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림파, 임진왜란과 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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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들어가며

Ⅱ. 사림파(士林派)
1. 훈구파(勳舊派)와 사림파(士林派)
2. 사림파의 등장
3. 붕당정치(朋黨政治)의 전개
(1) 붕당정치의 발단
(2) 붕당정치의 전개

Ⅲ. 임진왜란(壬辰倭亂)
1. 임진왜란 전의 정세
2. 임진왜란의 전개
3. 임진왜란 후의 정세

Ⅳ. 이순신(李舜臣)
1. 임진왜란과 이순신
2. 이순신의 최후

Ⅴ. 마치며

본문내용

합함대를 거느리고 왜군의 군대를 공격하였다. 이때 명의 육군 유정(劉綎, ?-1619)도 가세하여 수륙양면 작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왜군들이 견고한 진지 속에 숨어서 대항함으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다만 왜군로부터 철수하는 바다를 봉쇄하였다. 왜군들은 육지와 바닷길이 막히자 크게 당황하여 유정과 진린에게 많은 뇌물을 바치고 뱃길을 열어 왜군의 철수를 허용하도록 종용하였으나, 이순신은 단호히 이를 거절하고, 해상방비를 강화하였다. 그러자 왜군은 남해 등지에 산재해 있는 그들의 전선을 총 동원하여 가로막고 있는 조선의 함대를 견제 또는 격파하면서 마지막 탈출의 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11월 18일, 왜선들이 노량에 집결하여 공격의 햇불을 올리고 있었다. 이들은 공이 예상한 바와 같이 노량과 왜교(倭橋)의 중간지점에 결진하고 있는 조선과 명의 연합함대를 협공하려는 것이었고, 그 수는 무려 500여척에 달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그날 밤, 왜교의 해상봉쇄를 해제하고 유도를 출발하여 노량 근해에 집결한 왜군 함대를 섬멸하기 위해서 작전을 개시하였다. 다음날 이순신이 이끄는 연함함대는 노량에 도착하여, 여기서 함대를 좌우로 나누어 전투태세를 갖추고 주위의 성에는 복병을 배치한 후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기습공격을 당한 왜선은 당황하여 일시 흩어졌다고 다시 대열을 갖추어 반격을 가해왔다. 이순신의 맹렬한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던 왜군은 사기가 저하되어 관음포(觀音浦) 쪽으로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퇴로 또한 막혀있었다. 궁지에 몰린 왜선들이 반격을 전개함에 따라 또다시 격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때에 함상에서 지휘하던 이순신은 적탄에 쓰러지고 말았다. 때는 1598년 11월 19일(음력), 이순신의 나이 54세였다. 공의 유언대로 이순신의 큰아들 이회(李會, 1567-1625)와 조카 이완(李莞, 1579-1627)은 전투를 계속하여 200여척의 왜선을 격파하였다. 이리하여 7년간의 임진왜란은 이순신의 전사와 함께 끝났다.
Ⅴ. 마치며
노량해전으로 이순신은 그 생을 다하게 된다. 하지만 민족의 성웅(聖雄) 이순신에 대한 논란은 후대에 계속된다. 바로 석연치 않은 죽음에 대한 것이다. 이순신에 대한 죽음에 대해서는 크게 3가지로 나뉘게 된다. 기록 그대로 사망설, 자살설, 위장자살설(생존설)이다. 우선 사망설은 마지막 전투였던 노량해전에서 전투를 지휘하다 왜군의 총탄에 맞아 사망하였다는 기존에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이와 같은 사실에 반론을 제시하는 것이 자살론이다. 이에 대한 근거로 먼저 7년 동안 수많은 전투에서 패전한 일도 없고, 총탄에 맞은 일도 없었는데 왜 하필 마지막 전투에서 자신의 몸을 보전하지 못한 것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둘째, 노량해전에서 갑옷과 투구를 벗고 출전한 일이다. 이순신은 전쟁기간동안 잠잘 때에도 갑옷을 입고 잤는데 굳이 11월 추운 날 갑옷과 투구를 모두 벗고 출정한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다. 셋째는 당시 중상(中傷)과 모략(謀略)으로 부패된 조정에서 왜란이 끝난 후 이순신의 공적을 놓고 어떠한 모략이나 모함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으므로 스스로 자살을 택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위장자살설은 자살설에서 더 나아가 왜란 후에도 이순신이 생존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 근거로는 첫째, 위험한 전투장소에 이상하게도 맏아들 이회와 조카 이완을 동행한 점을 지적한다. 그 전의 다른 해전에서 이순신은 맏아들과 조카와 함께 배를 타지 않았다. 그런데 함께 배에 탄 것은 미리 계획하고 자살을 위장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또 묘지와 관련된 문제이다. 이순신은 1598년 11월 19일에 사망해 고향인 충남(忠南) 아산(牙山)에 시신이 온 것은 12월이다. 근데 장례를 치른 것이 이듬해 2월이다. 무려 3달 가까이 있다가 장례를 치른 것이다. 그리고 15년 후에 묘지를 이장한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3달 가까이 장례를 미룬 점과 15년 후 이장한 사실을 추론해 이순신이 실제로 1598년이 아닌 15년 후에 1613년에 죽은 것이라는 주장이다.
자살설과 위장자살설의 주장이 어느 정도 일리는 있지만 어느 하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단지 알려진 대로 사망설이 가장 유력한 통설일 뿐이다. 하지만 자살설과 위장자살설에 대한 약간의 의문이 있다. 과연 이순신이 어떻게 그 전투가 마지막이었다는 것을 알고 자살 혹은 위장자살을 했을지 하는 의문이다. 물론 왜군이 퇴각하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당시 상황이 언제 다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국내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일본에 외침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퇴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마지막 전투라는 것을 예측하고 자살 혹은 위장자살은 했는가 하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그런 계산된 죽음 위에 놓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2번의 백의종군(白衣從軍)의 고통을 겪었지만 왜란이후 자신의 목숨을 보전코자 했다면 낙향하여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공이나 업적을 질투하는 정치적 무리들이 모함을 하고자 했다면 벌써 백의종군 시기에 그의 삶은 끝났을 것이다. 또한 그러한 무리들도 언제 다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이니 이순신을 함부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개인적인 추론일 뿐 확실하지는 않은 것이다. 이순신의 죽음에 대한 논란은 그가 우리에게 기억되는 동안 계속 논의될 문제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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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11.03
  • 저작시기20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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