(육합)을 倂呑(병탄)할 瑞徵(서징)이라 하였다. 이 임금 때에 비로소 中國(중국)의 衣冠(의관)과 牙笏(아홀)을 쓰게 되었는데 그것은 慈藏法師(자장법사)가 唐帝(당제)에 請(청)하여 가져온 것이다. 神文王(신문왕) 때에 唐(당)의 高宗(고종)이 使者(사자)를 新羅(신라)에 보내어 이르기를 나의 聖考(성고)(父:부)는 魏徵(위징)·李淳風等(이순풍등)의 賢臣(현신)을 얻어 서로 心德(심덕)을 和合(화합)하여 天下(천하)를 統一(통일)하였으므로 「太宗皇帝(태종황제)」라 하였거니와, 너의 新羅(신라)는 海外(해외)의 小國(소국)으로 「太宗(태종)」의 稱號(칭호)를 사용하여 天子(천자)의 名器(명기)를 참람히 하는 것은 그 뜻이 不忠(불충)하니 속히 고치라 하였다. 新羅王(신라왕)이 글을 올려 가로되 新羅(신라)가 비록 小國(소국)이나 聖臣(성신) 金庾信(김유신)을 얻어서 三國(삼국)을 統一(통일)하였으므로 「太宗(태종)」이라고 한 것이라 하였다. 唐帝(당제)가 그 글을 보고 前(전)에 自己(자기)가 太子(태자)로 있을 때 하늘에서 부르짖어 三十三天(33천)의 한 사람이 新羅(신라)에 태어나서 庾信(유신)이 되었다고 하는 것을 自己(자기)가 책에 적어둔 것을 생각하고 끄내어 보고 놀라기를 마지 아니하며 다시 사람을 보내어 太宗(태종)의 稱號(칭호)를 고치지 아니해도 좋다고 하였다.
추천자료
상고, 고려, 조선 시대의 복식문화
천년의 왕국 신라 요약 및 비평
꿈의 현상학
안동지역 전통 문화 “안동지역 유물전설”
신라시대 오대산 사적의 형성
김춘추 관련 역사적 평가
화랑세기 진위 논란에 대해서
사천왕사지와 장항리사지를 통해 본 신라의 불교
경주 황룡사지(皇龍寺址)와 분황사지(芬皇寺址)
한국의 건축문화 고건축답사- ‘통도사 답사기’ 5p
한국의 역사와 문화 - 보물덩어리 경주남산지구- 3p
차와 커피의 역사 - 차와 커피의 어원, 전래과정, 차문화와 커피문화, 차의 역사적 발전과 쇠...
차(茶)와 커피(Coffee)의 역사
20대들이 선호하는 대박드라마의 요소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