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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이순신의 출생과 가족관계
Ⅱ. 무과제 이후의 관직 생활
Ⅲ. 임진왜란 때의 행적
Ⅳ. 해금의 시대와 이순신
Ⅴ. 이순신의 활동 공간
1. 좌수영 시기(1591년 2월 13일˜1593년 6월)
2. 한산도 시기(1593년 7월˜1597년 2월)
3. 우수영고하도고금도 시기(1587년 8월˜1598년 11월)
Ⅵ. 이순신이 치른 8대 해전
1. 옥포해전
2. 당항포 해전
3. 한산도 해전
4. 부산포 해전
5. 웅포해전
6. 제2차 당항포해전
7. 명량해전
8. 노량해전
Ⅶ. 이순신의 리더십
Ⅷ. 충무공에 관한 논평
Ⅱ. 무과제 이후의 관직 생활
Ⅲ. 임진왜란 때의 행적
Ⅳ. 해금의 시대와 이순신
Ⅴ. 이순신의 활동 공간
1. 좌수영 시기(1591년 2월 13일˜1593년 6월)
2. 한산도 시기(1593년 7월˜1597년 2월)
3. 우수영고하도고금도 시기(1587년 8월˜1598년 11월)
Ⅵ. 이순신이 치른 8대 해전
1. 옥포해전
2. 당항포 해전
3. 한산도 해전
4. 부산포 해전
5. 웅포해전
6. 제2차 당항포해전
7. 명량해전
8. 노량해전
Ⅶ. 이순신의 리더십
Ⅷ. 충무공에 관한 논평
본문내용
아서 아무 말이라도 하기가 쉬운 것이다.
인류 역사상의 성현인, 어느 한 민족사회에서 숭앙 받는 영웅이나 위인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너무도 오랜 세월을 지나왔고, 또 그의 숭고한 업적이나 말씀들 말이 남아 오기 때문이다.
그 반면 당장 눈앞에 살아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칭송하는 말을 쉽게 하지 아니한다. 그의 일상 생활에서 약점이나 단점 되는 것을 아울러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뒷사람들이 충무공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혹시 너무도 미화해서 하는 말이 되기도 쉽다.
그러나 그 당시 사람들이 충무공을 친히 보고 비평한 말들은 좋건 궂건 간에, 반드시 어쩐 확실한 까닭이 있어서 한 말일 것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공을 보다 더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 사람들이 충무공을 어떻게 평했던가 하는 것을, 살펴보는 것도 필요한 일일 것이다.
첫째, 서애 유성룡 (西崖 柳成龍)은 충무공을 천거한 사람이요, 또 그 당시 전쟁 내각의 수반으로서, 충무공과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인연자이었다.
더욱이 서애(1542~1607)는 충무공보다 3년 선배요, 어려서부터 서울의 같은 동네에서 잘 알고 지낸 이라, 친히 보고 듣고 한 가장 정확한 증언자라 할 수 있다.
그가 말한 한 두가지 ──
충무공은 백 번 싸운 장군으로서 한 손으로 친히 무너지는 하늘을 붙든 사람이었다.
충무공은 재질을 가지고도 운수가 없어, 백가지 재능에서 한가지도 실시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둘째,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은 충무공이 옥에서 나와 백의종군(白衣從軍) 했을 때에 그를 삼도수군 통제사로 다시 임명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들 중의 한 사람이었던 만큼 그로서 보는 바가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또한 백사(1556~1618)는 충무공보다 11년 후배요, 특히 충무공 전몰 직후 가장 먼저 왕명을 띠고 전라좌수영으로 내려가 군정을 시찰하면서, 충무공의 업적에 감격한 이였다.
그가 지은 「좌수영 대첩비문」중에는, 충무공을 칭송한 어러 가지 장황한 글이 적혔지마는,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한마디 ──
충무공의 화평하고 어진 덕과 과단성 있게 일을 처리하는 재능과 상과 벌을 꼭 바로 주는 용기 같은 것은, 만일 다른 이로 이런 분이라면 백세에 이름을 날릴 사람이라 하겠지마는, 공에게 있어서는 그저 하찮은 일이었던 그런 사람이었다.
