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미학 - 아마데우스 상호 텍스트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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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죽음의 미학 - 아마데우스 상호 텍스트성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들어가며
- 신의 아들 아마데우스는 죽었다. 그리고 음악으로 다시 태어났다.

2. 본론
1.‘죽음’을 둘러싼 상호 텍스트성
(1) ‘비범’의 광채를 위한 ‘평범’의 죽음
(2) 영화에 ‘생명’을 주는 ‘죽음’
① 주(主)의 죽음
② 헐리우드의 죽음
2. 죽음의 미학
(1) 신의 죽음 - 신을 사랑한 자와 신이 사랑한 자
(2) 자아의 죽음 - 또 다른 자아, 모차르트
(3) 어머니의 죽음 - 한줄기 빛처럼
(4) 사랑의 죽음 - 순수의 아픔
(5) 아버지의 죽음 - 꿈의 실현 vs 꿈의 자유
(6) 천재의 죽음 - 갈등과 상처
(7) 전통의 죽음 - ‘다름’에 대해서
(8) 모차르트의 죽음 - 희망의 열쇠, 죽음
(9) 살리에르의 죽음 - ‘비범’을 인정한 ‘평범’ 짧은 화해, 영원한 결별
(10) 영화 『아마데우스』의 죽음 - 존재의 질실한 목표

3. 나오며
- 죽음. 그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에 대해서
(1) 감상 - ‘나’의 발전을 위한 끝없는 ‘나’의 죽음
(2) 죽음 - END가 아닌 AND

