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인간과 자유
2. 두 가지 자유주의
3. 자유주의란?
4. 자유주의의 철학적 기초
5. 정치적 자유, 경제적 자유, 개인적 자유
6. 자유주의와 한국사회
7.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2. 두 가지 자유주의
3. 자유주의란?
4. 자유주의의 철학적 기초
5. 정치적 자유, 경제적 자유, 개인적 자유
6. 자유주의와 한국사회
7.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본문내용
이념(사상)에 의존한다.” 하이에크의 말이다. 개인이나 사회가 어떤 이념을 신봉하느냐에 따라 좋은 사회, 좋은 법과 제도, 좋은 생활 방식, 좋은 삶에 대한 척도가 달라진다. 뿐만 아니라 역사의 진보와 퇴보에 대한 판단도 달라진다. 세상을 바꾸려면 사상을 먼저 바꾸어야 한다. 모든 혁명은 사상 혁명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올해로 해방 60년을 맞이하였지만 우리가 신봉해야 할 이념에 대해 사회적 합의에 도달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우리 헌법이 명시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이념이라고 믿고 있지만, 그렇게 믿지 않고 있는 세력도 많이 있다. 김대중 정부 이후 대한민국의 이념에 대한 혼란이 시작되어 노무현 정부 들어 한결 심화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도 따지고 보면 그 세력(자유주의자들은 이들을 좌파라 부른다)들이 그동안 끊임없이 사상에 투자한 결과이다. 그들은 상황에 따라 적절한 전략을 구사하면서 가난한 자에 대한 연민과 지원, 가진 자에 대한 적대감, 시장경제와 개방에 대한 적대감, 미국에 대한 적대감, 북한에 대한 온정을 확산시켜왔다. 이들은 민족, 민중, 민주주의, 정의, 평등, 자주, 통일을 앞세우고 사상에 대한 과감한 투자를 감행하여 드디어 그들의 정권의 핵심 세력이 되었다. 그동안 이들은 무한 고통을 감내하면서 사상에 대한 투자를 멈추지 않았다. 때로는 감옥으로, 때로는 노동 현장으로, 때로는 형장에서 이슬로 사라졌다.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사상에 투자한 것이 없다. 모두 생업의 전선에서 자신의 할 일을 열심히 하였다고 하지만, 자신들의 열심이 가져다주는 열매를 지켜주는 이념이나 사상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무지했고 관심도 없었다. 국가가 이런 사람들을 대신해서 이념을 관리해주었지만 이제 그런 국가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국가는 반민주적이고 반인권적인 독재 국가로 낙인찍혔고, 그 국가를 지지한 세력들은 보수반동으로 몰려 역사의 심판대에 올랐다.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9일 과천 중앙공무원 교육원에서 열린, 정부의 신임 사무관 대상 특강에서 “앞으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에 있어서도 소위 온건 노선과 극단 노선 사이의 대결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다.”고 했다. “민주주의는 대화와 타협, 관용이다”라는 점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권력의 정상에 있는 대통령이 대화와 타협, 관용을 주장한다는 것은 참으로 의외이다. 대화와 타협, 관용의 요구는 약자의 몫이고, 그것을 베푸는 것이 강자의 미덕이기 때문이다.
그는 ‘민주주의에 있어서 온건 노선과 극단 노선’이 각각 어떤 정치 세력의 노선을 지칭하는지를 분명히 밝히지는 않았다. 민주주의에는 자유민주주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민민주주의와 민중민주주의도 있다. 몰락한 국가 사회주의도 민주주의를 표방하였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인 북한도 민주주의를 받들고 있다. 민주주의에 있어서 온건 노선이 자유민주주의이고 극단노선이 민중민주주의일 수도 있다. 노 대통령이 마음 속에 두고 있는 ‘온건 노선과 극단 노선’이 무엇인가와 무관하게 역사가 민중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믿는 세력이 우리 사회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어 노대통령은 “한국 정치가 지역 대결 구도에서 진보와 보수의 구도로 가면 1차 진보(한 단계 진전된 것)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그러나 진보와 보수 가운데서도 극단주의가 있다.”고 지적했다. 또 “타협 없이 자신의 주장만을 관철하고 상대방이 무너질 때까지, 전 국민이 나를 지지할 때까지 타협하지 않고 오로지 상대의 문제점만 지적하고 타도를 외치는 정치가 극단주의”라고 지적했다고 한다.
