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개관
2. 강화도의 역사
3. 가는편
4. 특산품
5. 답사지
1) 보문사
2) 갑곶진
3) 선원사지
4) 광성보
5) 초지진
6) 전등사
7) 이건창 생가
8) 마니산 참성단
9) 부근리 고인돌
10) 연무당
11) 고려궁지
12) 외규장각
13) 용흥궁
14) 덕포진
15) 갑곶 돈대
16) 강화읍성
17) 고려궁터
18) 정수사
2. 강화도의 역사
3. 가는편
4. 특산품
5. 답사지
1) 보문사
2) 갑곶진
3) 선원사지
4) 광성보
5) 초지진
6) 전등사
7) 이건창 생가
8) 마니산 참성단
9) 부근리 고인돌
10) 연무당
11) 고려궁지
12) 외규장각
13) 용흥궁
14) 덕포진
15) 갑곶 돈대
16) 강화읍성
17) 고려궁터
18) 정수사
본문내용
5㎡이다. 碑閣은 정방형으로 앞면과 측면이 각각 2.5미터, 넓이는 약 6㎡이다.
내전의 오른쪽과 별전의 왼쪽에 우물이 하나 있으나 현재는 사용할 수가 없다. 별전에는 마루 앞에 작은 정원이 있고, 그 오른쪽에는 조금 더 큰 규모의 정원이 있다. 그러나 정원을 잘 가꾸지 않아 화초는 전혀 없다. 또한 별전 주변에 큰 나무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베어져 밑둥만 남았다. 그러나 좁은 고샅 안에 행랑채를 둔 이중의 건물은 서울 彰德宮의 延慶堂이나 樂善齋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에 따라 조성되어 소박한 기풍을 느끼게 한다.
14) 덕포진
京畿道 金浦郡 대곶면 新雁里에 있는 조선시대의 鎭營으로 사적 제 292호이다. 이 곳은 墩臺와 砲臺 및 把守廳이 있던 곳으로 그 처음 세워진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략 임진 왜란을 겪은 뒤에 선조 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1616년(광해군 8년) 5월 丙子條에 ‘先王朝新設德浦\'란 기록을 보고 알 수가 있다.
德浦鎭은 강화도 인근의 많은 군사 시설 중의 하나이다.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은 병자호란의 치욕을 수습하고자 군사력 증강에 힘을 기울였는데, 강화도에 대한 방비 역시 소홀히 하지 않았다. 1656년(효종 7년) 月串鎭을 비롯한 廣城堡 그리고 井浦堡 등을 설치였다. 효종 이후 1679년(숙종 5년)에는 水使인 李偶가 한강 하구에 요새를 만드는 한편 강화도의 각 요소마다 덕포진을 비롯한 돈대와 포대를 설치, 보수하여 文殊山城과 함께 해로로 침입하는 적에 대비하였다.
1666년(현종 7년)에 덕포진은 通津의 鐵串鎭, 豊德의 井浦鎭과 함께 강화에 예속되어 해안 경비를 맡았다. 이어 1682년(숙종 8년) 3월에는 월곶진을 대신해 덕포진을 主鎭으로 승격시켰으며 1694년(同王 20년)에는 通津縣이 道護府로 승격되면서 덕포진은 강화로부터 통진으로 그 예속이 변경되었다. 이에 1760년(영조 36년)에 편찬된 《輿地圖書》, 《通津府》, 《鎭堡條》에 따르면 덕포진에는 종3품의 水軍僉使가 임명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정조 때에는 한때 수군첨사직에서 萬戶職으로 격하되기도 하였으나 金正浩(?~1864)가 지은 《大東地志》, 《通津》, 《鎭堡條》에 따르면 여전히 수군첨사가 소속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어 고종8(1871)년의 《通津邑誌》에는 덕포진이 統禦營에 속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진은 1895년 폐진되고 말았다.
