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멕시코 이민사의 개요
Ⅱ. 멕시코 한인 이민의 역사적 개요
1. 대농장 제도
2. 포르휘리오 디아스 정부의 이민
Ⅲ. 멕시코의 한인 이민
1. 한인 이민의 출발과 도착
2. 전통과 문화의 단절
3. 한국이민의 정착과 현황
Ⅳ. 결 론
Ⅱ. 멕시코 한인 이민의 역사적 개요
1. 대농장 제도
2. 포르휘리오 디아스 정부의 이민
Ⅲ. 멕시코의 한인 이민
1. 한인 이민의 출발과 도착
2. 전통과 문화의 단절
3. 한국이민의 정착과 현황
Ⅳ. 결 론
본문내용
안 멕시코에서 노예와 마찬가지의 생활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일부의 한인들이 멕시코를 탈출하여 쿠바로 밀입국하여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당시 쿠바로 간 한인은 모두 288ad이고 이들은 멕시코에서와 마찬가지로 사탕수수 농장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한편, 멕시코에 남아있던 한인들은 1909년 4년간의 계약 기간이 끝나고 재기의 희망을 안고 각 지방으로 헤어졌다. 이주자들의 일부는 성공적으로 정착하였지만 대다수들이 다시 메리다 지역으로 돌아오기도 하였다. 한인들은 이민 생활이 안정되자 한인 단체 조직을 위한 활발한 활동을 개시하였다. 또, 이들은 한인 후세들을 위한 한글 교육에도 힘을 기울였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서의 해외 이주가 인구 정책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은 남미로의 농업 이민 장려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1962년 해외이주법의 제정과 더불어 그해 12월 브라질로 농업이민 92명이 제 1진으로 출국하면서 해외이주가 정책적 차원에서 개시되었으나, 한국인의 멕시코 이민은 멕시코 정부의 이민 제한 정책으로 그리 활성화되지 못했다. 현재 멕시코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 교민은 1905년 이민의 후손인 약 2만 여명이 대부분이다. 멕시코 정부는 2차대전이후 인종,인구,식량등의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정책적으로 해외 이민을 억제하였기 때문에 한국 이민은 거의 없었다. 한국 이민은 1970,80년대에 있었기는 하였으나, 이들 대부분은 제 3국을 경유하거나 여행이나 사업상의 목적으로 일시적으로 입국하여 멕시코 s에서 영주권을 획득한 사람들이다.1905년 이민 후손중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교포 1세는 대부분 사망하였고 23세 들은 한국어를 모르며 3세 이하는 혼혈로 민족의식이 희미해져 있는 실정이다.12세들의 대부분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였고,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한인 후손들은 중저소득층에 속해있다.
Ⅳ.결론멕시코의 이민 』
멕시코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후 복잡한 정황이 계속되다가 ,1877년부터 1910년까지 계속 집권한 포르휘리오 디아스에 의해 근대화가 이뤄지기 시작했다.이때에 멕시코에는 전기가 들어가고, 철로가 놓여지고, 이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명분이 이민이었지, 노예제도 폐지로 텅 비계 된 농장에서 거의 반노예적인 대우를 받는 처지였다. 그런 가운데 견디다 못한 한인이 민자들은 멕시코를 탈출하여 밤중에 배를 타고 카리브 해역을 벗어나 쿠바에 도착하기도 하였다. 미국 정보 기관이 파악하고 있는 자료에 의하면 현재 쿠바에는 한국계 23세들이 약 1천여명 정도 살고 있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한편 한인들은 이민 생활이 안정되나 한인 단체 조직을 위한 활발한 활동을 개시하였다. 이들은 교민회를 조직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독립자금을 보냈고, 문화의 전통의 계승을 위해 한글 교육도 실시하였다.