한국 정치가 지역 대결 구도에서 벗어나는 것을 일상적 의미의 진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실제로 우리 정치가 지역 대결에서 진보와 보수의 구도로 이행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정치는 지역 대결에서 이념 대결로 진화해야만 한다. 이 이념의 대결이 진보와 보수가 되어야 하는지, 좌파와 우파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입장이 다를 수 있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우리 정치가 진보와 보수의 구도에 이미 도달했거나 가고 있다고 믿고 있으며, 자신은 진보에 속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동안 보수에 대해 언급한 그의 말에 비추어 보아도 이 판단은 틀린 판단이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그가 말하는 ‘극단주의’는 보수적인 정치 세력을 지칭한다. 그러나 보수 세력만 극단주의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진보를 자처하는 정치 세력들의 극단주의가 우리 정치를 괴롭히는 망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하는 것은 ‘진보’의 정체이다. 진보는 역사철학적인 입장이고, 역사의 진보를 믿는 사람들은 역사의 이념적 완성으로서 역사의 목표를 설정한다. 마르크스의 진보주의 역사철학에서는 사회주의 실현이 역사의 목표이고, 헤겔의 역사철학에서는 자유주의 실현이 역사의 목표였다. 국가 사회주의의 몰락을 계기로 자유주의의 궁극적 승리를 선포한 학자도 있지만, 우리 사회에는 이러한 선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따라서 우리 사회의 진보주의자들 가운데에는 역사의 궁극적 목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이상이 사회주의 실현 또는 주체사상화를 통한 인민민주주의 실현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는 듯하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국가 정체성’의 위기가 심각하게 부각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우리는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 의식에서 행한 “나는 국헌을 준수하고”라는 선서를 믿는다. 그리고 ‘국헌’은 자유민주주의라고 생각하며, 노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를 준수해야 하는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 정체성’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 이유는 현 정부에 관여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라는 증거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자유주의자들도 과거의 좌파처럼 사상에 희생적 투자를 해야 한다. 지식이 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시간이 있는 사람은 시간으로, 돈이 있는 사람은 돈으로 자유주의 이념의 확산에 헌신해야 한다. 하이에크의 말처럼 “모든 자유주의자는 선동가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올해로 해방 60년을 맞이하였지만 우리가 신봉해야 할 이념에 대해 사회적 합의에 도달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우리 헌법이 명시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이념이라고 믿고 있지만, 그렇게 믿지 않고 있는 세력도 많이 있다. 김대중 정부 이후 대한민국의 이념에 대한 혼란이 시작되어 노무현 정부 들어 한결 심화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도 따지고 보면 그 세력(자유주의자들은 이들을 좌파라 부른다)들이 그동안 끊임없이 사상에 투자한 결과이다. 그들은 상황에 따라 적절한 전략을 구사하면서 가난한 자에 대한 연민과 지원, 가진 자에 대한 적대감, 시장경제와 개방에 대한 적대감, 미국에 대한 적대감, 북한에 대한 온정을 확산시켜왔다. 이들은 민족, 민중, 민주주의, 정의, 평등, 자주, 통일을 앞세우고 사상에 대한 과감한 투자를 감행하여 드디어 그들의 정권의 핵심 세력이 되었다. 그동안 이들은 무한 고통을 감내하면서 사상에 대한 투자를 멈추지 않았다. 때로는 감옥으로, 때로는 노동 현장으로, 때로는 형장에서 이슬로 사라졌다.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사상에 투자한 것이 없다. 모두 생업의 전선에서 자신의 할 일을 열심히 하였다고 하지만, 자신들의 열심이 가져다주는 열매를 지켜주는 이념이나 사상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무지했고 관심도 없었다. 국가가 이런 사람들을 대신해서 이념을 관리해주었지만 이제 그런 국가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국가는 반민주적이고 반인권적인 독재 국가로 낙인찍혔고, 그 국가를 지지한 세력들은 보수반동으로 몰려 역사의 심판대에 올랐다.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9일 과천 중앙공무원 교육원에서 열린, 정부의 신임 사무관 대상 특강에서 “앞으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에 있어서도 소위 온건 노선과 극단 노선 사이의 대결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다.”고 했다. “민주주의는 대화와 타협, 관용이다”라는 점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권력의 정상에 있는 대통령이 대화와 타협, 관용을 주장한다는 것은 참으로 의외이다. 대화와 타협, 관용의 요구는 약자의 몫이고, 그것을 베푸는 것이 강자의 미덕이기 때문이다.
