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소개의 글
- 장찌민와 후진타오
- 후진타오의 평판 및 세평
- 전문정치세력의 등장
- 좌파,우파와의 갈등
- 후진타오의 미래
- 후진타오의 가치관
- 후진타오의 개성
- 중국의 미래 정치
- 장찌민와 후진타오
- 후진타오의 평판 및 세평
- 전문정치세력의 등장
- 좌파,우파와의 갈등
- 후진타오의 미래
- 후진타오의 가치관
- 후진타오의 개성
- 중국의 미래 정치
본문내용
중국인들이 원하는 개혁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적극적 ,긍정적인 새로운 젊은 인물이 국가주석으로 등극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후진타오가 권력을 이양 받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바로 덩샤오핑이 지목한 후계자라는데 있다. 그리고 바로 덩샤오핑 이 그를 지목하게 된 이유가 위기를 맞고 있는 현 체제를 후진타오라면 화해의 시대로 안정적으로 이끌고 나갈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아이러니에 있다. 즉 대중적 이미지는 최대한 개방적이고, 신선한 변혁의 이미지 이지만, 정작 그의 정치보고, 강연, 담화, 문장 등에는 대담하고 혁신적인 면이 거의 없다. 소극적, 긍정적인 그의 성격유형이 전임 지도자들이 원하는 화해의 시대에 필요한 인물로 그를 등극시킨 것이다. 결국 대중과 지도자가 모두 원하는 분위기에 맞는 성격의 후진타오 가 국가주석으로 등극하게 된 것이다.
넷째, 후진타오는 여태까지의 그가 행한 활동들로 보아 여우의 지모가 있으나 사자의 결단력과 카리스마가 부족한 것으로 보이고 있다. 후진타오는 제4세대 지도자로서 후계자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당 제2세대 원로의 감독과 보호, 제3세대 집권층의 엄격한 관찰 아래 10년 동안 살얼음판을 걸어왔다. 이것만으로도 그를 천시를 아는 지략가로 평가하는 이도 있다. 과거의 일을 돌이켜보아 마오쩌둥 시대의 류사오치, 린바이와 덩샤오핑 시대의 후야오방과 자오쯔양 처럼 불안한 황태자의 자리에서 낙마하지 않기 위해서 그는 최대한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신중했고, 대내적 대외적으로도 앞에 나서는 법이 없었다. 그는 구이 저우성 당서기에 재직할 당시 기자와 만나 “여러분들이 나를 선전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것은 적당치 않은 보도다. 여러분이 나를 선전한다면 이는 곧 나의 정치적 생명을 단축시킬 뿐이다. 내가 아직 젊다는 것을 이해해 달라.”고 했다고 한다. 이미 언론의 중요성을 인식했다고 볼 수 있다. 후진타오는 또한 공산당의 횡령과 부패가 만연한 오늘날까지도 전혀 스캔들이 없다. 권좌에 등극하기 전까지 신중하게 행동하려는 그의 신중함과 치밀함이 드러난다. 그는 또한 정보에 빠르고 민감하게 반응하고, 정치적 풍운과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의 정치적 신경은 언제나 민감하게 반응했다. 중국 공산당 정치지도자들은 변증법과 양분법에 정통해야 살아남는다. 후진타오는 이러한 변증법과 양분법의 학습과 운용에 대해서 정통 교육을 통해 익숙해져있을 뿐 아니라 자기만의 특색도 가지고 있었다. 1989년 12월 18일 <티베트의 현 국면과 이에 당면한 우리의 문제>라는 보고서에서 그는 티베트 통치 요강을 한 손에는 반분열 투쟁을 잡고, 한 손에는 경제 건설을 잡는다. 라는 말로 총괄하여 정치와 혁명을 우선시하였다. 경제건설 우위의 덩샤오핑 노선과는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당시는 천안문 사태 이후 공산당 지도부 내부에 정치사상을 강조하는 기류가 흐르던 때로서, 후진타오는 이를 알고 선수를 친 것이다. 이처럼 후진타오는 혁명적인 면과 기술적인 면을 함께 강조하는 <양수경 정책>을 시기 적절히 혁명이 강조되는 시기와 기술발전이 강조되는 시기에 따라 강약을 주는 반응을 달리하여 중앙 정치체제의 뜻에 부합되는 노선을 잘 그려나갔다. 또한 , 티베트 부임시절 후진타오는 판첸 라마의 숨겨진 독립의 의미를 간파하고 중앙 티베트 회의에서 판첸 라마의 활동을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티베트 부임하여 판첸 라마의 죽음 뒤 긴장의 2개월이 지난 1989년 3월 7일, 유화책이 아닌 무력을 사용하여 그가 직접 철모를 쓰고 적극적으로 사태를 진압시키는 단호한 인상을 남기기도 했으나, 대체로 그의 성향은 여우 형으로 판단되어 진다.
