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서의 오해 그리고 그 안에 감춰진 하나님의 비밀과 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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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까지 화가 치밀어 말한다.
이것을 지금까지 흔히 생각해온 방식으로 보편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이방인에게 나타내시는 메세지로 요나서를 본다면 이방인 죽는 것이 선지자라는 사람이 고소하게 여기는 - 어떻게 보면 선지자로서는 정상적인 심성을 가지지 않은 사람으로 선지자 요나를 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사람이 죽을 자리에서 사는 것이 선지자에게도 기쁨이 되어야 하는데 사랑도 없고 심성도 괴팍한 사람으로 매도되는데 이것이 비극적인 요나서의 오해라는 말이다.
선지자 요나가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용서하시는데 불만을 품고 죽는 것이 낫다고 성을 낼 때 여호와께서 너의 성냄이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셨다. 그 때에 선지자 요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니느웨 성이 망하는 것을 보려고 자기 고집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합당치 않은 일은 하나도 없다. 우리도 알고 일반 성도들도 다 아는 그런 것도 선지자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자기 억지만 부린다고 사람들이 오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선지자 요나는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아서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 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박넝쿨을 이용해서 선지자 요나를 깨닫게하신 것이다. 박넝쿨로 인해서 시원한 그늘이 생기게 되니 선지자 요나는 매우 기뻤다. 그런데 하루는 시원하게 잘 지냈는데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셔서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씹게 하셔서 박넝쿨이 곧 시들어 버렸다. 8절에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라고 말했다.
9절에 하나님이 요나에게 말씀하신다. 네가 이 박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 라고 선지자 요나가 굉장히 화가 난 어조로 말을 했다. ‘왜 하나님 니느웨를 멸망시킨다고 말씀하시고서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이다. ‘하나님이 우리 이스라엘 보다 니느웨를 더 사랑하시는 것을 저는 더 이상 이대로 볼 수 없습니다. 이제 제가 인내의 한계를 느껴 차라리 죽는 것보다 더 참을 수가 없습니다.’ 란 뜻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선지자 요나는 질투의 화신이 되어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돌보시는 우리 민족은 버리고 이방도시 니느웨를 더 중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한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요나서의 가장 중요한 끝절 두 절에서 선지자 요나에게 깨달음을 주고 계신다. (1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이 말씀에 선지자 요나가 바로 깨달은 것은 ‘아하! 하나님께서는 우리 민족 이스라엘을 더 사랑하시는구나!’ 하는 것이다. 하루 있다가 다음 날에 없어지는 박넝쿨은 니느웨고 정말 하나님이 중하게 여기시는 것은 니느웨의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십이만명의 생명과 많은 육축을 아끼는 것 같이 아끼시는 것이 우리 이스라엘에 대한 말씀인 것을 알아 차렸던 것이다. 박넝쿨과 인간의 생명이 어떻게 비교될 수 있겠는가?
그 때 선지자 요나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불타는 심정을 느낀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아끼시는 그 사랑은 내가 염려하고 고민하고 있었던 것 보다 더 크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하나님께 화난 어조로 따질 때에 네가 성내는 것이 합당치 않은 일이라고 세 차례나 하신 말씀의 뜻을 알고 드릴 말씀이 없어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염려하고 아끼신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우리 민족 이스라엘이 니느웨처럼 회개하고 악에서 돌이키는 길 만이 우리가 살 길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멸망의 길로 치닫고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이토록 깊으신 줄을 미처 몰랐던 것이다. 선지자 요나는 지금까지 하나님께 성낸 자기 자신이 부끄러웠다. 대화의 형식으로 이렇게 강한 어조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면서 끝맺는 것이 요나서만의 특징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왜 진정한 내 마음을 이토록 모르고 네 고집과 주장만 내세우고 있느냐! 지금 너희들을 사랑하는 내 심정을 알고 있느냐?’ 요나서를 통해서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결론으로 우리는 성경 말씀을 대할 때 바로 이렇게 숨어있는 그 크신 하나님의 의도를 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람이 하나님을 버렸으면 버렸지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신 백성을 도중에 아무도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신다. 지금까지 요나서를 이방인도 같은 비중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한 책으로 보면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에 대한 이 같이 깊으신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히 찾지 못하게 된다. 답습하며 모방하는 생각은 단 한 번도 앞서지 못하고 항상 꼴찌를 달리게 되게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도 이스라엘과 같은 비중으로 사랑하신다면 앗수르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이방 나라에도 선지자들을 파송하셔서 활동한 그 내용이 성경 말씀에 기록되어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나훔서를 안다. 나훔서는 니느웨 멸망에 대해 예언한 책이다.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했다. 그리고는 앗수르도 망했다. 그런데 앗수르는 회복되지 못했고 지금은 그 흔적이 발굴되는 과정에 있다고 하지만 아직 미미하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하신 사랑의 열정 - 그들이 저지르는 악에 대한 진노와 안타까운 심정 - 을 요나에게 전해주기 위해서 박넝쿨을 시청각 교재로 사용하셨다. 이것이 요나서가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이다. 우리가 다 알듯이 이스라엘은 회복되어 오늘까지도 건재하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방인도 같은 비중을 두고 사랑하신다면 니느웨도 오늘날 까지 이스라엘과 같이 회복되어 남아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서에서 보여 주신 이스라엘을 사랑하셨던 그 사랑으로 지금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다. 이 사랑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는 자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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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3.05
  • 저작시기20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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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97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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