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 론
2. 사림파(士林派)의 형성과 사상적배경
3. 상촌과 그 후예들의 학문과 정치활동
1) 상촌의 학문과 사상
2) 공평공(恭平公) 김영유(金永濡)의 정치 활동
3) 십청헌(十淸軒) 김세필(金世弼)의 사상과 정치
4) 충민공(忠愍公) 김저의 정치와 사상
5) 학주(鶴州) 김홍욱(金弘郁)의 정치 활동
4. 사림파의 학맥과 정여창의 역할
5. 사림파의 형성과 정여창의 위상
2. 사림파(士林派)의 형성과 사상적배경
3. 상촌과 그 후예들의 학문과 정치활동
1) 상촌의 학문과 사상
2) 공평공(恭平公) 김영유(金永濡)의 정치 활동
3) 십청헌(十淸軒) 김세필(金世弼)의 사상과 정치
4) 충민공(忠愍公) 김저의 정치와 사상
5) 학주(鶴州) 김홍욱(金弘郁)의 정치 활동
4. 사림파의 학맥과 정여창의 역할
5. 사림파의 형성과 정여창의 위상
본문내용
그가 남긴 『일두유집』은 사화로 인하여 소실되어 안타까울 뿐이다. 현대에 전하는 그의 유집은 정구의 『문헌공실기(文獻公實記)』를 교정하여 남계서원에서 증간한 것뿐이다. 그의 속집은 그의 시문 『사우록(師友錄)』 중에서 『문헌공실기』에 수록되지 않은 유문을 모아 13세손 정환주(鄭煥周)가 편집한 책을 전우(田愚) 등 몇몇이 서로 검정(檢正)하여 1920년 경남 함양군 지곡면에서 16세손 전근상(鄭近相) 등이 간행하였다. 속집 끝에 전우의 발문이 있다. 유집 및 속집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집 권1 시·疏·제문 각 1편, 「용학주소(庸學註疏)」·「주객문답」·「진수잡저」 등 잡서 3편, 권2 부록으로 「교서(敎書)」·「반교문(頒敎文)」·「문묘봉안시고유문(文廟奉安時告由文)」·「서원봉안문(書院奉安文)」·「제묘문(祭墓文) ·「천학행소(天學行疏)」·「행장(行狀)」·「신도비명(神道碑銘)」·「향사당기(鄕祠堂記)」·「사실대략(事實大略)」·「찬술(撰述)」·시장(詩章)·실기발(實紀跋)·실기중간발(實紀重刊跋) 등. 속집 권1 시 7수·서(書) 2편·「이기설(理氣說)」·「선악천리론(善惡天理論)」·「입지론(立志論)」 등 잡저 3편, 권2-4 부록으로 권2 「서원사액제문(書院賜額祭文)」·「사제문(賜祭文)」·「봉안문」·「비문」·「유선록서(儒先錄序)」 등, 권4 「세계원류(世界原流)」·「사우문인록(師友文人錄)」과 추록(追錄)으로 서 1편·정필단(鄭必達)의 「도산서원청액소(陶山書院請額疏)」·김천일(金千鎰)의 「도산서원춘추향축문(陶山書院春秋享祝文)」 등. 유집 권1의 잡저 3편은 제목만 있는데 내용은 그의 부인이 소각하여 전해지지 않는다고 한다. 권 2의 시장은 유호인·조신(曺伸)·김안국(金安國)·이황 등의 것이며 실기발은 장현광(張顯光)의 실기중간발이고, 이재(李縡)의 발이 따로 있다.
5. 사림파의 형성과 정여창의 위상
사림파의 형성 과정을 살펴보면 중종 때 내려와서 그 계열과 성격이 확인되고 있지만, 그 연원은 고려 왕조를 위해 충절을 지킨 정몽주와 길재에서 찾을 수 있다. 길재의 문하에 김숙자가 이어지고 김숙자의 뒤를 김종직이 잇는다. 김종직의 문하에는 상당수의 제자가 드러나고 있는데 정여창, 김굉필, 길일손, 유호인, 표현말 등이 그들이다. 특히 김종직은 세조에 의해 왕위를 침탈당하고, 죽임을 당한 단종을 동정하여 이를 항우의 손에 죽은 초나라 해왕의 사건으로 풍자하는 글로써 「조의제문」을 지었는데, 그의 제자 김일손이 이 글을 사초에 실어 사회적으로 큰 파란을 일으켰다. 이 글을 빌미로 일어난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에 걸쳐 김종직의 문하를 중심으로 많은 선비들이 무고하게 희생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사화는 사림파를 소멸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림파의 위치를 역사적으로 선명하게 부각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다.
