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뀨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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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뀨선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들어가면서

2. 시대적 배경

3. 잇뀨우의 생애

4. 잇뀨우의 행적을 따라서

5. 잇뀨우의 사상 -「반골정신과 무애행」-

6. 나오면서

본문내용

오조법연의 제자이며 대혜종고의 스승
의 墨跡을 주었다. 쥬꼬오는 이를 표구하여 자기가 기거하던 암자에 걸고 일념으로 차를 즐겨 마침내 "불법이 茶道가운데 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또 한번은 잇뀨우가 렌뇨(蓮如)를 찾아 本願寺로 갔는데 마침 렌뇨가 부재중이었다. 렌뇨의 방에 들어가 기다리고 있던 잇뀨우는 좀처럼 그가 돌아오지 앉자 불단에 모셔 놓은 아미타불상을 불단에서 끌어내려 베개로 삼고 누워 잠이 들어 버렸다. 이윽고 렌뇨가 돌아와 이 모습을 보더니 빙긋이 웃으며 잇뀨우를 흔들어 깨웠다.
「스님, 스님, 제 쌀통을 뒤집어 엎어서야 곤란하지 않습니까?」
「어어, 참 그렇군.」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껄걸 웃었다.
잇뀨우라면 빼 놓을 수 없는 일화는 눈먼 미녀 신(森)과의 만남과 사랑이다.
1467년 잇뀨우가 74세 때 무로마찌막부 멸망의 원인이 되는 〈오오닌(應仁)의 亂〉이 일어나 그 후 11년 동안 戰火가 끊이지 않았다. 잇뀨우는 주로 薪村의 酬恩庵에 머무르면서, 난을 피하여 여러 곳을 옮겨 다녔다. 바로 그러한 시기에 신(森)과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잇뀨는 신과의 만남에서 자신이 77세라는 고령을 잊고 마치 젊은 사람처럼 그녀와의 사랑에 빠진다. 그래서 이 때 신을 찬미한 詩도 탄생하게 된다.
잇뀨는 신과의 만남을 통해서 모든 형식과 위선, 그리고 계율마저 넘어선 자신의 내면의 경지를 그대로 표출하고 있다. 이미 그에게는 파계도 없으며, 생사도 없고, 禪境도 悟境도 없었다. 구속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곳에 오직 그의 투명한 의식만이 남아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계율이란 인간의 본질(깨달음)에 이를 수 있게 하는 뗏목과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이미 강을 건너 온 사람에게는 뗏목은 필요 없으며 오히려 짐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미 인간의 본질을 알고 그것과 하나가 되어 버린 사람에게 있어 계율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그로서는 다만 자신의 본질이 본질 그대로 드러나게 하고 거기에 아무런 가식이나 위선을 부여하지 않는 것만이 최선이었던 것 같다.
신과의 관계가 계속되고 있던 81세 때 칙명에 의해 大德寺 주지(48代)로 임명되었다. 이전 같았으면 사양하면서 받지 않았겠지만 이제는 그러한 분별마저 사라졌음인지 그 칙명을 받아들였다.
조정에서 그를 大德寺 주지로 임명한 데에는 당시 일본 천하에 이름 높던 그를 주지로 맞아들여 전란으로 손상된 大德寺를 재건해 보려는 뜻이 있었다. 잇꾸우는 조정의 뜻에 따라서 대덕사 재건에 힘쓰는 한편 禪風의 쇄신에도 노력하였다. 그 때 각지에서 그의 문하에 모인 수행승들이 금새 100명을 넘었으며, 당시 그를 따르던 지식층도 많았다고 한다.
6. 나오면서
《人間 一休》라는 책의 저자인 무라따 다헤이(村田太平)씨는 잇뀨우가 깨달은 뒤에 더욱 자신의 삶의 폭을 넓혀 갈 수 있었던 이유로서 다음의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 그는 깨달음에 만족하여 머물지 않고 깨달은 뒤의 수행에 더욱 매진하였다. 그의 전반생의 스승은 겐오오(謙翁), 가소오(華 ) 등 그가 직접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지만 후반생의 스승은 선종의 역사를 통해 누적되어 온 역대 조사들의 행적과 어록이었으며 특히 중국의 허당(虛堂智愚, 1185∼1629)과 일본의 대응(大浦紹明), 대등(宗峯妙超)의 세 사람으로부터 깊은 감화와 영향을 받았다.