그후 1980년과 81년에 걸쳐 덕포진의 돈대와 포대에 대한 발굴 조사가 진행되었는데 이 때 돈대 터에서는 7개의 포탄과 포대, 常平通寶 2개가 출토 되었고, 파수청으로 추정되는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건물 터에는 포대의 불씨를 관리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주춧돌과 화덕자리가 발견되었다. 또한 돈대 터에서는 1874년(고종 11년)에 만들어진 포와 포탄 등이 발굴되기도 하였다.
한편 이 곳 지역의 좁은 해협을 두고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고려 高宗이 蒙古兵을 피해 강화도를 향해 이 바닷길을 지날 무렵, 孫乭이라는 뱃사공이 뱃길을 안내하게 되었다. 배가 광성보를 지나자 갑자기 뱃길이 막히는 것이었다. 경황 중에 위험을 느낀 왕은 사공이 흉계를 꾸몄다 오해하여 그를 처형하였다. 이 때 손돌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처형당하는 와중에도 뱃길앞에 바가지를 띄우며 이를 따라가면 저절로 뱃길이 트일 것이라 하였다. 결국 고종은 그곳을 무사히 빠져나갔고,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였다고 한다. 부근에는 당시 사공이었던 손돌의 무덤이 있으며 지금도 덕포진 앞의 좁은 바닷길을 孫乭項(손돌목)이라 부르고 있다.
15) 갑곶 돈대
강화대교를 건너가면 제일 먼저 만나는 돈대다. 1679년 세워졌으며 8문의 대포가 설치되었었다고 한다. 1866년 병인양요때 프랑스 함대에게 함락된 적이 있는데 이곳으로 상륙한 프랑스 함대는 뒤 정족산성 전투에서 우리 군대에 패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1976년 강화전적지 정화사업때 원형이 복원되었다. 돈대의 아랫쪽엔 석기시대부터 고려?조선?근현대에 이르는 강화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한 곳에 모아 전시한 강화역사관이 있다.
16) 강화읍성
국가 전란 때마다 중요한 방위의 요충이었던 강화읍에 성이 쌓인 것은 몽고의 침략을 받았던 고려 고종 때였다. 고려 시대에 처음 쌓았던 성은 토성이었는데 패전 후 몽고의 강요로 혈렸고, 지금 남아있는 석상은 조선조에 들어와서 쌓아진 것이다. 강화읍을 둘러싸며 2km에 걸쳐 있던 성곽과 문루들은대부분 없어졌으나 남?북?서문은 그 원형이 보존된 채 시가지 안에 지금까지 남아 있다. 특히 고려궁터 뒤 송악 마루턱에 있는 북문에 오르면 북한의 장단, 개성 땅이 훤히 보인다.
17) 고려궁터
고려가 몽고에 항전하며 강화로 수도를 옮겼을 때 39년 간 머물던 왕궁 터이다. 현재는 2,279 평만 남아있다. 고려가 몽고에 패한 뒤 궁궐은 몽고의 요구에 의해 헐어 버렸는데 오랜 세월이 지난 뒤인 1976년 강화 전적지 보수 정화 사업 때에 궁터 일대가 단장되었다. (사적 제 133호). 궁터 안에는 조선시대, 오늘날 군청과 같은 역할을 한 강화 유수부 동헌과 강화 유수부 이방청이 있고 성문의 개폐시간을 알리던 동종과 외규장각도 있다.
18) 정수사
정수사는 신라 선덕여왕 8년(639)에 회정대사가 창건했다. 마니산을 참배한 회정대사는 동쪽의 지형이 가히 불제자가 삼매정수에 들 수 있는 곳이라 여겨 절을 창건하고 정수사(精修寺)라 이름했다. 이를 조선 세종 8년(1426)에 함허대사가 중창했는데, 법당 서쪽에서 맑은 샘물이 솟아나 정수사(情水寺)라 고쳐 부르게 된다. 헌종 14년(1848)부터는 한때 법전?만흥 스님 등 비구니 스님들이 살며서 중수?중창을 거듭했고, 탱화를 봉안하는 등 절을 가꿨다.