셋째, 오산 차천로 (五山 車天勞)는 그 당시 문장 대가로 이름이 높던 이였고, 그래서 임진왜란 때에는 명나라 사신들과 문장을 서로 교환하는 일에 큰 역할을 하였던 분이다. 더욱이 오산(1556~1615)은 이항복과 같은 나이로서 충무공보다는 11년 후배였는데, 충무공이 전몰한 뒤에 많은 시인들이 공에게 애도 시를 바친 것 중에서도 가장 애절한 시를 지은이가 바로 그이였다.
그의 말 가운데 가장 대표적이 한 마디 ──
충무공은 진실로 대적이 없는 참 장군이요, 다른 이들은 모두 겨우 몽매한 것이나 면한 정도다.
넷째, 택당 이식(澤堂 李植)은 충무공과 같은 덕수(德水) 이씨로서 특히 충무공의 시장(諡狀)을 지은 다. 시장이란 그에게 시호(諡號)를 내려 줍시사고 임금께 청하기 위해, 그의 전기를 적고 거기 이어 그의 인격을 평론하여 쓰는 글이다.
더욱이 택당(1584~1642)은 충무공과 같은 문중의 인물일 뿐만 아니라, 충무공이 전몰했을 때에 그의 나이 15세였던 이라, 친히 보고들은 바가 있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는 만큼, 그의 말은 크게 참고 될 만한 말일 줄 안다.
그의 논평 중에 가장 중요한 몇 구절 ──
충무공은 곧은 절개를 지켜 우뚝하니 벽처럼 선 사람이었다.
충무공은 몸을 꼿꼿이 하고 간 사람이었다.
충무공은 전쟁에 다달아서도 뜻이 조용하여, 언제나 여유가 있는 사람이었다.
충무공은 온 군대가 한 마음이 되어 감히 그의 명령을 어기는 일이 없었던 사람이었 다.
충무공은 비록 옛날 명장으로 백년에 한 두 사람 밖에 안 나는 그런 인물로도, 이보다 더 지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다섯째, 용애 진린(龍崖 陣璘)은 명나라 장군으로서, 일찍부터 출세하여 본국에서 이름을 떨친 이었다.
그러다가 임진란 마지막 해인 1598년(무술)에 「어왜총병관 禦倭摠兵官)이 되어 해군을 거느리고 와서, 고금도(古今島)에 진치고 있던 충무공에게 합세하여, 마지막 해전에 공을 이루고 개선한 명장이었다.
더욱이 그는 충무공과 합세하여 주소로 같이 머무르기 5개월 동안, 충무공의 최후 가장 눈부신 인격의 절정기에 접했던 사람이어서, 국내외 인사를 막론하고, 그 누구보다도 충무공에게 감복했던 것이다.
그가 우리 선조대왕에게 올린 글 가운데 충무공을 평한 한 구절이 지금껏 충무공 예찬의 가장 대표적인 문귀가 되어 있는 것 ──
충무공은 천지를 주무르는 「경천위지 經天緯地」의 재주와 나라를 바로 잡은 「보천욕일 補天浴日 」의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
여기에 적힌「경천위지 經天緯地」란 것은 하늘을 날(經)로 하고 땅을 씨(緯)로 하여 종횡하는 재주를 가졌다는 뜻이요, 「보천욕일 補天浴日」이란 것은 옛날 중국 설화 가운데 여과씨(女과氏)가 오색돌을 갈아서 구멍 뚫어진 하늘을 메꾸었다 해서 「보천」이라는 문자가 생겼고, 또 「희화 羲和」란 여신이 해를 열 개를 낳아 감천(甘泉)에 목욕을 시켜 환하게 했다고 해서 「욕일」이란 문자가 생겼다는 것인데, 바로 그 문자들을 가지고 와서 충무공의 큰 공로를 표현했던 것이다.
