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남송 후기의 사
▲ 강 기(姜夔)
▲ 오문영(吴文英)
▲ 사달조(史达祖)
▲ 张 炎(장염)
■ 맺음말
※ 참고자료
▲ 강 기(姜夔)
▲ 오문영(吴文英)
▲ 사달조(史达祖)
▲ 张 炎(장염)
■ 맺음말
※ 참고자료
본문내용
다. 맑으면 미목이 밝게 드러나니,마치 맑은 물이 사물의 모습을 다 비추는 것과 같다. 때문에 맑음을 귀하게 여긴다......하늘은 비었기 때문에 높고,물은 비었기 때문에 맑고, 인성은 비어야 깨달음이 있게 된다. 비면 초일(超逸)하고 차면 막힌다.(天之氣淸,人之品格高者,出筆必淸.五采陸離,不知命意所在者,氣未淸也.淸則眉目顯,如水之鑑物無遁影.故貴淸......天以空而高,水以空而明,性以空而悟.空則超,實則滯)]
심상룡 논사수필(沈祥龍 論詞隨筆);[사는 청공해야 하나,재주가 있어야하고,사조(辭藻)가 풍부하고 화려하면서도 청공한 기운이 일관하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청이란 먼지에 물들지 않음을 말하고,공이란 색상을 띄지 않음을 말한다(詞宜淸空,然須才華,富藻采縟,而能淸空一氣者爲貴.淸者,不染一塵之謂.空者,不著色相之謂)]
주제 논사잡서(周濟 論詞雜著);[처음 사를 배울 때는 空을 구해야하니 空하면 영기가 왕래한다.격조를 이루었으면 實을 구해야 하니 實하면 정력이 가득찬다(初學詞,求空,空則靈氣往來.旣成格調,求實,實則精力彌滿)]
위 세 사람이 청공에 대하여 말한 것은 너무 현학적이고 추상적이어서 분명히 이해되지 않는다. 장염이 말한 청공의 뜻을 글자대로 풀이하면'맑고 비었다'는 뜻이나, 이 풀이로는 청공의 의미 파악이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청공'과 '질실'을 대비시켜 사용했으며,강기와 오문영을 비교하여 강기의 사는 청공하고 오문영의 사는 질실하다고 말한 것이다. 장염은 청공하면 작품이 고박고아(古樸高雅)하며 힘차고 속되지 않고,질실하면 작품이 껄끄러워 유창하지 않고 뜻이 어렵고 분명하지 않다고 말하고,강기의 사를 '야운고비, 거류무적(野雲孤飛, 居留無跡)'이라고 해서,강기의 사가 맑고 고아하며 화려한 수식이 없이 자연스러운 風格을 지닌 반면, 오문영의 사는 마치 칠보로 장식한 누대처럼 화려한 수식이 눈을 부시게 하지만 훌륭한 작품을 이루지 못한다고 했다.
장염이 말한 '청공'과 '질실'의 의미를 좀더 분명히 이해하려면, 장염이 청공하다고 예를 든 강기, 소식, 왕안석의 작품과 질실하다고 한 吳文英의 작품을 여러 수 읽어보고 그 풍격을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 아정(雅正)
장염은 사원(詞源 - 卷下) 서문에서 "옛날의 악장 악부 악가 악곡은 모두 아정에서 나왔다고지악장악부가악곡, 개출어아정(古之樂章樂府樂歌樂曲, 皆出於雅正)"라고 하여,모든 시가와 악곡에서 아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잡론조(雜論條)와 부정조(賦情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는 아정해야 하는데, 뜻이 향하는 바가 정(情)의 부림을 받게 되면 아정한 소리를 잃어버린다.유영(柳永)ㆍ강여지(康與之)는 말할 것도 없고,주방언(周邦彦)도 이런 점을 면하지 못한 것이 있다.
장염이 말한 아정의 뜻은 전아 고상(典雅 高尙)하고 바르다는 의미로,아(雅)는 속(俗) 또는 음(淫)의 상반되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아정한 사를 흔히 아사(雅詞)라고 하고, 이에 반대되는 사를 속사(俗詞) 또는 측염지사(側艶之詞)라고 한다. 장염은 아정이라는 말 이외에 소아(騷雅)라는 말도 사용하고 있는데, 모두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앞에서 예시한 강기, 소식, 왕안석의 사는 청공할 뿐만 아니라 소아하다고 장염이 말한 바가 있다.
2) 작품 감상
<淸平> 청평악
采芳人杳, 화초 꺾던 쳐녀들 사라져버리니
游情少。 돌연히 들놀이 재미 없어지누나.
客里看春多草草, 타향살이신세라 구경은 하나마나
被愁分了 시를 써도 수심만 쌓여지누나.
去年燕子天涯, 작년 제비 아득히 먼 데로 가더니
今年燕子家? 올해 재빈 어느 집에 깃을 들려나?
月休夜雨, 춘삼월 꽃 시절에 밤비소리 듣지 마라
如今不是催花。 꽃피라 재촉하는 약비가 아니란다.
