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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자를 살리기도 했으며(20:7-12), 귀신을 쫓아내기도 했고(16:18),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있던 자를 기도와 안수로 고치기도 했다(28:8-9). 그래서 사람들은 바울을 가리켜 “그는 신이다”고 말하기도 했고(28:3-6, 14:8-10), 그래서 바울의 몸에 닿았던 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앓는 사람에게 대기만 해도 병이 물러가고 귀신이 나갔다(19:12). 그러나 실제로 바울 서신들에 의하면 바울은 전혀 그런 이적 행사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바울 자신은 자신이 행한 이전에 대해 언급한 경우도 별로 없다.
둘째로,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은 훌륭한 웅변가였다. 그래서 유대인과 이방인들 앞에서 그리고 로마 총독과 관리들 앞에서 자신 있게 손짓까지 해가며 여유 있게 사람을 설득시키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바울은 자기 자신도 인정했듯이 말에 능한 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고린도에 있는 바울의 적대자들도 “바울의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차지만 직접 대해 보면 그는 약하고 말하는 것도 별것 없다”(고후 10:10)고 말했었다.
셋째로, 바울은 자기의 서신들 가운데서 자신의 사도권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갈 1:1, 2:8, 고후12:11 등). 그리고 자신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고 “사람을 통해서”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의 소명은 “사람을 통해서” 즉 아나니아를 통해서 이루어졌으며(9:17, 22:12-16) 누가가 예외적으로 행 14:4,1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사도라고 부른적이 있으나, 사도행전에서는 12제자만이 사도로 불리고 있다. 누가에게 있어 사도는 오직 주님의 부름을 받아 예수의 세례 때부터 그의 승천 때까지 그와 함께 살던 자여야 하며(행 1:21-22), 부활하신 주님과 먹고 마신 자들이며(행 10:41) 따라서 그들만이 사도로서 증인의 역할을 하는 자들이다.
넷째로,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은 로마의 시민일 뿐 아니라 “나면서부터 시민”이었음을 주장하고 잇따(22:25-29). 그리고 자기가 로마의 시민이란 사실을 밝힘으로써 빌립보 감옥에서 석방되기도 한다(16:39). 그러나 바울 서신들에서는 바울의 로마 시민권에 대한 언급이 한 번도 없다. 사도행전에 보면 예루살렘에서 바울은 천부장에게 자기가 로마 시민임을 밝혀 태장을 중지시켰는데(22:24-25) 고후 11:23-25에선 바울이 로마인의 손에 세 번이나 태장을 맞은 일이 언급되고 있다.
사도행전과 서신의 이런 차이들은 각각 역사적 사실을 보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학적 관심을 표명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누가는 예수와의 일치성을 강조하기 위해 바울을 위대한 이적 행사자, 혹은 훌륭한 설교자로 제시하고 있고 또한 로마를 향한 누가의 정치적 변증의 관심 때문에 바울을 로마의 시민으로 부각시키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점에서도 사도행전은 역사 기록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신학적 증거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김득중 저. 신약성서개론. 컨콜디아사, 1996. pp.112-128
그러나 사도행전의 저자는 바울의 선교 동료가 아니었으며, 따라서 사도행전 16장 이하에 나오는 “우리”라는 표현도 그가 바울의 선교여행에 동참한 것을 표현하는 것일 수는 없다는 점을 추론할 수 있다. 이러한 결론은 우리-구절에서 누가는 바울과 단지 잠시 동안만 함께 했었고, 따라서 충분히 알지 못했다고 주장함으로써 모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사도행전은 바울의 신학의 핵심적인 것들이나 역사적 상황들과는 많은 차이점들이 있기 때문에, 사도행전을 바울 자신에게 소급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더욱이, 저자는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의 여행 기간 동안, 그리고 로마 체류 동안 긴 시간을 바울과 함께 있었어야만 했을 것이다. 바울 신학에 대한 오해는, Eltester가 설명하려고 했던 것처럼, 누가가 바울의 동료였다는 근거 하에, 헬라인이었던 누가는 유대교에 근거한 바울의 신학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추측함으로써 설명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또는 사도행전의 사도 개념은 누가가 누가복음을 저술한 것에서부터 유래된 것으로, 즉 누가복음에서는 복음의 전통이 예수의 제자들에게서만 보장되는 것으로 보았다고 추측함으로써 설명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헬라인이라도, 그가 또한 바울의 개인적인 제자였다면, 사도회의에서 바울이 아무런 의무 부담도 갖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고, 누가복음의 저자도 바울의 제자였다면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주장과 예수의 죽음에 대한 바울의 생각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사도행전이 의사 누가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라고 하는 제 3의 주장도 아무 것도 입증하지 못한다. 사도행전은 그 헌사(1:1)에서 보듯이 책을 보급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므로 그 저자의 이름이 반드시 붙어있었을 것이라고 하는 주장에 대해서는 헌사는 어떤 경우에도 그런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며, 사도행전도 보편 대중, 즉 책 보급을 위한 의도를 가진 것일 수는 없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기 때문에 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많은 학자들의 반대 견해가 있기는 하지만, 사도행전은 바울의 동료에 의해서 쓰여졌을 리는 없고, 따라서 전통적으로 이야기되고 있는 의사 누가에 의해서도 쓰여졌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단락에 대한 설명으로서는 단지 두 가지 가능성들만 남아있다.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어떤 편집자가 어떤 자료로부터 “우리”라는 표현을 받아들였는지, 아니면 그가 자신에 관한 이야기 속에 그것을 삽입했을 것이다. 두 번째 가정은 가능성이 희박하다. 왜냐하면 저자가 자기의 보도를 목격자의 기록처럼 보이게 하고 싶었다면, “우리”라는 말을 그렇게 산발적인 방식으로 삽입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훨씬 더 가능성이 많은 것은, 그가 사용했던 자료 속에서 이미 “우리”라는 말을 발견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것은 특히, 사도행전 13-28 속에 기본 자료로서 여행 이야기가 들어있다는 가정에 대한 합리적인 근거만 있다면, 더욱 가능하다. W. G. 큄멜 저. 신약정경개론. 박익수 역.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8, pp.177-189
둘째로,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은 훌륭한 웅변가였다. 그래서 유대인과 이방인들 앞에서 그리고 로마 총독과 관리들 앞에서 자신 있게 손짓까지 해가며 여유 있게 사람을 설득시키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바울은 자기 자신도 인정했듯이 말에 능한 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고린도에 있는 바울의 적대자들도 “바울의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차지만 직접 대해 보면 그는 약하고 말하는 것도 별것 없다”(고후 10:10)고 말했었다.