사화는 정여창 등 많은 사림파 선비들이 훈구 관료들의 손에 희생된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훈구파가 권력을 휘둘러 정당한 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의롭지 못한 폭력을 행사한 것을 뜻한다. 이에 이어서 연산군의 학정을 제거하고 중종을 추대한 중종반정이 일어나지만, 훈구파의 재등장으로 사림파는 일시적으로 억압을 받게 된다. 이러한 반정공신들에 맞서서 자신의 도학적 신념을 펴고자 했던 인물이 김굉필의 문인이던 조광조다. 조광조 이후 사림들은 의리정신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상을 도출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혹독한 시련을 겪으면서 사단칠정론으로 대표되는 정밀한 이기심성론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정치·경제 등 사회적 모순의 근본요인을 인간의 심성에서 찾는 것이 유교 특히 성리학의 기본 과점이라고 보았다. 곧 외적인 문제는 내적인 양심의 문제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퇴계와 율곡은 사림파를 형성하면서 그 이론적 기초로써 사화기와 경장기라는 시대적 상황이 재기하는 문제점에 대한 근본 해결책을 마음으로부터 모색하였고 그 이론적 기초로써 이기론을 정립한 것이다. 바로 퇴계의 이기론은 정여창의 이기설에 기초를 두고 있다. 즉, 그는 "기 없는 이가 없고, 이 없는 기가 없기 때문에 이기가 구별이 없는 것 같지만, 이는 총괄적으로 말하여 지선하고 영의가 없다고 할 수 있으며 기는 청탁의 구별이 있으므로 이기가 구별된다"는 이원적 입장을 취하였다. 이것이 퇴계의 이기이원론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요컨대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사림의 세력이 강한 선조 때이었지만 오현(五賢)에 대한 문묘배향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사림 세력이 아직도 하나로 결집되지 않고 분열해 왕으로 하여금 이들 오현의 문묘배향을 미루게 하였던 것이다. 결국 광해군 2년(1610)에 가서야 정여창,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 등 이른바 '오현(五賢)'이 문묘에 종사되었는데, 이것은 광해군이 사림의 협조가 필요한 정치적 상황이기 때문에 이를 더 이상 미룰 수 없었고 사림 세력들도 하나로 결집되어 정여창을 비롯한 오현을 문묘에 배향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 왕조에서 문묘의 설립과 새로운 유학자들의 배향 문제는 역시 숭유억불의 정책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문묘는 국가의 사전(祀典) 안에서 정치적 위상을 높이고 또 이를 통해서 국가는 사림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인정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정여창의 문묘배향은 그가 성종 시대의 사림파 중 학문과 인품의 최고 경지에 올랐음을 인정하는 것인 동시에 사림의 도통이 정몽주-길재-김종직-정여창·김굉필-조광조-이황으로 계승되었음을 확인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하겠다.
참고문헌
李樹健, 『嶺南士林派의 形成』, 영남대출판부, 1979.
李秉烋, 『朝鮮前期 畿湖 士林派 硏究』, 일조각, 1984.
鄭在景, 『鄭汝昌硏究』, 集文堂, 1987.
李泰鎭, 「士林派의 留鄕所 復立運動」(상·하), 『震檀學報』 34·35, 1972·1973.
成校珍. 『成牛溪의 性理思想』, 以文出版社, 1993.
E. W. Wagner, 「李朝士林問題에 대한 再檢討」, 『全北史學』 4, 1980.
木板本. - [發行地不明 : 發行處不明], 純祖13(1813)跋.
4卷2冊 ; 32.5x20.8cm.