중국의 미래 정치
첫째, 문화대혁명이 4인방 시대였다면 정쩌민 체제의 중국은 상하이방시대였고, 후진타오의 제4세대 지도자들이 이끌어 가는 새 시대의 핵심은 공청방과 칭화방이 될 것이다. 공청방은 공산주의 청년단 출신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써 후진타오 체제의 친위세력으로 성장할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과학기술 발전의 견인차인 칭화대 출신의 테크노트라트 4세대 지도자들은 각 분야에 걸쳐 광범위한 인맥을 형성하고 선명한 개혁성향으로 중국의 미래를 이끌어나갈 대학생들과의 유대를 강화 시켜나갈 것으로 보인다.
둘째, 그의 신중함은 그에게 약점으로도 작용할 수도 있다. 후진타오의 지금까지의 정치성향으로 보아 그는 카리스마적 승부사 기질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들어오고 있다. 융합 적이고 친화력 있는 모습으로 상급자를 헌신적으로 보필하는 자세는 후계자로서는 강점으로 판단되나, 국가 주석으로서는 약점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이와는 다른 의견을 가진 관측통은 실제는 티베트에서 유혈진압이나 나토 미군기 폭격 사건 당시 강경한 대미 성명 발표, 단칼로 잘라버린 천시통의 부패사건을 처리한 결단력 있는 모습처럼 실제 후진타오는 이제까지 보여준 선이 약한 모습이 아닌 사실 강경파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그는 강경파라기 보다는 장미의 가시처럼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가진 사람으로 예측하는 편이 더 맞을 것 같다. 그가 보여준 약간의 과단성 있는 모습들이 실제적으로는 권력을 잡기 위한 지도부의 결정에 대한 충실 이행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드러운 미소 속에 강철 이빨 을 가지고 있다는 평을 들었던 고르바초프처럼 후진타오에게서도 과감한 결단성의 한계가 관측되어질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후진타오 - 대륙을 질주하는 검은 말 - 들녘
후진타오 - New China Leader - 한경비피
장쩌민 - 중국을 변화시킨 거인 - 랜덤하우스 중앙
장쩌민 - 한경비피
대륙의 지도자 등소평 - 북스토리
불멸의 지도자 등소평 - 김영사
『중국의 몰락 ( The coming collapse of China) 』- 고든G.창 저
『현대 중국』- 한.중 사회과학연구회 엮음
『중국권력 대해부』- 윤택노 저. (매일경제신문사)
논문 - ‘ 중국의 “제 4세대 지도부” ’ 김재철
서진영 鄧小平死後 中國政治體制와 權力構造의 變動展望. 고려대학교
서진영 후진타오 체제의 중국과 북한 핵 문제 -중국의 대한반도 정책은 변하고 있는가-
넷째, 후진타오는 여태까지의 그가 행한 활동들로 보아 여우의 지모가 있으나 사자의 결단력과 카리스마가 부족한 것으로 보이고 있다. 후진타오는 제4세대 지도자로서 후계자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당 제2세대 원로의 감독과 보호, 제3세대 집권층의 엄격한 관찰 아래 10년 동안 살얼음판을 걸어왔다. 이것만으로도 그를 천시를 아는 지략가로 평가하는 이도 있다. 과거의 일을 돌이켜보아 마오쩌둥 시대의 류사오치, 린바이와 덩샤오핑 시대의 후야오방과 자오쯔양 처럼 불안한 황태자의 자리에서 낙마하지 않기 위해서 그는 최대한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신중했고, 대내적 대외적으로도 앞에 나서는 법이 없었다. 그는 구이 저우성 당서기에 재직할 당시 기자와 만나 “여러분들이 나를 선전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것은 적당치 않은 보도다. 여러분이 나를 선전한다면 이는 곧 나의 정치적 생명을 단축시킬 뿐이다. 내가 아직 젊다는 것을 이해해 달라.”고 했다고 한다. 이미 언론의 중요성을 인식했다고 볼 수 있다. 후진타오는 또한 공산당의 횡령과 부패가 만연한 오늘날까지도 전혀 스캔들이 없다. 권좌에 등극하기 전까지 신중하게 행동하려는 그의 신중함과 치밀함이 드러난다. 그는 또한 정보에 빠르고 민감하게 반응하고, 정치적 풍운과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의 정치적 신경은 언제나 민감하게 반응했다. 중국 공산당 정치지도자들은 변증법과 양분법에 정통해야 살아남는다. 