그는 ‘민주주의에 있어서 온건 노선과 극단 노선’이 각각 어떤 정치 세력의 노선을 지칭하는지를 분명히 밝히지는 않았다. 민주주의에는 자유민주주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민민주주의와 민중민주주의도 있다. 몰락한 국가 사회주의도 민주주의를 표방하였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인 북한도 민주주의를 받들고 있다. 민주주의에 있어서 온건 노선이 자유민주주의이고 극단노선이 민중민주주의일 수도 있다. 노 대통령이 마음 속에 두고 있는 ‘온건 노선과 극단 노선’이 무엇인가와 무관하게 역사가 민중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믿는 세력이 우리 사회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어 노대통령은 “한국 정치가 지역 대결 구도에서 진보와 보수의 구도로 가면 1차 진보(한 단계 진전된 것)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그러나 진보와 보수 가운데서도 극단주의가 있다.”고 지적했다. 또 “타협 없이 자신의 주장만을 관철하고 상대방이 무너질 때까지, 전 국민이 나를 지지할 때까지 타협하지 않고 오로지 상대의 문제점만 지적하고 타도를 외치는 정치가 극단주의”라고 지적했다고 한다.
한국 정치가 지역 대결 구도에서 벗어나는 것을 일상적 의미의 진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실제로 우리 정치가 지역 대결에서 진보와 보수의 구도로 이행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정치는 지역 대결에서 이념 대결로 진화해야만 한다. 이 이념의 대결이 진보와 보수가 되어야 하는지, 좌파와 우파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입장이 다를 수 있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우리 정치가 진보와 보수의 구도에 이미 도달했거나 가고 있다고 믿고 있으며, 자신은 진보에 속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동안 보수에 대해 언급한 그의 말에 비추어 보아도 이 판단은 틀린 판단이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그가 말하는 ‘극단주의’는 보수적인 정치 세력을 지칭한다. 그러나 보수 세력만 극단주의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진보를 자처하는 정치 세력들의 극단주의가 우리 정치를 괴롭히는 망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하는 것은 ‘진보’의 정체이다. 진보는 역사철학적인 입장이고, 역사의 진보를 믿는 사람들은 역사의 이념적 완성으로서 역사의 목표를 설정한다. 마르크스의 진보주의 역사철학에서는 사회주의 실현이 역사의 목표이고, 헤겔의 역사철학에서는 자유주의 실현이 역사의 목표였다. 국가 사회주의의 몰락을 계기로 자유주의의 궁극적 승리를 선포한 학자도 있지만, 우리 사회에는 이러한 선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따라서 우리 사회의 진보주의자들 가운데에는 역사의 궁극적 목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이상이 사회주의 실현 또는 주체사상화를 통한 인민민주주의 실현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는 듯하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국가 정체성’의 위기가 심각하게 부각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우리는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 의식에서 행한 “나는 국헌을 준수하고”라는 선서를 믿는다. 그리고 ‘국헌’은 자유민주주의라고 생각하며, 노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를 준수해야 하는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 정체성’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 이유는 현 정부에 관여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라는 증거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자유주의자들도 과거의 좌파처럼 사상에 희생적 투자를 해야 한다. 지식이 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시간이 있는 사람은 시간으로, 돈이 있는 사람은 돈으로 자유주의 이념의 확산에 헌신해야 한다. 하이에크의 말처럼 “모든 자유주의자는 선동가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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