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서론
Ⅱ.본론
◎이규보의생애
◎이규보의 작품세계와 이론
1.작품에 나타난 특징
2.이론에 나타난 특징
3.이규보의 문학관
Ⅲ.결론
참고문헌
Ⅱ.본론
◎이규보의생애
◎이규보의 작품세계와 이론
1.작품에 나타난 특징
2.이론에 나타난 특징
3.이규보의 문학관
Ⅲ.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196년(명종16년) 최충헌 형제는 이의민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그 다음 최충헌은 명종에게 실로 당시 기무에 적절한 내용의 시무 10책을 건의했다. 이점은 이전의 무신 정권 당국자들과는 다른 면모였다. 바로 그 최충헌이 관리를 임용했던 기준은 能文能史였다. 이 기준은 전통적인 기준인 문학적 재능의 여부와 당대의 필요인 실무적 능력을 모두 고려한 것으로 합리적인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이규보는 과거에 급제한 지 10년이 지나 1199년(신종2년)에 최충헌에게 인정을 받아 그나마 비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첫 관직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그 이유는 그가 통판낭장과 충돌하게 되어서 이다. 그는 곧 벼슬을 버리고 개경으로 돌아와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이규보가 최충헌에게 다시 알려지게 된 것은 그의 나이 40이 되던 해였다. 1207년(희종3년) 최충헌은 당대의 문인들을 초청해 時會을 열었다. 그 자리에서 이규보는 모정기를 써 바쳤는데 이것이 최충헌의 눈에 들어 비로소 벼슬에 임명되었고 그 이듬해 더 높은 관직에 임명 되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나서 1213년(강종2년) 12월 최우가 고관들을 부른 자리에 미관으로 참여했다. 이인로가 운을 부르고 40운이 넘는 대작을 즉석에서 이루어내니 최우는 이규보를 다시 최충헌에게 소개했다. 공작을 시제로 삼아 40여 운을 불렀는데 또한 즉석에서 시를 이루어냈다. 이것을 본 최충헌은 눈물까지 흘렀다고 한다. 겸손하게 7품 벼슬에 보임되기를 희망하여 그해 보임되었으나 곧 벼슬이 높아졌다.
52세 때(1219년: 고려 고종 6년) 일시 좌천되어 있었는데 그때 최충헌이 사망하고 최우가 집권했다. 그런데 최우는 최충헌보다 훨씬 더 이규보의 문학적 재능에 감동하고 있던 터라 바로 다시 소환했다. 그래서 후에 이규보는 벼슬이 계속 올랐다. 63세 때(1230년: 고려 고종 17년) 팔관회의 절차가 격식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유배되었다가 그 이듬해 고려 황려로 옮겼다.
1230년은 몽고가 침입해왔다. 그는 이때 백의종군으로서 호병을 수비했다. 몽고의 침입은 전 세계의 세계사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고려 역시 이점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이후 고려는 긴 대몽투쟁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으며, 삼별초라는 사병조직이 대몽투쟁을 선도해 갔다. 그리고 30년에 걸친 긴 대몽투쟁을 공식적으로 마치는 1259년에 이르기까지 고려는 비상체제를 운영해 갔다. 그 동안 1232년(고려 고종 19년) 보문각학사 지체고의 관직이 복구되었다. 그는 호부상서 판예부사, 수문전대학사 등을 역임하고 70세에 치사하고 유유자적하면서 살다가 74세(1241년: 고려 고종 28년)에 사망하였다.
생애의 대강을 통해 알 수 있겠지만, 그의 생애는 40세 이후 최씨 정권을 만남으로써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 청년기의 세상을 내려다보며 살았으나, 삶은 고단함 바로 그것이었다. 한때 부친을 여읜 정신적인 충격으로 백운이라 자호하면서 유유자적하게 세상을 등지고 사는 듯이 행동하기도 했었으나, 당시 자기의 심정을
이규보는 과거에 급제한 지 10년이 지나 1199년(신종2년)에 최충헌에게 인정을 받아 그나마 비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첫 관직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그 이유는 그가 통판낭장과 충돌하게 되어서 이다. 그는 곧 벼슬을 버리고 개경으로 돌아와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이규보가 최충헌에게 다시 알려지게 된 것은 그의 나이 40이 되던 해였다. 1207년(희종3년) 최충헌은 당대의 문인들을 초청해 時會을 열었다. 그 자리에서 이규보는 모정기를 써 바쳤는데 이것이 최충헌의 눈에 들어 비로소 벼슬에 임명되었고 그 이듬해 더 높은 관직에 임명 되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나서 1213년(강종2년) 12월 최우가 고관들을 부른 자리에 미관으로 참여했다. 이인로가 운을 부르고 40운이 넘는 대작을 즉석에서 이루어내니 최우는 이규보를 다시 최충헌에게 소개했다. 공작을 시제로 삼아 40여 운을 불렀는데 또한 즉석에서 시를 이루어냈다. 이것을 본 최충헌은 눈물까지 흘렀다고 한다. 겸손하게 7품 벼슬에 보임되기를 희망하여 그해 보임되었으나 곧 벼슬이 높아졌다.
52세 때(1219년: 고려 고종 6년) 일시 좌천되어 있었는데 그때 최충헌이 사망하고 최우가 집권했다. 그런데 최우는 최충헌보다 훨씬 더 이규보의 문학적 재능에 감동하고 있던 터라 바로 다시 소환했다. 그래서 후에 이규보는 벼슬이 계속 올랐다. 63세 때(1230년: 고려 고종 17년) 팔관회의 절차가 격식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유배되었다가 그 이듬해 고려 황려로 옮겼다.
1230년은 몽고가 침입해왔다. 그는 이때 백의종군으로서 호병을 수비했다. 몽고의 침입은 전 세계의 세계사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고려 역시 이점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이후 고려는 긴 대몽투쟁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으며, 삼별초라는 사병조직이 대몽투쟁을 선도해 갔다. 그리고 30년에 걸친 긴 대몽투쟁을 공식적으로 마치는 1259년에 이르기까지 고려는 비상체제를 운영해 갔다. 그 동안 1232년(고려 고종 19년) 보문각학사 지체고의 관직이 복구되었다. 그는 호부상서 판예부사, 수문전대학사 등을 역임하고 70세에 치사하고 유유자적하면서 살다가 74세(1241년: 고려 고종 28년)에 사망하였다.
생애의 대강을 통해 알 수 있겠지만, 그의 생애는 40세 이후 최씨 정권을 만남으로써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 청년기의 세상을 내려다보며 살았으나, 삶은 고단함 바로 그것이었다. 한때 부친을 여읜 정신적인 충격으로 백운이라 자호하면서 유유자적하게 세상을 등지고 사는 듯이 행동하기도 했었으나, 당시 자기의 심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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