이 밖에도 충무공과 더불어 같은 시대의 인물로서 공을 평한 여러 사람들이 있지마는, 위에 보인 다섯 분의 평이 그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거니와, 모두가 충무공에 대해서만은 거의 초인간적인 위대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로 극찬하고 있음을 본다.
앞에서 말한 바대로 사람이란 같은 시대의 인물에 대해서는, 칭찬하기를 쉽게 하지 않는 법인데, 더구나 유성룡 이항복 차천로 이 식 심지어 외국인인 진도독까지 모두가 한 시애의 거벽들이요, 또 한마디 말에 책임이 무거운 그러한 분들로서 한결같이 충무공의 인격과 재능에 대해서 극구로 칭찬한 것을 보면, 과연 충무공 자신에게서 그만한 위대한 요소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음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인류 역사상의 성현인, 어느 한 민족사회에서 숭앙 받는 영웅이나 위인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너무도 오랜 세월을 지나왔고, 또 그의 숭고한 업적이나 말씀들 말이 남아 오기 때문이다.
그 반면 당장 눈앞에 살아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칭송하는 말을 쉽게 하지 아니한다. 그의 일상 생활에서 약점이나 단점 되는 것을 아울러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뒷사람들이 충무공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혹시 너무도 미화해서 하는 말이 되기도 쉽다.
그러나 그 당시 사람들이 충무공을 친히 보고 비평한 말들은 좋건 궂건 간에, 반드시 어쩐 확실한 까닭이 있어서 한 말일 것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공을 보다 더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 사람들이 충무공을 어떻게 평했던가 하는 것을, 살펴보는 것도 필요한 일일 것이다.
첫째, 서애 유성룡 (西崖 柳成龍)은 충무공을 천거한 사람이요, 또 그 당시 전쟁 내각의 수반으로서, 충무공과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인연자이었다.
더욱이 서애(1542~1607)는 충무공보다 3년 선배요, 어려서부터 서울의 같은 동네에서 잘 알고 지낸 이라, 친히 보고 듣고 한 가장 정확한 증언자라 할 수 있다.
그가 말한 한 두가지 ──
충무공은 백 번 싸운 장군으로서 한 손으로 친히 무너지는 하늘을 붙든 사람이었다.
충무공은 재질을 가지고도 운수가 없어, 백가지 재능에서 한가지도 실시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둘째,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은 충무공이 옥에서 나와 백의종군(白衣從軍) 했을 때에 그를 삼도수군 통제사로 다시 임명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들 중의 한 사람이었던 만큼 그로서 보는 바가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또한 백사(1556~1618)는 충무공보다 11년 후배요, 특히 충무공 전몰 직후 가장 먼저 왕명을 띠고 전라좌수영으로 내려가 군정을 시찰하면서, 충무공의 업적에 감격한 이였다.
그가 지은 「좌수영 대첩비문」중에는, 충무공을 칭송한 어러 가지 장황한 글이 적혔지마는,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한마디 ──
충무공의 화평하고 어진 덕과 과단성 있게 일을 처리하는 재능과 상과 벌을 꼭 바로 주는 용기 같은 것은, 만일 다른 이로 이런 분이라면 백세에 이름을 날릴 사람이라 하겠지마는, 공에게 있어서는 그저 하찮은 일이었던 그런 사람이었다.
셋째, 오산 차천로 (五山 車天勞)는 그 당시 문장 대가로 이름이 높던 이였고, 그래서 임진왜란 때에는 명나라 사신들과 문장을 서로 교환하는 일에 큰 역할을 하였던 분이다. 더욱이 오산(1556~1615)은 이항복과 같은 나이로서 충무공보다는 11년 후배였는데, 충무공이 전몰한 뒤에 많은 시인들이 공에게 애도 시를 바친 것 중에서도 가장 애절한 시를 지은이가 바로 그이였다.
그의 말 가운데 가장 대표적이 한 마디 ──
충무공은 진실로 대적이 없는 참 장군이요, 다른 이들은 모두 겨우 몽매한 것이나 면한 정도다.