경내에는 보물 제161호로 지정된 대웅전과 삼성각?요사채가 있고, 근년에 건립한 탑 1기가 법당 앞에 안치되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대웅보전 안의 본존불 왼쪽에 모셔진 지장보살상과 아미타불 후불?지장?칠성 탱화가 있고 삼성각에 칠성?독성?산신탱화가 있다.
정수사 주변 숲 속에는 잎과 꽃이 피는 시기가 서로 달라 이별초라고도 불리는 상사화의 자생 지역이다.
내전의 오른쪽과 별전의 왼쪽에 우물이 하나 있으나 현재는 사용할 수가 없다. 별전에는 마루 앞에 작은 정원이 있고, 그 오른쪽에는 조금 더 큰 규모의 정원이 있다. 그러나 정원을 잘 가꾸지 않아 화초는 전혀 없다. 또한 별전 주변에 큰 나무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베어져 밑둥만 남았다. 그러나 좁은 고샅 안에 행랑채를 둔 이중의 건물은 서울 彰德宮의 延慶堂이나 樂善齋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에 따라 조성되어 소박한 기풍을 느끼게 한다.
14) 덕포진
京畿道 金浦郡 대곶면 新雁里에 있는 조선시대의 鎭營으로 사적 제 292호이다. 이 곳은 墩臺와 砲臺 및 把守廳이 있던 곳으로 그 처음 세워진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략 임진 왜란을 겪은 뒤에 선조 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1616년(광해군 8년) 5월 丙子條에 ‘先王朝新設德浦\'란 기록을 보고 알 수가 있다.
德浦鎭은 강화도 인근의 많은 군사 시설 중의 하나이다.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은 병자호란의 치욕을 수습하고자 군사력 증강에 힘을 기울였는데, 강화도에 대한 방비 역시 소홀히 하지 않았다. 1656년(효종 7년) 月串鎭을 비롯한 廣城堡 그리고 井浦堡 등을 설치였다. 효종 이후 1679년(숙종 5년)에는 水使인 李偶가 한강 하구에 요새를 만드는 한편 강화도의 각 요소마다 덕포진을 비롯한 돈대와 포대를 설치, 보수하여 文殊山城과 함께 해로로 침입하는 적에 대비하였다.
1666년(현종 7년)에 덕포진은 通津의 鐵串鎭, 豊德의 井浦鎭과 함께 강화에 예속되어 해안 경비를 맡았다. 이어 1682년(숙종 8년) 3월에는 월곶진을 대신해 덕포진을 主鎭으로 승격시켰으며 1694년(同王 20년)에는 通津縣이 道護府로 승격되면서 덕포진은 강화로부터 통진으로 그 예속이 변경되었다. 이에 1760년(영조 36년)에 편찬된 《輿地圖書》, 《通津府》, 《鎭堡條》에 따르면 덕포진에는 종3품의 水軍僉使가 임명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정조 때에는 한때 수군첨사직에서 萬戶職으로 격하되기도 하였으나 金正浩(?~1864)가 지은 《大東地志》, 《通津》, 《鎭堡條》에 따르면 여전히 수군첨사가 소속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어 고종8(1871)년의 《通津邑誌》에는 덕포진이 統禦營에 속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진은 1895년 폐진되고 말았다.
그후 1980년과 81년에 걸쳐 덕포진의 돈대와 포대에 대한 발굴 조사가 진행되었는데 이 때 돈대 터에서는 7개의 포탄과 포대, 常平通寶 2개가 출토 되었고, 파수청으로 추정되는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건물 터에는 포대의 불씨를 관리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주춧돌과 화덕자리가 발견되었다. 또한 돈대 터에서는 1874년(고종 11년)에 만들어진 포와 포탄 등이 발굴되기도 하였다.
