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학] 세종 시대의 외교 - 문헌을 통해 정리
본 자료는 2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해당 자료는 2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2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정치학] 세종 시대의 외교 - 문헌을 통해 정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대 명 관계

2. 대 여진 관계와 북방 개척

3. 대마도 정벌과 대 일본 관계

본문내용

례 정벌한 일이 있었다. 세종이 즉위하자 그의 원년에 병권을 장악하고 있던 태종의 뜻에 따라 또 한 차례 대마도 정벌을 단행하였다. 즉 태종 18년에 대마도에 기근이 발생하여 식량이 부족하자 대거 명나라의 해안으로 향하던 왜적이 비인, 해주 연안에 들러 갖은 약탈을 다하였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하여 세종 원년 6월에 3군도제찰사 이종무, 3군도통사 유정현으로 하여금 병선 227척, 군사 17,000을 동원하여 마산포를 떠나 대마도에 쳐들어가 큰 타격을 입히고 그해 7월에 거제도에 귀환하였으나 원정군이 왜구의 소굴을 뿌리 뽑는 데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급한 쪽은 대마도로 대마도주가 신속의 뜻을 전해옴에 따라 조선 정부에서는 한때 대마도를 경상도 관내에 편입시키기도 하였다. 이들은 그 뒤에 곧 구주 일대의 제후들의 압력으로 대마도주는 다시 신속을 번복하기도 하였으나 이후 다시 통교가 열렸다. 이 대마도 정벌이 왜구의 소굴을 완전히 소탕하지는 못하였으나 대일본 관계에 있어서는 중대한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여말 선초에 걸쳐 영진군이나 기선군을 강화한 것은 바로 왜구 방비에 목적이 있었고 태종대부터 화기 발달을 가져 온 것도 바로 이 왜구에 대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대마도 정벌로 조선의 군사력이 막강하다는 것이 증명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세종 일대에는 왜구가 격감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역상의 통제를 가해도 그들이 반발하지 않는 결과를 가져 왔다. 이러한 상황은 여진 침입을 물리치고 국경 경비를 강화하는 데 많은 국방력을 돌릴 수 있게 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세종대의 교린책은 여진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처음 회유책을 쓰다가 강경책으로, 일본에 대하여는 먼저 강경책을 썼다가 회유책으로 전환하면서 남 왜에 대한 우려가 줄어들었다고 보여 진다.
세종 4년에 태종이 사망하자 세종은 일본에 대하여 다시 회유책을 써서 대마도와의 통교를 허락하였다. 건국 초기에는 공적, 사적인 왜인들이 무질서하게 우리나라 남해안 일대에 무역선들이 도박함으로써 국방상, 사회상의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기 때문에 태종 7년 부산포와 내이포를 한정하여 도박처로 정해주고 여기에서 무역 거래를 하게하고 접대도 여기서 행하도록 하였는데 세종 8년에는 다시 염포(울산)를 개항하니 이것이 삼포개항인 것이다. 이 삼포는 왜인의 왕래만 허락한 것으로 그들의 볼일이 끝나면 곧 돌아가야 했으니 왜인 가운데에는 돌아가지 않고 영주하는 항거왜인 수가 급증하고 이들의 횡포도 심하여 대마도주에게 항의해도 여의치 못하였다. 이에 세종은 다시 이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그의 25년 대마도와의 사이에 계해약조를 체결하여 진상 무역선인 대마도주의 세견선의 수를 제한하고 왜구 금압의 목적으로 주는 세사미두도 200석으로 제한하였다. 이와 같이 회유책을 쓰되 무질서한 왜인의 왕래를 제한했던 시기가 세종이 북방경략을 적극화하던 시기인데도 왜인들이 반발하지 않았다는 것은 바로 세종대에 있어서는 북방 경략 일변도의 방비가 아니라 왜에 대한 방비로 소홀히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 가격1,300
  • 페이지수7페이지
  • 등록일2007.02.06
  • 저작시기2007.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92701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