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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둔 것을 생각하고 끄내어 보고 놀라기를 마지 아니하며 다시 사람을 보내어 太宗(태종)의 稱號(칭호)를 고치지 아니해도 좋다고 하였다. 선덕왕의 지기삼사(善德王知幾三事)
진덕왕(眞德王)
김유신(金庾信)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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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덕왕까지의 28왕을 일컬어 성골(聖骨)이라 하고, 무열왕부터 마지막 왕까지를 일컬어 진골(眞骨)이라 하였다. 당나라 영호징(令狐澄)의 신라기(新羅記)에 말하기를 『그 나라의 왕족은 제1골(第一骨)이라 하고 나머지 귀족은 제2골(第二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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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계승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침은 물론, 상대
등 출신이 왕위에 올랐다.
집사성: 품주가 집사성이 되고, 이것이 진덕왕 5년에 다시 집사부
로 개편되었다. 원래 품주는 재정기관이었는데, 조부 창부가 분화
되면서 정무를 담당한 집사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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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위가 굳어졌다. 성골 왕 시대 신라는 중국문명을 직수입하여 그것을 신라에 맞게 변용하여 신라의 문명을 발전시켰다.
Ⅴ. 성골왕 시대의 끝
진덕왕 5년때에 개혁이 있었다. 진덕왕 5년(651) 집사부를 설치하는 등 일련의 정치 조직의 편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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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덕왕 즉위 이후로부터 비담의 난이나 백제의 지속적인 공세로 인하여 급박한 지경에 이르렀고 설상가상으로 고구려가 가세하여 신라를 공격하면 돌이킬 수 없을 지경에 이를 것이라는 판단까지 나올 정도로 급박해지자 태도가 달라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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