한편 이 곳 지역의 좁은 해협을 두고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고려 高宗이 蒙古兵을 피해 강화도를 향해 이 바닷길을 지날 무렵, 孫乭이라는 뱃사공이 뱃길을 안내하게 되었다. 배가 광성보를 지나자 갑자기 뱃길이 막히는 것이었다. 경황 중에 위험을 느낀 왕은 사공이 흉계를 꾸몄다 오해하여 그를 처형하였다. 이 때 손돌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처형당하는 와중에도 뱃길앞에 바가지를 띄우며 이를 따라가면 저절로 뱃길이 트일 것이라 하였다. 결국 고종은 그곳을 무사히 빠져나갔고,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였다고 한다. 부근에는 당시 사공이었던 손돌의 무덤이 있으며 지금도 덕포진 앞의 좁은 바닷길을 孫乭項(손돌목)이라 부르고 있다.
15) 갑곶 돈대
강화대교를 건너가면 제일 먼저 만나는 돈대다. 1679년 세워졌으며 8문의 대포가 설치되었었다고 한다. 1866년 병인양요때 프랑스 함대에게 함락된 적이 있는데 이곳으로 상륙한 프랑스 함대는 뒤 정족산성 전투에서 우리 군대에 패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1976년 강화전적지 정화사업때 원형이 복원되었다. 돈대의 아랫쪽엔 석기시대부터 고려?조선?근현대에 이르는 강화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한 곳에 모아 전시한 강화역사관이 있다.
16) 강화읍성
국가 전란 때마다 중요한 방위의 요충이었던 강화읍에 성이 쌓인 것은 몽고의 침략을 받았던 고려 고종 때였다. 고려 시대에 처음 쌓았던 성은 토성이었는데 패전 후 몽고의 강요로 혈렸고, 지금 남아있는 석상은 조선조에 들어와서 쌓아진 것이다. 강화읍을 둘러싸며 2km에 걸쳐 있던 성곽과 문루들은대부분 없어졌으나 남?북?서문은 그 원형이 보존된 채 시가지 안에 지금까지 남아 있다. 특히 고려궁터 뒤 송악 마루턱에 있는 북문에 오르면 북한의 장단, 개성 땅이 훤히 보인다.
17) 고려궁터
고려가 몽고에 항전하며 강화로 수도를 옮겼을 때 39년 간 머물던 왕궁 터이다. 현재는 2,279 평만 남아있다. 고려가 몽고에 패한 뒤 궁궐은 몽고의 요구에 의해 헐어 버렸는데 오랜 세월이 지난 뒤인 1976년 강화 전적지 보수 정화 사업 때에 궁터 일대가 단장되었다. (사적 제 133호). 궁터 안에는 조선시대, 오늘날 군청과 같은 역할을 한 강화 유수부 동헌과 강화 유수부 이방청이 있고 성문의 개폐시간을 알리던 동종과 외규장각도 있다.
18) 정수사
정수사는 신라 선덕여왕 8년(639)에 회정대사가 창건했다. 마니산을 참배한 회정대사는 동쪽의 지형이 가히 불제자가 삼매정수에 들 수 있는 곳이라 여겨 절을 창건하고 정수사(精修寺)라 이름했다. 이를 조선 세종 8년(1426)에 함허대사가 중창했는데, 법당 서쪽에서 맑은 샘물이 솟아나 정수사(情水寺)라 고쳐 부르게 된다. 헌종 14년(1848)부터는 한때 법전?만흥 스님 등 비구니 스님들이 살며서 중수?중창을 거듭했고, 탱화를 봉안하는 등 절을 가꿨다.
경내에는 보물 제161호로 지정된 대웅전과 삼성각?요사채가 있고, 근년에 건립한 탑 1기가 법당 앞에 안치되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대웅보전 안의 본존불 왼쪽에 모셔진 지장보살상과 아미타불 후불?지장?칠성 탱화가 있고 삼성각에 칠성?독성?산신탱화가 있다.
정수사 주변 숲 속에는 잎과 꽃이 피는 시기가 서로 달라 이별초라고도 불리는 상사화의 자생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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