그 다음으로, 그는 당시의 타락해 있던 선승들의 무리에 끼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반대로 깊은 곳에 들어가 염세적인 생활을 하지도 않으면서 소위 一所不住의 생활을 통해 여러 계층의 다양한 사람들과 접합으로써 현저하게 자신의 폭을 넓혀 갔다. 그의 주변에는 황족, 무사, 상인, 농민 등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다 있었으며, 그는 평화와 전란과 곤궁, 암흑과 광명이 얽히고 설켜 있는 세상 속에서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방식을 살아 나갔다.
세 번째로, 그는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사람을 제자 또는 친구로 삼음으로써 문화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함과 동시에 그 자신도 그들에 의해 적지 않은 신선한 자극과 암시를 받았다. 이러한 점들이 작용해서 그의 후반생은 해가 거듭됨에 따라 더욱 그 광채를 더했던 것이다.
일휴소준을 만나고 있으면, 흡사 원효의 삶과도 아니면, 경허의 삶과도 흡사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는 너무도 인간적이며, 지극히 서민적이고 민중적인 선으로 선을 민중들 속에서 대중화, 문예화 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귀족적이고 형식적이며, 관료적인 불교를 비판하고 자비심이 많은 인간적인 선풍을 선양한 것이다.
또 한편 계율의 권위에서도 벗어나려고 노력했으며, 항상 詩僧으로서, 일생을 누더기로서 살다가 훨훨 자유로운 바람처럼 간 것이다.
중국 後秦때의 대역경가인 구마라즙도 파계 후 그의 제자들에게 "연꽃이 진흙속에세 피지만 너희들은 연꽃만 취할 뿐이지 진흙은 취하지 말라." 고 하신 것처럼, 그가 파계했다고 해서 그 파계 하나만으로 감히 누가 그에게 손가락질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과거의 많은 역대조사들이 생사속에세 생사 없는 이치를 자유자재로 써서 일체중생을 제도할 때, 중생의 근기와 병에 따라 법을 설하며 순행과 역행을 종횡무진으로 하며 동사섭을 행하여 깨침의 세계를 열었듯이, 세간에서 출세간으로 출세간에서 세간으로 펼쳐지는 잇뀨우의 삶은 오늘날 우리에게 또 다른 면을 시사하고 있음에 분명하다.
【참고자료】
한 보광 著 ,『일본선의 역사』, 동국대학교 선학과 교재.
이 호준 著 ,『일본의 십대선사』, 서울, 청아출판사, 1999.
야나기다 세이쟌 著, 한보광 譯 ,『선과 일본문화』, 서울, 불광출판사, 1995.
이시다 미즈마로 著, 이영자 譯, 『일본 불교사』, 서울, 민족사, 1995
渡邊照宏 著, 이영자 譯 『일본의 불교』, 서울, 경서원, 1987.
김 희영 著, 『이야기 일본사』, 서울, 청아출판사, 1999.
박 경희 著, 『연표와 사진으로 보는 일본사』, 서울, 일빛, 1998.
죤 W. 홀 著, 박 영재 譯, 『일본사』, 서울, 역민사, 1991.
眞下五一, 『一休』, 東京, 國書刊行會, 1950.
平野宗淨 著, 『一休と禪』, 東京, 春秋社, 1998.
栢原祐泉 著, 『日本名僧列傳』, 東京, 社會思想社,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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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6.22
  • 저작시기2003.5
  • 파일형식한글(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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