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공정과 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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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동북공정과 간도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동북공정
1. 거대한 프로젝트
2. 동북공정의 핵심은 간도

Ⅱ. 한, 중 국경의 쟁점. 간도
1. 과거의 국경선
2. 간도협약
3. 조, 중 변계조약
4. 잃어버린 땅, 간도

본문내용

만 실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어간다는 의미였다. 19세기 이후에는 많은 사람들이 두만강을 넘어가 동간도에서 서간도, 북간도로 널리 퍼져나갔다.
중국에서 간도란 말은 거의 쓰지 않는다. ‘동북’이란 명칭을 쓴다. 길림성, 요녕성, 흑룡강성,이 동북3성이다. 이 지역은 일제시대에는 만주라고 불렸다. 1931년 일본에 의해 세워진 만주국은 만주의 범위를 잘 나타내고 있다. 이 지역은 지금의 동북 3성을 모두 아우르고 있다.
‘간도는 우리땅’이라는 얘기가 국수적인 견해로 비쳐지는 것은 명칭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간도는 우리땅’이라는 뜻이 ‘만주는 우리땅’이라는 의미로 사실상 받아들여지는 것에 대한 오해이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옛날 고구려 땅을 회복하자는 이야기이냐” 라는 비판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간도’가 갖는 특수한 의미는 옛 고구려 땅 만큼의 웅대하고 넓지는 않다. 대략 동간도 지역으로 연길, 용정, 화룡, 도문 등 지금의 연변조선족 자치주를 말한다.
역사적으로도 8세기의 고구려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16~17세기의 조선 중기이다. 조선도, 청나라도 자신의 땅으로 인정하지 않은 ‘제3의 땅’에 우리 조상들이 황무지를 개간했다.
간도는 땅만 우리 땅이 아니다.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조선족이다. 이곳은 일제강점기에는 청산리 대첩과 봉오동 전투 등 항일무장투쟁의 근거지로 민족정신을 일깨운 현장이었고 우리 동포들은 독립운동의 지원세력이 됐다. 대한제국의 백성이던 이들은 일본과 중국, 그 이후 공산당과 국민당의 틈바구니에서 자생적으로 살아남아야 했다.
1945년 해방이후에는 남한과 북한으로부터 사실상 버림을 받았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면서 억지로 중화인민공화국의 ‘인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1970년대 문화대혁명 당시에는 ‘민족주의 타파’라는 이름아래 또 한번의 고난을 당해야 했다. 그러나 한국의 언어와 문화를 고집스럽게 지켜왔다.
1992년 한, 중 수교 이후 조선족은 위기를 겪고 있다. 수 만명의 조선족이 한국으로 왔다. 불법 체류, 취업 사기, 처녀들의 결혼 이민 등으로 혼란을 겪었다. 조선족 자치주 안에서 과반수였던 조선족도 40%에 미치지 못할 정도로 줄어들었다.
최근 조선족은 또 다른 위기를 겪고 있다. 중국 정부는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동북공정에 조선족 학자들을 동원하고자 하고 있다. 한국에서 조선족 동포에게 한국 국적을 부여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중국정부는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이들은 민족과 국가라는 두 가지 상충된 갈림길에서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열강에 휩쓸려 주권을 잃어버린 고통이 고스란히 이들 조선족에게 전가된 셈이다.
이런 점에서 1909년 간도협약과 1962년 조, 중 변제조약은 간도 땅 뿐만 아니라 조선족 동포를 한꺼번에 중국에 넘겨버리는 결과를 낳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곳은 여전히 분쟁의 불씨가 남아있는 ‘불완전 국경선’이다. 그래서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이 곳의 영토 확보에 대한 역사적 근거를 마련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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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7.18
  • 저작시기2006.7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59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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