■ 맺음말
장염은 송사의 끝맺음을 한 작가이다. 사가 처음에는 통속적인데서 출발하여 아정한 귀족적인 것으로 발전하고, 자기 감정과 뜻을 그대로 표현하던 데서 여러 가지 엄격한 규율과 제한을 따라 짓게 되었는데, 장염은 이러한 경향의 발전의 극점에 있다 할 것이다. 이처럼 아정함과 여러 가지 격률을 따르다보면 생동력은 없어지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남송 초기의 문인들에게는 조국의 태반을 외족 금나라에게 빼앗긴 충격이 그들의 사에 깃들어있다. 따라서 이때의 사인들은 음률이나 사의 형식을 자세히 따질 겨를도 없이 자신의 격정을 쏟아내었기 때문에 문장이 산문화, 백화(白話)화하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사의 내용은 애국적인 강개와 비통을 노래한 신기질 등의 격정파가 있는 반면 소극적인 감상과 한적을 노래한 애상파가 있었다. 남송이 10여 년 혼란을 넘긴 뒤 금나라에 내분이 일어나 더 이상 송나라를 침략할 수가 없게 되고 그 결과 경제가 번영하여 안락한 생활을 누리게 된다. 이에 사인들은 나라 걱정도 잊고 기생 곁으로 돌아가고 사의 음률과 형식만을 중시하는 작품 활동을 하게 된다. 옛 사람들이 보여준 규범에 따라 거기에 알맞은 글자를 찾아 넣기만 하면 사가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러한 지나친 형식주의로 말미암아 송사는 쇠퇴하기 시작한다. 격률파들은 결국 음악과 아름다운 표현을 위하여 사의 생동하던 생명력을 희생시키고 말았다. 곧 남송 후기에는 사를 짓는다는 것이 작가의 감정이나 뜻의 표현보다도, 일정한 격식과 규율을 따라 거기에 아름답고 멋진 글귀를 골라 맞추어 놓는 작업으로 변한 것이다. 다만 남송의 쇠멸기에 국가의 존망 앞에서 비통해 하며 음률과 형식의 구속을 넘어서 진실한 격정을 노래한 유진옹(劉辰翁), 문천상(文天祥), 이연(李演), 왕원량(汪元量) 같은 사람들이 나오기는 하였으나, 이미 기울어진 대세를 만회하기엔 힘이 모자랐다. 그리고 송대에는 이청조 이외에도 주숙정(朱叔貞)과 육유(陸遊)의 처 당씨(唐氏)같은 많은 여류 사인을 배출하였다. 이것은 도시 경제의 발달로 인하여 여인들이 교양을 닦을 기회가 많아진 것과 남녀가 어울리어 호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는 송대의 사회여건의 소산이라 할 것이다.
※ 참고자료
송사선 -권덕주, 황병국 지음/신아사
송사30수 -유병례 지음/아이필드
황하에 흐르는 명시 -이해원 지음/현학사
중국문학의 이해 -김학주 지음/신아사
논문- 오문영사 석론 -이동향 (1995.01)
심상룡 논사수필(沈祥龍 論詞隨筆);[사는 청공해야 하나,재주가 있어야하고,사조(辭藻)가 풍부하고 화려하면서도 청공한 기운이 일관하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청이란 먼지에 물들지 않음을 말하고,공이란 색상을 띄지 않음을 말한다(詞宜淸空,然須才華,富藻采縟,而能淸空一氣者爲貴.淸者,不染一塵之謂.空者,不著色相之謂)]
주제 논사잡서(周濟 論詞雜著);[처음 사를 배울 때는 空을 구해야하니 空하면 영기가 왕래한다.격조를 이루었으면 實을 구해야 하니 實하면 정력이 가득찬다(初學詞,求空,空則靈氣往來.旣成格調,求實,實則精力彌滿)]
위 세 사람이 청공에 대하여 말한 것은 너무 현학적이고 추상적이어서 분명히 이해되지 않는다. 장염이 말한 청공의 뜻을 글자대로 풀이하면'맑고 비었다'는 뜻이나, 이 풀이로는 청공의 의미 파악이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청공'과 '질실'을 대비시켜 사용했으며,강기와 오문영을 비교하여 강기의 사는 청공하고 오문영의 사는 질실하다고 말한 것이다. 장염은 청공하면 작품이 고박고아(古樸高雅)하며 힘차고 속되지 않고,질실하면 작품이 껄끄러워 유창하지 않고 뜻이 어렵고 분명하지 않다고 말하고,강기의 사를 '야운고비, 거류무적(野雲孤飛, 居留無跡)'이라고 해서,강기의 사가 맑고 고아하며 화려한 수식이 없이 자연스러운 風格을 지닌 반면, 오문영의 사는 마치 칠보로 장식한 누대처럼 화려한 수식이 눈을 부시게 하지만 훌륭한 작품을 이루지 못한다고 했다.