四周雙邊. 半匡 ; 19.3x15.2cm.有界.10行20字.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5. 사림파의 형성과 정여창의 위상
사림파의 형성 과정을 살펴보면 중종 때 내려와서 그 계열과 성격이 확인되고 있지만, 그 연원은 고려 왕조를 위해 충절을 지킨 정몽주와 길재에서 찾을 수 있다. 길재의 문하에 김숙자가 이어지고 김숙자의 뒤를 김종직이 잇는다. 김종직의 문하에는 상당수의 제자가 드러나고 있는데 정여창, 김굉필, 길일손, 유호인, 표현말 등이 그들이다. 특히 김종직은 세조에 의해 왕위를 침탈당하고, 죽임을 당한 단종을 동정하여 이를 항우의 손에 죽은 초나라 해왕의 사건으로 풍자하는 글로써 「조의제문」을 지었는데, 그의 제자 김일손이 이 글을 사초에 실어 사회적으로 큰 파란을 일으켰다. 이 글을 빌미로 일어난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에 걸쳐 김종직의 문하를 중심으로 많은 선비들이 무고하게 희생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사화는 사림파를 소멸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림파의 위치를 역사적으로 선명하게 부각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다.
사화는 정여창 등 많은 사림파 선비들이 훈구 관료들의 손에 희생된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훈구파가 권력을 휘둘러 정당한 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의롭지 못한 폭력을 행사한 것을 뜻한다. 이에 이어서 연산군의 학정을 제거하고 중종을 추대한 중종반정이 일어나지만, 훈구파의 재등장으로 사림파는 일시적으로 억압을 받게 된다. 이러한 반정공신들에 맞서서 자신의 도학적 신념을 펴고자 했던 인물이 김굉필의 문인이던 조광조다. 조광조 이후 사림들은 의리정신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상을 도출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혹독한 시련을 겪으면서 사단칠정론으로 대표되는 정밀한 이기심성론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정치·경제 등 사회적 모순의 근본요인을 인간의 심성에서 찾는 것이 유교 특히 성리학의 기본 과점이라고 보았다. 곧 외적인 문제는 내적인 양심의 문제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퇴계와 율곡은 사림파를 형성하면서 그 이론적 기초로써 사화기와 경장기라는 시대적 상황이 재기하는 문제점에 대한 근본 해결책을 마음으로부터 모색하였고 그 이론적 기초로써 이기론을 정립한 것이다. 바로 퇴계의 이기론은 정여창의 이기설에 기초를 두고 있다. 즉, 그는 "기 없는 이가 없고, 이 없는 기가 없기 때문에 이기가 구별이 없는 것 같지만, 이는 총괄적으로 말하여 지선하고 영의가 없다고 할 수 있으며 기는 청탁의 구별이 있으므로 이기가 구별된다"는 이원적 입장을 취하였다. 이것이 퇴계의 이기이원론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요컨대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사림의 세력이 강한 선조 때이었지만 오현(五賢)에 대한 문묘배향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사림 세력이 아직도 하나로 결집되지 않고 분열해 왕으로 하여금 이들 오현의 문묘배향을 미루게 하였던 것이다. 결국 광해군 2년(1610)에 가서야 정여창,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 등 이른바 '오현(五賢)'이 문묘에 종사되었는데, 이것은 광해군이 사림의 협조가 필요한 정치적 상황이기 때문에 이를 더 이상 미룰 수 없었고 사림 세력들도 하나로 결집되어 정여창을 비롯한 오현을 문묘에 배향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 왕조에서 문묘의 설립과 새로운 유학자들의 배향 문제는 역시 숭유억불의 정책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문묘는 국가의 사전(祀典) 안에서 정치적 위상을 높이고 또 이를 통해서 국가는 사림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인정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정여창의 문묘배향은 그가 성종 시대의 사림파 중 학문과 인품의 최고 경지에 올랐음을 인정하는 것인 동시에 사림의 도통이 정몽주-길재-김종직-정여창·김굉필-조광조-이황으로 계승되었음을 확인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하겠다.
참고문헌
李樹健, 『嶺南士林派의 形成』, 영남대출판부, 1979.
李秉烋, 『朝鮮前期 畿湖 士林派 硏究』, 일조각, 1984.
鄭在景, 『鄭汝昌硏究』, 集文堂, 1987.
李泰鎭, 「士林派의 留鄕所 復立運動」(상·하), 『震檀學報』 34·35, 1972·1973.
成校珍. 『成牛溪의 性理思想』, 以文出版社, 1993.
E. W. Wagner, 「李朝士林問題에 대한 再檢討」, 『全北史學』 4, 1980.
木板本. - [發行地不明 : 發行處不明], 純祖13(1813)跋.
4卷2冊 ; 32.5x20.8cm.
四周雙邊. 半匡 ; 19.3x15.2cm.有界.10行20字.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