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관촉사 (灌燭寺)
2.쌍계사[論山 雙溪寺]
3.개태사 [開泰寺]
4. 견훤왕릉
5. 계백장군묘
2.쌍계사[論山 雙溪寺]
3.개태사 [開泰寺]
4. 견훤왕릉
5. 계백장군묘
본문내용
보이는 논산에 묻혔다.
지난 81년 충남도 기념물 제26호로 지정된 왕릉은 봉분직경 9m, 높이 4.5m로 다소 초라하다.
그러나 삼한 통일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바람처럼 사라진 옛 영웅을 드라마 속 모습과 함께 떠올려보면 감회가 새롭다.
왕릉 주변에는 왕건과 관련된 사찰인 개태사가 있다. 왕건이 신검을 무찔러 후백제를 멸망시킨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사찰이다. 국립 사찰로 당시 규모가 방대했으나 지금은 석불입상(보물 제 219호),지름 3m의 가마솥 등 몇몇 문화재에서 옛 영화의 흔적을 느낄수있다.
5. 계백장군묘
소재지 충청남도 논산군 부적면 신풍리 수락산
지정명 충청남도 기념물 제47호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 수락산의 나지막한 언덕에는 계백장군의 묘로 전하는 유구가 안온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 고분은 성곽이 노출된 채 방치되어 있었는데, 1970년대 후반에 지금과 같이 봉분을 쌓았다. 이 무덤을 계백 장군의 묘로 간주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즉 무덤이 목이 잘렸다는 수락산, 가매장했다는 가장곡에 있고, 계백장군의 위패를 모신 충곡서원 바로 뒤편에 소재하였고, 묘향이 정남향인 점, 곽을 만든 후 안치한 것이 아니라 관 주위에 화강석을 혼합한 백회를 바른점, 계백묘로 구전되고 있다는 점이다.
계백장군 묘의 동남편이 백제와 신라의 격전장인 황산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고분을 계백장군 묘로 간주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다음과 같은 기록을 유의해야 되기 때문이다. "전대의 충신으로 신라의 김유신, 김양과 백제의 성충, 계백 및 고려의 강한찬, 정몽주 같은 이의 묘소도 봉식하고 초목을 금해야 할 듯하다. 예조가 또 아뢰기를 '비망기에 언급된 성충 계백 강한찬 같은 이를 각 도에서 적어 올리지 않았습니다. 이는 연대가 오래되어 알 수 없어서 그런 것이니....' (<선로실록> 36년 9월 병오일)"
어쨌든 계백은 충절의 표상으로 기려졌는데, 1688년 (숙종 14)에 지금 논산시 부적면에 충곡서원이 창건되었다. 계백 장군의 위패를 중심으로 하여 박팽년 성산문 등 17현의 그것이 좌우에 배양되어 있다.
황산벌 黃山
천호리(天護里) 연산리 표정리(表井里) 관동리(官洞里) 송정리(松亭里) 등을 포함한다. 백제 말기에 계백(階伯) 장군이 김유신(金庾信)의 신라군(軍)을 맞아 싸운 격전지로 알려져 있으며, 후백제의 신검(神劍)도 이 벌판에서 고려의 왕건(王建)에게 항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81년 충남도 기념물 제26호로 지정된 왕릉은 봉분직경 9m, 높이 4.5m로 다소 초라하다.
그러나 삼한 통일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바람처럼 사라진 옛 영웅을 드라마 속 모습과 함께 떠올려보면 감회가 새롭다.
왕릉 주변에는 왕건과 관련된 사찰인 개태사가 있다. 왕건이 신검을 무찔러 후백제를 멸망시킨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사찰이다. 국립 사찰로 당시 규모가 방대했으나 지금은 석불입상(보물 제 219호),지름 3m의 가마솥 등 몇몇 문화재에서 옛 영화의 흔적을 느낄수있다.
5. 계백장군묘
소재지 충청남도 논산군 부적면 신풍리 수락산
지정명 충청남도 기념물 제47호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 수락산의 나지막한 언덕에는 계백장군의 묘로 전하는 유구가 안온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 고분은 성곽이 노출된 채 방치되어 있었는데, 1970년대 후반에 지금과 같이 봉분을 쌓았다. 이 무덤을 계백 장군의 묘로 간주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즉 무덤이 목이 잘렸다는 수락산, 가매장했다는 가장곡에 있고, 계백장군의 위패를 모신 충곡서원 바로 뒤편에 소재하였고, 묘향이 정남향인 점, 곽을 만든 후 안치한 것이 아니라 관 주위에 화강석을 혼합한 백회를 바른점, 계백묘로 구전되고 있다는 점이다.
계백장군 묘의 동남편이 백제와 신라의 격전장인 황산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고분을 계백장군 묘로 간주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다음과 같은 기록을 유의해야 되기 때문이다. "전대의 충신으로 신라의 김유신, 김양과 백제의 성충, 계백 및 고려의 강한찬, 정몽주 같은 이의 묘소도 봉식하고 초목을 금해야 할 듯하다. 예조가 또 아뢰기를 '비망기에 언급된 성충 계백 강한찬 같은 이를 각 도에서 적어 올리지 않았습니다. 이는 연대가 오래되어 알 수 없어서 그런 것이니....' (<선로실록> 36년 9월 병오일)"
어쨌든 계백은 충절의 표상으로 기려졌는데, 1688년 (숙종 14)에 지금 논산시 부적면에 충곡서원이 창건되었다. 계백 장군의 위패를 중심으로 하여 박팽년 성산문 등 17현의 그것이 좌우에 배양되어 있다.
황산벌 黃山
천호리(天護里) 연산리 표정리(表井里) 관동리(官洞里) 송정리(松亭里) 등을 포함한다. 백제 말기에 계백(階伯) 장군이 김유신(金庾信)의 신라군(軍)을 맞아 싸운 격전지로 알려져 있으며, 후백제의 신검(神劍)도 이 벌판에서 고려의 왕건(王建)에게 항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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