후진타오는 이러한 변증법과 양분법의 학습과 운용에 대해서 정통 교육을 통해 익숙해져있을 뿐 아니라 자기만의 특색도 가지고 있었다. 1989년 12월 18일 <티베트의 현 국면과 이에 당면한 우리의 문제>라는 보고서에서 그는 티베트 통치 요강을 한 손에는 반분열 투쟁을 잡고, 한 손에는 경제 건설을 잡는다. 라는 말로 총괄하여 정치와 혁명을 우선시하였다. 경제건설 우위의 덩샤오핑 노선과는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당시는 천안문 사태 이후 공산당 지도부 내부에 정치사상을 강조하는 기류가 흐르던 때로서, 후진타오는 이를 알고 선수를 친 것이다. 이처럼 후진타오는 혁명적인 면과 기술적인 면을 함께 강조하는 <양수경 정책>을 시기 적절히 혁명이 강조되는 시기와 기술발전이 강조되는 시기에 따라 강약을 주는 반응을 달리하여 중앙 정치체제의 뜻에 부합되는 노선을 잘 그려나갔다. 또한 , 티베트 부임시절 후진타오는 판첸 라마의 숨겨진 독립의 의미를 간파하고 중앙 티베트 회의에서 판첸 라마의 활동을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티베트 부임하여 판첸 라마의 죽음 뒤 긴장의 2개월이 지난 1989년 3월 7일, 유화책이 아닌 무력을 사용하여 그가 직접 철모를 쓰고 적극적으로 사태를 진압시키는 단호한 인상을 남기기도 했으나, 대체로 그의 성향은 여우 형으로 판단되어 진다.
중국의 미래 정치
첫째, 문화대혁명이 4인방 시대였다면 정쩌민 체제의 중국은 상하이방시대였고, 후진타오의 제4세대 지도자들이 이끌어 가는 새 시대의 핵심은 공청방과 칭화방이 될 것이다. 공청방은 공산주의 청년단 출신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써 후진타오 체제의 친위세력으로 성장할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과학기술 발전의 견인차인 칭화대 출신의 테크노트라트 4세대 지도자들은 각 분야에 걸쳐 광범위한 인맥을 형성하고 선명한 개혁성향으로 중국의 미래를 이끌어나갈 대학생들과의 유대를 강화 시켜나갈 것으로 보인다.
둘째, 그의 신중함은 그에게 약점으로도 작용할 수도 있다. 후진타오의 지금까지의 정치성향으로 보아 그는 카리스마적 승부사 기질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들어오고 있다. 융합 적이고 친화력 있는 모습으로 상급자를 헌신적으로 보필하는 자세는 후계자로서는 강점으로 판단되나, 국가 주석으로서는 약점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이와는 다른 의견을 가진 관측통은 실제는 티베트에서 유혈진압이나 나토 미군기 폭격 사건 당시 강경한 대미 성명 발표, 단칼로 잘라버린 천시통의 부패사건을 처리한 결단력 있는 모습처럼 실제 후진타오는 이제까지 보여준 선이 약한 모습이 아닌 사실 강경파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그는 강경파라기 보다는 장미의 가시처럼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가진 사람으로 예측하는 편이 더 맞을 것 같다. 그가 보여준 약간의 과단성 있는 모습들이 실제적으로는 권력을 잡기 위한 지도부의 결정에 대한 충실 이행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드러운 미소 속에 강철 이빨 을 가지고 있다는 평을 들었던 고르바초프처럼 후진타오에게서도 과감한 결단성의 한계가 관측되어질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후진타오 - 대륙을 질주하는 검은 말 - 들녘
후진타오 - New China Leader - 한경비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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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지도자 등소평 -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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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중국』- 한.중 사회과학연구회 엮음
『중국권력 대해부』- 윤택노 저. (매일경제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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