현재 멕시코에는 1905년 초기 이민자들의 후예가 1만 여명이 전역에 퍼져있다. 거주하고 있는 한국 교민들은 대부분의 이민 1세대들이 사망하여 한국어를 구사할 줄 모르고, 혼혈로 민족의식도 희미해져 있는 실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현상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더욱 가속화되리라 생각된다. 더 늦기 전에 잊어져 사라져 버릴 기로에 있는 한인 이민사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이민 후손들에 대한 민족 의식 회복을 위한 국가적 차원의 후원과 관심이 요구된다.
Ⅴ 참고문헌
김원호 「북미의 작은 거인 멕시코가 기지개를 켠다」 서울:민음사, 1994.
라틴 아메리카 학회「라틴 아메리카 연구」 서울:집문당, 1996
송기도, 강준만 「콜럼버스에서 후지모리까지」 서울:개마고원, 1996
민만식, 강석영, 최영수 「중남미사」서울:민음사, 1993
우리 나라에서의 해외 이주가 인구 정책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은 남미로의 농업 이민 장려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1962년 해외이주법의 제정과 더불어 그해 12월 브라질로 농업이민 92명이 제 1진으로 출국하면서 해외이주가 정책적 차원에서 개시되었으나, 한국인의 멕시코 이민은 멕시코 정부의 이민 제한 정책으로 그리 활성화되지 못했다. 현재 멕시코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 교민은 1905년 이민의 후손인 약 2만 여명이 대부분이다. 멕시코 정부는 2차대전이후 인종,인구,식량등의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정책적으로 해외 이민을 억제하였기 때문에 한국 이민은 거의 없었다. 한국 이민은 1970,80년대에 있었기는 하였으나, 이들 대부분은 제 3국을 경유하거나 여행이나 사업상의 목적으로 일시적으로 입국하여 멕시코 s에서 영주권을 획득한 사람들이다.1905년 이민 후손중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교포 1세는 대부분 사망하였고 23세 들은 한국어를 모르며 3세 이하는 혼혈로 민족의식이 희미해져 있는 실정이다.12세들의 대부분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였고,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한인 후손들은 중저소득층에 속해있다.
Ⅳ.결론멕시코의 이민 』
멕시코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후 복잡한 정황이 계속되다가 ,1877년부터 1910년까지 계속 집권한 포르휘리오 디아스에 의해 근대화가 이뤄지기 시작했다.이때에 멕시코에는 전기가 들어가고, 철로가 놓여지고, 이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명분이 이민이었지, 노예제도 폐지로 텅 비계 된 농장에서 거의 반노예적인 대우를 받는 처지였다. 그런 가운데 견디다 못한 한인이 민자들은 멕시코를 탈출하여 밤중에 배를 타고 카리브 해역을 벗어나 쿠바에 도착하기도 하였다. 미국 정보 기관이 파악하고 있는 자료에 의하면 현재 쿠바에는 한국계 23세들이 약 1천여명 정도 살고 있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한편 한인들은 이민 생활이 안정되나 한인 단체 조직을 위한 활발한 활동을 개시하였다. 이들은 교민회를 조직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독립자금을 보냈고, 문화의 전통의 계승을 위해 한글 교육도 실시하였다.
현재 멕시코에는 1905년 초기 이민자들의 후예가 1만 여명이 전역에 퍼져있다. 거주하고 있는 한국 교민들은 대부분의 이민 1세대들이 사망하여 한국어를 구사할 줄 모르고, 혼혈로 민족의식도 희미해져 있는 실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현상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더욱 가속화되리라 생각된다. 더 늦기 전에 잊어져 사라져 버릴 기로에 있는 한인 이민사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이민 후손들에 대한 민족 의식 회복을 위한 국가적 차원의 후원과 관심이 요구된다.
Ⅴ 참고문헌
김원호 「북미의 작은 거인 멕시코가 기지개를 켠다」 서울:민음사, 1994.
라틴 아메리카 학회「라틴 아메리카 연구」 서울:집문당, 1996
송기도, 강준만 「콜럼버스에서 후지모리까지」 서울:개마고원, 1996
민만식, 강석영, 최영수 「중남미사」서울:민음사,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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