넷째, 택당 이식(澤堂 李植)은 충무공과 같은 덕수(德水) 이씨로서 특히 충무공의 시장(諡狀)을 지은 다. 시장이란 그에게 시호(諡號)를 내려 줍시사고 임금께 청하기 위해, 그의 전기를 적고 거기 이어 그의 인격을 평론하여 쓰는 글이다.
더욱이 택당(1584~1642)은 충무공과 같은 문중의 인물일 뿐만 아니라, 충무공이 전몰했을 때에 그의 나이 15세였던 이라, 친히 보고들은 바가 있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는 만큼, 그의 말은 크게 참고 될 만한 말일 줄 안다.
그의 논평 중에 가장 중요한 몇 구절 ──
충무공은 곧은 절개를 지켜 우뚝하니 벽처럼 선 사람이었다.
충무공은 몸을 꼿꼿이 하고 간 사람이었다.
충무공은 전쟁에 다달아서도 뜻이 조용하여, 언제나 여유가 있는 사람이었다.
충무공은 온 군대가 한 마음이 되어 감히 그의 명령을 어기는 일이 없었던 사람이었 다.
충무공은 비록 옛날 명장으로 백년에 한 두 사람 밖에 안 나는 그런 인물로도, 이보다 더 지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다섯째, 용애 진린(龍崖 陣璘)은 명나라 장군으로서, 일찍부터 출세하여 본국에서 이름을 떨친 이었다.
그러다가 임진란 마지막 해인 1598년(무술)에 「어왜총병관 禦倭摠兵官)이 되어 해군을 거느리고 와서, 고금도(古今島)에 진치고 있던 충무공에게 합세하여, 마지막 해전에 공을 이루고 개선한 명장이었다.
더욱이 그는 충무공과 합세하여 주소로 같이 머무르기 5개월 동안, 충무공의 최후 가장 눈부신 인격의 절정기에 접했던 사람이어서, 국내외 인사를 막론하고, 그 누구보다도 충무공에게 감복했던 것이다.
그가 우리 선조대왕에게 올린 글 가운데 충무공을 평한 한 구절이 지금껏 충무공 예찬의 가장 대표적인 문귀가 되어 있는 것 ──
충무공은 천지를 주무르는 「경천위지 經天緯地」의 재주와 나라를 바로 잡은 「보천욕일 補天浴日 」의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
여기에 적힌「경천위지 經天緯地」란 것은 하늘을 날(經)로 하고 땅을 씨(緯)로 하여 종횡하는 재주를 가졌다는 뜻이요, 「보천욕일 補天浴日」이란 것은 옛날 중국 설화 가운데 여과씨(女과氏)가 오색돌을 갈아서 구멍 뚫어진 하늘을 메꾸었다 해서 「보천」이라는 문자가 생겼고, 또 「희화 羲和」란 여신이 해를 열 개를 낳아 감천(甘泉)에 목욕을 시켜 환하게 했다고 해서 「욕일」이란 문자가 생겼다는 것인데, 바로 그 문자들을 가지고 와서 충무공의 큰 공로를 표현했던 것이다.
이 밖에도 충무공과 더불어 같은 시대의 인물로서 공을 평한 여러 사람들이 있지마는, 위에 보인 다섯 분의 평이 그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거니와, 모두가 충무공에 대해서만은 거의 초인간적인 위대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로 극찬하고 있음을 본다.
앞에서 말한 바대로 사람이란 같은 시대의 인물에 대해서는, 칭찬하기를 쉽게 하지 않는 법인데, 더구나 유성룡 이항복 차천로 이 식 심지어 외국인인 진도독까지 모두가 한 시애의 거벽들이요, 또 한마디 말에 책임이 무거운 그러한 분들로서 한결같이 충무공의 인격과 재능에 대해서 극구로 칭찬한 것을 보면, 과연 충무공 자신에게서 그만한 위대한 요소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음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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