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견훤의 후백제 건국
2. 견훤의 전략과 영역의 변천
1) 초창기(892 - 900)
2) 태동기 (900 - 918)
3) 정비기(918 - 925)
4) 시련기(925.10 - 927.8)
5) 전성기(927.9 - 929.11)
6) 쇠퇴기(929.12 - 936.9)
3. 궁예의 후고구려 건국
1) 세력기반 확립기(894.10 - 895.8)
2) 건국기 (895.8 - 901)
Ⅲ. 결론
Ⅱ. 본론
1. 견훤의 후백제 건국
2. 견훤의 전략과 영역의 변천
1) 초창기(892 - 900)
2) 태동기 (900 - 918)
3) 정비기(918 - 925)
4) 시련기(925.10 - 927.8)
5) 전성기(927.9 - 929.11)
6) 쇠퇴기(929.12 - 936.9)
3. 궁예의 후고구려 건국
1) 세력기반 확립기(894.10 - 895.8)
2) 건국기 (895.8 - 901)
Ⅲ. 결론
본문내용
들이 많이 ‘귀부’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중 먼저 꼽아야 할 것은 역시 궁예가 많은 병력을 확보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군대가 강력하였다는 점일 것이다.
궁예가 세력을 모아 건국하기까지의 과정을 두 시기로 나누어 보겠다.
1) 세력기반 확립기(894년 10월 - 895년 8월 경)
궁예는 溟洲의 중소호족 출신으로 ?山門의 승려였던 許越과 ?山門을 이끌던 開淸의 도움을 받아 명주 일대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金周元계 대호족의 협조를 얻어 자립할 수 있었다.
당시 궁예세력의 중심을 이루었던 것은 주로 가난과 과중한 수취로 고통을 받던 불만농민들이었다. 그런데 명주 일대 불만농민들은 眞表의 포교 이래 彌勒佛 하생의 이상세계를 염원하였으며, 궁예는 그것이 곧 도래할 것임을 내세우면서 불만농민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이에 적극 협조하였던 것은 許越과 開淸을 비롯한 ?山門의 승려들이었다.
명주를 떠나 현 중부지방으로 진출한 궁예는 철원과 그 인근 점령지의 불만농민들을 포섭하여 병력을 크게 늘렸다. 궁예가 그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던 것도 역시 彌勒佛이 下生하는 이상세계의 도래를 내세움으로써였다. 이 지역 불만농민들 사이에는 末世의식이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그들은 미륵불이 하생하여 말세에 처한 자신들을 구원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2) 건국기 (895년 8월경 - 901년)
불만농민 세력을 기반으로 궁예는 군사적 성격이 강했던 平州의 대호족 朴遲胤과 그 영향력 하에 있었던 浿西지역의 호족들과 제휴하였다. 이어 해상무역을 통해 상당한 부를 축적하였던 松岳의 王建家와 결합하였다. 궁예는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데에 그들의 군사적, 경제적 기반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반면 그들은 궁예에게 협조함으로써 새로운 국가의 지배세력으로서 자신들의 정치적 지위를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철원에서 송악으로 천도한 이듬해인 899년 궁예는 梁吉의 공격을 분쇄하였고, 900년에는 서해안과 남한강 일대의 요충지를 장악한 후 901년 드디어 후고구려를 세웠다.
궁예가 송악으로 천도한 것은 송악에 근거를 둔 왕건가 및 그에 인접한 평주의 호족들과의 결합을 보다 공고히 하면서 그들의 군사적. 경제적 기반을 적극 이용하기 위함이었다. 그 결과 송악에 천도한지 3년만에 건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 미륵신앙을 내세워 불만농민을 포섭하여 자신의 기반으로 삼았던 궁예였지만, 그러나 호족들과의 제휴를 통해 건국하게 되었다. 미륵불 下生의 이상세계에 대한 종교적인 염원만을 지닌 농민들을 이끌고서 국가를 건설한다든가 혹은 운영한다든가 하는 것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Ⅲ. 결론
지금까지 견훤을 통한 후백제의 건국과 궁예를 중심으로 한 후고구려 건국을 알아보았다. 후삼국시대는 아마도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박진감에 넘쳤고 생기가 가득했던 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견훤과 궁예는 각자의 지역에서 지원세력을 모으고 호족들과 연합함으로 각각 백제와 고구려를 부흥시키고자 하였다. 비록 이들의 노력은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고 끝내 실패로 돌아갔지만 역사상 견훤과 궁예의 부흥운동은 큰 의의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후백제와 후고구려.. 두 나라의 상황에 대해 좀더 알아보는 자세가 필요하겠다.