4. 참고 문헌

본문내용

즉각적으로 보이는 감정이고, 질투는 천재에 대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한 후에 다가온다. 그래서 이성적이면서도 감성적인 상태가 혼합된 특성을 질투는 가지고 있다.
여기서 느낄 수 있는 또 하나의 결론은 어떤 재능에의 질투는 그 상대나 대상이 사라짐으로써 말끔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질투라는 감정에 대항하는 방법은 좀 더 자신의 재능을 개발시키고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훨씬 현명하다. 누구에게나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무엇을 각자는 가지고 있다. 살리에리는 굉장히 근면하고 진실한 사람이다. 영화의 전반부에 나오는 살리에리의 어린 시절 장면에서 그것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신을 음악으로 찬양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끊임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신에게 간구한다. 그리고 그는 피나는 노력 끝에 궁정악장이 된다. 살리에리는 그 자신만의 성실함과 노력으로 요셉 2세 왕으로부터 “당신은 우리나라와 나의 자랑이다.”라는 극찬을 받는다. 그의 노력을 많은 사람들과 왕으로부터 인정받게 된 것이다. 바로 이때 ‘천상에서 내려온 신동’모차르트가 등장한 것이다.
신의 창조물인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는 비교조차 될 수 없었다. 살리에리는 노력과 성실함으로 도저히 모차르트를 따라 갈 수 없다. 그런 사실을 여러 번 경험한 살리에리는 고통 속에 신에 대한 분노 및 적의를 품게 되었다. 그리고 모차르트를 파멸시키기 위해 온갖 음모들을 그는 꾸미기 시작한다. 질투의 감정이 악의 근원이 되고 마는 것은 그 감정을 느끼고 있기만 급급했던 자들의 나태함이다. 어쩔 수 없는 인간내면의 욕망이므로 그런 감정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 영화에서 살리에리는 신을 원망하며 모차르트에게 죽음을 선사하고 자신은 보다 더한 고통으로 생을 마감하고 있다. 살리에리는 마지막에 모차르트의 곁에서 레퀴엠의 완성을 돕는다. 그는 모차르트의 파멸을 그토록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임종을 지키며 그의 마지막 작품 완성을 그토록 갈구하면서 도왔을까? 그런 그가 모차르트의 죽음 앞에서 슬퍼한 이유는 무엇일까?
모차르트가 불러주는 대로 오선지에 옮겨 적은 살리에리는 평범한 자기 자신으로서 도저히 불가능한 천재성 앞에 경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는 평범한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된다. 아무리 노력해도 도달할 수 없는 그 천재성 앞에 그의 살기어린 독기와 질투심보다 그 위대한 신동의 창조성은 너무나도 경이로운 것임에 틀림없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제거시킬 수는 없었다. 결국 이 영화의 마지막은 평범이 비범을 인정하고 비범의 가치를 존중하는 것으로 결말짓는다.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질투라는 감정에 대항하는 현명한 방법은 그저 미워하고 질투하기 이전에 자신만의 그 무엇을 찾아내야만 한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이룰 수 없는 만민 천재의 평등 포퓰리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우리는 발전할 수 없다. 또 자신의 평범이 자신 탓인지 천재 때문이 아니라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겐 어떤 발전도 있을 수 없다. 모차르트의 음악적 재능이 영구불변의 음악을 작곡해 내는 이유로 인해 내가 명곡을 창조하지 못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살리에리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2) 죽음 - END가 아닌 AND
죽음은 인간에게 있어서 끝없이 맞서야 하는 두려움이자 환상이다. ‘죽음’의 사전적인 의미는 ‘생명을 잃다.’, ‘목숨이 끊어지다.’정도이다. 말하자면, ‘END’라는 뜻이다. END의 이미지는 어두움, 암흑, 두려움, 공포 등으로 대략 ‘끝’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서움이 짙게 깔려있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단어 하나가 함축하고 있는 이러한 의미는 단순한 사전적인 의미일 뿐이다. 그래서 두려운 것이고, 무서운 것이다.
죽음은 인간 사회의 ‘틀 파괴’이고, 인간 자체의 ‘한계 극복’이다. ‘죽음’은 우리 인간이 죽음에 대해 가지는 ‘두려움’이라는 사고 자체의 죽음을 강요한다. 그리고 죽음스스로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끝’이 아닌 ‘연속’을 선물한다.
죽어야 한다. 현실에 안주하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관념의 틀에 사로잡힌, 세계를 바로 보지 못하는 ‘나’는 죽어야 한다. END가 아닌 AND를 위해서 말이다.
죽음에는 미학이 있다. ‘죽음의 미학’이다. 우리는 ‘죽는 것’이 아니고, ‘돌아가는 것’이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밝혀서 살피고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죽음의 끝에는 ‘끝’이 아닌 시간의 연속이 있고, 공간의 연결이 있다.
모차르트가 말한 것처럼 죽음은 우리 존재의 진실한 목표이다. 그래서 행복의 문을 열어주는 열쇠가 되는 것이다. 그의 말처럼 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니다. 인생의 한 과정인 것이다. 그렇기에 두렵지 않은 것이고, 죽음이 ‘평생의 친구’처럼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죽을 것인가? 죽일 것인가? 죽으면 END가 될 것이고, 죽이면 AND가 된다. 내안에 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죽인다. ‘나’같지 않은 ‘나’를 죽인다. 그리고 발전과 행복을 위해 스스로 죽는 것이다. 죽음을 위한 죽음은 있을 수 없다. 죽음이 주는 존재의 진실한 목표를 위한 죽음이 되어야 한다. 죽음이라는 친구가 주는 불안전하고 불명확한 인생의 참맛을 알아가는 것 또한 행복일 것이다.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죽음을 인식할 수 있는 것에, 죽음이 주는 연속의 가능성에 감사한다.
◈ 참고 문헌 ◈
◆ 『 아마데우스 』 피터 셰퍼 / 신정옥. 명지대. 범우사.
◆ 『 영화 <아마데우스> 연구 - 작품 속 두 주인공의 관계에 대해 』 조창현. 중앙대학교
◆ 『 아마데우스 - 인간 심리의 이해 』 홍승재. 한신대학교.
◆ 『 영화 <아마데우스>에 나타난 문학적 상상력의 조화 』 조회경. 성결대학교
◆ 『 모차르트를 둘러싼 모험 』 장정일
◆ 『 <아마데우스>의 영상화 』 강석진. 항공대학교
◆ 『 뒤바뀐 ‘모차르트’와 ‘살리에르’ 』 김성장
◆ 『 계몽주의와 모차르트』 홍세원. 한국음악학회
◆ 『 모차르트 : 천재의 사회학 』 최정호
◆ 『 모차르트의 레퀴엠 』 강석희
◆ 『 <아마데우스> 신과 계몽과 낭만 사이 』 김성제.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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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4.07
  • 저작시기20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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