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근대사회에서의 사회와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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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공동사회 ⇒ 원시사회

이익사회 ⇒ 노예사회(고대사회-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봉건사회(중세사회-고려시대, 조선시대)
근대사회(韓末, 일제식민지)
현대사회(광복 이후)

본문내용

년 사립학교령을 만들어 민족교육자들의 학교를 통한 활동을 봉쇄했다. 이어서 1918년 ‘서당규칙’을 만들어 서당, 향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여 결국 민족교육자들의 서당, 향교를 통한 민족교육도 불가능해졌다.
민족반항과 형식적 문화정치란 한일합병 후 조선인의 민족독립운동을 막기 위해 헌병과 결찰에 의한 철저한 무단 정치를 말한다. 조선 독립을 추구하는 민족 운동과 언론, 출판, 결사의 자유는 그들의 무단정치 아래에 말살 당하였으며 구국을 위한 민족 교육운동도 封鎖당하였다. 일본의 조선의 지배를 위한 만행은 조선인의 排日관념을 더욱 추진했으며 결국 조선인의 민족 각성을 助長하였다. 결과적으로 1919년 3월에 전국을 뒤덮은 반일 만세시위운동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조선인의 민족적 반항은 일본으로 하여금 조선통치에 대한 정책상의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고 교육면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하지만 형식적으로는 문화정치를 표명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려고 한 의도가 더욱 강하게 음성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1922년 공파된 2차 조선교육령을 살펴보면 문화정치는 전의 무단통치보다 더 가혹한 통치방법이었다. 文化의 기능은 사회적으로 보아 同化作用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2차 교육령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한국 신교육의 발전연구>. 손인수외. p. 33
1, 동일한 교육제도와 교육기간을 확충함으로써 일본식 교육을 강화하여 만족 사상을 일본화 내지 말살 하려는 데 있었다.
2, 전체 내용은 교육 목적이 일본어의 습득에 있었다.
3, 한국어와 일본어를 같이 필수과목으로 하기는 했으나, 일본어와 일본역사를 주입 강요하여 한국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歪曲敎授함으로써 민족의식을 말살코자 하였다.
4, 교육령은 제도상 한국의 교육제도를 일본 내의 교육제도와 동일하게 하였다고 했으나, 사범학교만 인정하였지 고등사범학교의 제도는 두지 않았다. 신교육령에서 대학의 설치를 규정함으로써 우리에게 대학교육이 트인 것처럼 가장했다.
3·1운동을 거쳐 소위 ‘문화주의’라는 것을 내걸고 한국인들에게 교육의 선심을 베푸는 것으로 내외에 선전하였으나, 한국인의 교육기회를 크게 늘어난 것도 없으며, 이 교육이라는 것은 ‘ 일본인화’였으므로 여전히 식민통치의 수단이었을 뿐이다. 일본의 조선지배에 있어서 가장 강력한 장애는 조선인의 민족정신에 의한 排日사상이었다.
황민화를 위한 최종 교육이란 중국침략전쟁의 전시체제와 관련하여 한국을 ‘大陸經營의 兵站基地’로 간주한 것이다. 이 시기는 한국인 “아동으로 하여금 황국신민다운 自覺을 振起하여 皇民扶翼의 도를 투철하게 함”을 목적으로 3차 교육령이 개정되었다. 일본인과 한국인 학교를 각각 구별하여 호칭하던 학교의 명칭이 통일되고 교과서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동일한 것을 사용하게 하였다. ‘內鮮一體’라는 개념을 슬로건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1943년 일본의 침략전쟁의 패배를 계기로 황민화교육을 더욱 강화하여 학교교육을 전면적으로 군사목적에 봉사시키기 위해서 4차 교육령을 개정하였다. 즉, 한국인 청소년으로 하여금 침략전쟁에 동원하여 청소년의 육체, 지식, 기술 등을 전면적으로 이용하려 하는 것이다. 이 시기의 황민화교육의 구체적인 실천내용은 군사체제화였다. 생산과 防衛의 수단으로 학생을 동원시켰고 학교교육의 기능을 정지시켰다.
총체적으로 1905년부터 1945년 사이에 일제는 한국에서 초기에는 통감부를 통해서 식민지주의교육을 扶植했고 한국 强占 후에는 식민지주의교육을 본격적으로 자행하여 한국인으로 하여금 일본인의 亞流가 되게 하였다. 한국어·한국사·한국도덕 등을 말살 파괴하는 한편, 일본어의 普及과 일본문물 내지 일본식의 德目의 移植, 그리고 저급의 실업교육을 보급시킴으로써 일본에의 이속의식을 한국인에게 助長시키려 했고, 그들의 使役人을 기르려 했다. 그 같은 교육정책은 일본식민지주의교육의 基軸적 특징인 동화주의와 차별주의를 전제로 한 일본어중심주의와 適應主義에 수반된 實科주의에 의한 것이었다. 이상과 같은 일제의 대한국식민지주의 교육의 기조는 扶植期의 ‘한국교육의 근대화’·‘문명적 교육’, 한국강점 후의 ‘충량한 일본국민’·‘내선일체’·‘內地準據’·‘황국신민화’ 등의 슬로건과 함께 간단없이 강력하게 자행되었던 것이다. <일제의 대한국식민지교육정책사>. 정재철.p.152
★ 결론
계급이 없는 원시사회부터 귀족사회인 고대사회, 양반과 서민 그리고 천민으로 신분이 다양화된 조선시대, 신분제가 타파되기 시작하면서 근대화가 된 식민지시대까지의 사회 변천 과정에는 그 속에 내제한 독자적인 교육제도가 있었다. 원시사회는 사회의 일상 생활 속에 비제도적인 형식으로 무의식적인 내제화의 방식을 통해 사회화에 필요한 교육이 이루어졌고, 고대사회는 계급사회고 진행되면서 통치자들의 교육철학을 바탕으로 통치체제의 유지와 강화의 필요에 따라 그에 적합한 내용, 즉 유교사상에 입각한 교육이 제도적으로 이루어졌다. 중세 사회는 신분제도가 다양화되면서 교육제도 역시 다양해 졌는데 그 내용은 기존의 유교적 사상에 입각한 것이었으며, 주자학에 근본한 성리학적 세계관이 교육은 물론 사상과 문화, 정치 등 사회 전반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근대사회에 들어오면서 일제는 식민지 통치를 위해 교육을 도구화하였는데 그 목적은 민족정신과 문화의 말살에 있었으나 한민족의 투쟁과 2차세계대전 등의 내외적 사회요인에 의해 실패로 끝났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각 시대는 이전 사회의 문화를 내제한 가운데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며 정치와 기타 사회제도를 다양화시키며 발전해 나갔으며 그 속에는 또한 그 시대에 대응할 수 있는 독자적인 교육제도가 존재하였다. 그러나 교육제도가 아무리 개성적인 형태를 지녔다할지라도 그 목적이 사회화에 필요한 정보를 습득하게 하는 것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것이 만고의 진리가 아니겠는가.
참고자료:
<한국교육2000년사>. 한국청년문화연구소. 1982.
<한국사회사연구>. 김귀옥외. 2003.
<교육사회학>. 김신일. 1996.
<일제의 대한식민지교육정책사>. 정재철. 1985.
<한국 신교육의 발전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조선교육사>. 이만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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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2페이지
  • 등록일2007.03.26
  • 저작시기2006.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0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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