장염이 말한 '청공'과 '질실'의 의미를 좀더 분명히 이해하려면, 장염이 청공하다고 예를 든 강기, 소식, 왕안석의 작품과 질실하다고 한 吳文英의 작품을 여러 수 읽어보고 그 풍격을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 아정(雅正)
장염은 사원(詞源 - 卷下) 서문에서 "옛날의 악장 악부 악가 악곡은 모두 아정에서 나왔다고지악장악부가악곡, 개출어아정(古之樂章樂府樂歌樂曲, 皆出於雅正)"라고 하여,모든 시가와 악곡에서 아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잡론조(雜論條)와 부정조(賦情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는 아정해야 하는데, 뜻이 향하는 바가 정(情)의 부림을 받게 되면 아정한 소리를 잃어버린다.유영(柳永)ㆍ강여지(康與之)는 말할 것도 없고,주방언(周邦彦)도 이런 점을 면하지 못한 것이 있다.
장염이 말한 아정의 뜻은 전아 고상(典雅 高尙)하고 바르다는 의미로,아(雅)는 속(俗) 또는 음(淫)의 상반되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아정한 사를 흔히 아사(雅詞)라고 하고, 이에 반대되는 사를 속사(俗詞) 또는 측염지사(側艶之詞)라고 한다. 장염은 아정이라는 말 이외에 소아(騷雅)라는 말도 사용하고 있는데, 모두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앞에서 예시한 강기, 소식, 왕안석의 사는 청공할 뿐만 아니라 소아하다고 장염이 말한 바가 있다.
2) 작품 감상
<淸平> 청평악
采芳人杳, 화초 꺾던 쳐녀들 사라져버리니
游情少。 돌연히 들놀이 재미 없어지누나.
客里看春多草草, 타향살이신세라 구경은 하나마나
被愁分了 시를 써도 수심만 쌓여지누나.
去年燕子天涯, 작년 제비 아득히 먼 데로 가더니
今年燕子家? 올해 재빈 어느 집에 깃을 들려나?
月休夜雨, 춘삼월 꽃 시절에 밤비소리 듣지 마라
如今不是催花。 꽃피라 재촉하는 약비가 아니란다.
■ 맺음말
장염은 송사의 끝맺음을 한 작가이다. 사가 처음에는 통속적인데서 출발하여 아정한 귀족적인 것으로 발전하고, 자기 감정과 뜻을 그대로 표현하던 데서 여러 가지 엄격한 규율과 제한을 따라 짓게 되었는데, 장염은 이러한 경향의 발전의 극점에 있다 할 것이다. 이처럼 아정함과 여러 가지 격률을 따르다보면 생동력은 없어지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남송 초기의 문인들에게는 조국의 태반을 외족 금나라에게 빼앗긴 충격이 그들의 사에 깃들어있다. 따라서 이때의 사인들은 음률이나 사의 형식을 자세히 따질 겨를도 없이 자신의 격정을 쏟아내었기 때문에 문장이 산문화, 백화(白話)화하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사의 내용은 애국적인 강개와 비통을 노래한 신기질 등의 격정파가 있는 반면 소극적인 감상과 한적을 노래한 애상파가 있었다. 남송이 10여 년 혼란을 넘긴 뒤 금나라에 내분이 일어나 더 이상 송나라를 침략할 수가 없게 되고 그 결과 경제가 번영하여 안락한 생활을 누리게 된다. 이에 사인들은 나라 걱정도 잊고 기생 곁으로 돌아가고 사의 음률과 형식만을 중시하는 작품 활동을 하게 된다. 옛 사람들이 보여준 규범에 따라 거기에 알맞은 글자를 찾아 넣기만 하면 사가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러한 지나친 형식주의로 말미암아 송사는 쇠퇴하기 시작한다. 격률파들은 결국 음악과 아름다운 표현을 위하여 사의 생동하던 생명력을 희생시키고 말았다. 곧 남송 후기에는 사를 짓는다는 것이 작가의 감정이나 뜻의 표현보다도, 일정한 격식과 규율을 따라 거기에 아름답고 멋진 글귀를 골라 맞추어 놓는 작업으로 변한 것이다. 다만 남송의 쇠멸기에 국가의 존망 앞에서 비통해 하며 음률과 형식의 구속을 넘어서 진실한 격정을 노래한 유진옹(劉辰翁), 문천상(文天祥), 이연(李演), 왕원량(汪元量) 같은 사람들이 나오기는 하였으나, 이미 기울어진 대세를 만회하기엔 힘이 모자랐다. 그리고 송대에는 이청조 이외에도 주숙정(朱叔貞)과 육유(陸遊)의 처 당씨(唐氏)같은 많은 여류 사인을 배출하였다. 이것은 도시 경제의 발달로 인하여 여인들이 교양을 닦을 기회가 많아진 것과 남녀가 어울리어 호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는 송대의 사회여건의 소산이라 할 것이다.
※ 참고자료
송사선 -권덕주, 황병국 지음/신아사
송사30수 -유병례 지음/아이필드
황하에 흐르는 명시 -이해원 지음/현학사
중국문학의 이해 -김학주 지음/신아사
논문- 오문영사 석론 -이동향 (199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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