-------------참고문헌-------------
* '후백제 견훤의 전략과 영역의 변천' <군사> 41호
* '견훤의 후백제 건국과 전남지역 호족세력의 추이' <경주사학> 22편
* '후백제 견훤의 역사계승인식' <사학연구> 58-59호
* '궁예의 세력형성과 건국' <진단학보> 75권
* <궁예, 진훤, 왕건과 열정의 시대> 이도학. 김영사
궁예가 세력을 모아 건국하기까지의 과정을 두 시기로 나누어 보겠다.
1) 세력기반 확립기(894년 10월 - 895년 8월 경)
궁예는 溟洲의 중소호족 출신으로 ?山門의 승려였던 許越과 ?山門을 이끌던 開淸의 도움을 받아 명주 일대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金周元계 대호족의 협조를 얻어 자립할 수 있었다.
당시 궁예세력의 중심을 이루었던 것은 주로 가난과 과중한 수취로 고통을 받던 불만농민들이었다. 그런데 명주 일대 불만농민들은 眞表의 포교 이래 彌勒佛 하생의 이상세계를 염원하였으며, 궁예는 그것이 곧 도래할 것임을 내세우면서 불만농민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이에 적극 협조하였던 것은 許越과 開淸을 비롯한 ?山門의 승려들이었다.
명주를 떠나 현 중부지방으로 진출한 궁예는 철원과 그 인근 점령지의 불만농민들을 포섭하여 병력을 크게 늘렸다. 궁예가 그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던 것도 역시 彌勒佛이 下生하는 이상세계의 도래를 내세움으로써였다. 이 지역 불만농민들 사이에는 末世의식이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그들은 미륵불이 하생하여 말세에 처한 자신들을 구원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2) 건국기 (895년 8월경 - 901년)
불만농민 세력을 기반으로 궁예는 군사적 성격이 강했던 平州의 대호족 朴遲胤과 그 영향력 하에 있었던 浿西지역의 호족들과 제휴하였다. 이어 해상무역을 통해 상당한 부를 축적하였던 松岳의 王建家와 결합하였다. 궁예는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데에 그들의 군사적, 경제적 기반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반면 그들은 궁예에게 협조함으로써 새로운 국가의 지배세력으로서 자신들의 정치적 지위를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철원에서 송악으로 천도한 이듬해인 899년 궁예는 梁吉의 공격을 분쇄하였고, 900년에는 서해안과 남한강 일대의 요충지를 장악한 후 901년 드디어 후고구려를 세웠다.
궁예가 송악으로 천도한 것은 송악에 근거를 둔 왕건가 및 그에 인접한 평주의 호족들과의 결합을 보다 공고히 하면서 그들의 군사적. 경제적 기반을 적극 이용하기 위함이었다. 그 결과 송악에 천도한지 3년만에 건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 미륵신앙을 내세워 불만농민을 포섭하여 자신의 기반으로 삼았던 궁예였지만, 그러나 호족들과의 제휴를 통해 건국하게 되었다. 미륵불 下生의 이상세계에 대한 종교적인 염원만을 지닌 농민들을 이끌고서 국가를 건설한다든가 혹은 운영한다든가 하는 것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Ⅲ. 결론
지금까지 견훤을 통한 후백제의 건국과 궁예를 중심으로 한 후고구려 건국을 알아보았다. 후삼국시대는 아마도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박진감에 넘쳤고 생기가 가득했던 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견훤과 궁예는 각자의 지역에서 지원세력을 모으고 호족들과 연합함으로 각각 백제와 고구려를 부흥시키고자 하였다. 비록 이들의 노력은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고 끝내 실패로 돌아갔지만 역사상 견훤과 궁예의 부흥운동은 큰 의의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후백제와 후고구려.. 두 나라의 상황에 대해 좀더 알아보는 자세가 필요하겠다.
-------------참고문헌-------------
* '후백제 견훤의 전략과 영역의 변천' <군사> 41호
* '견훤의 후백제 건국과 전남지역 호족세력의 추이' <경주사학> 22편
* '후백제 견훤의 역사계승인식' <사학연구> 58-59호
* '궁예의 세력형성과 건국' <진단학보> 75권
* <궁예, 진훤, 왕건과 열정의 시대> 이도학.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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