셋째로, 바울은 자기의 서신들 가운데서 자신의 사도권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갈 1:1, 2:8, 고후12:11 등). 그리고 자신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고 “사람을 통해서”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의 소명은 “사람을 통해서” 즉 아나니아를 통해서 이루어졌으며(9:17, 22:12-16) 누가가 예외적으로 행 14:4,1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사도라고 부른적이 있으나, 사도행전에서는 12제자만이 사도로 불리고 있다. 누가에게 있어 사도는 오직 주님의 부름을 받아 예수의 세례 때부터 그의 승천 때까지 그와 함께 살던 자여야 하며(행 1:21-22), 부활하신 주님과 먹고 마신 자들이며(행 10:41) 따라서 그들만이 사도로서 증인의 역할을 하는 자들이다.
넷째로,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은 로마의 시민일 뿐 아니라 “나면서부터 시민”이었음을 주장하고 잇따(22:25-29). 그리고 자기가 로마의 시민이란 사실을 밝힘으로써 빌립보 감옥에서 석방되기도 한다(16:39). 그러나 바울 서신들에서는 바울의 로마 시민권에 대한 언급이 한 번도 없다. 사도행전에 보면 예루살렘에서 바울은 천부장에게 자기가 로마 시민임을 밝혀 태장을 중지시켰는데(22:24-25) 고후 11:23-25에선 바울이 로마인의 손에 세 번이나 태장을 맞은 일이 언급되고 있다.
사도행전과 서신의 이런 차이들은 각각 역사적 사실을 보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학적 관심을 표명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누가는 예수와의 일치성을 강조하기 위해 바울을 위대한 이적 행사자, 혹은 훌륭한 설교자로 제시하고 있고 또한 로마를 향한 누가의 정치적 변증의 관심 때문에 바울을 로마의 시민으로 부각시키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점에서도 사도행전은 역사 기록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신학적 증거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김득중 저. 신약성서개론. 컨콜디아사, 1996. pp.112-128
그러나 사도행전의 저자는 바울의 선교 동료가 아니었으며, 따라서 사도행전 16장 이하에 나오는 “우리”라는 표현도 그가 바울의 선교여행에 동참한 것을 표현하는 것일 수는 없다는 점을 추론할 수 있다. 이러한 결론은 우리-구절에서 누가는 바울과 단지 잠시 동안만 함께 했었고, 따라서 충분히 알지 못했다고 주장함으로써 모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사도행전은 바울의 신학의 핵심적인 것들이나 역사적 상황들과는 많은 차이점들이 있기 때문에, 사도행전을 바울 자신에게 소급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더욱이, 저자는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의 여행 기간 동안, 그리고 로마 체류 동안 긴 시간을 바울과 함께 있었어야만 했을 것이다. 바울 신학에 대한 오해는, Eltester가 설명하려고 했던 것처럼, 누가가 바울의 동료였다는 근거 하에, 헬라인이었던 누가는 유대교에 근거한 바울의 신학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추측함으로써 설명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또는 사도행전의 사도 개념은 누가가 누가복음을 저술한 것에서부터 유래된 것으로, 즉 누가복음에서는 복음의 전통이 예수의 제자들에게서만 보장되는 것으로 보았다고 추측함으로써 설명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헬라인이라도, 그가 또한 바울의 개인적인 제자였다면, 사도회의에서 바울이 아무런 의무 부담도 갖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고, 누가복음의 저자도 바울의 제자였다면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주장과 예수의 죽음에 대한 바울의 생각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사도행전이 의사 누가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라고 하는 제 3의 주장도 아무 것도 입증하지 못한다. 사도행전은 그 헌사(1:1)에서 보듯이 책을 보급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므로 그 저자의 이름이 반드시 붙어있었을 것이라고 하는 주장에 대해서는 헌사는 어떤 경우에도 그런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며, 사도행전도 보편 대중, 즉 책 보급을 위한 의도를 가진 것일 수는 없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기 때문에 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많은 학자들의 반대 견해가 있기는 하지만, 사도행전은 바울의 동료에 의해서 쓰여졌을 리는 없고, 따라서 전통적으로 이야기되고 있는 의사 누가에 의해서도 쓰여졌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단락에 대한 설명으로서는 단지 두 가지 가능성들만 남아있다.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어떤 편집자가 어떤 자료로부터 “우리”라는 표현을 받아들였는지, 아니면 그가 자신에 관한 이야기 속에 그것을 삽입했을 것이다. 두 번째 가정은 가능성이 희박하다. 왜냐하면 저자가 자기의 보도를 목격자의 기록처럼 보이게 하고 싶었다면, “우리”라는 말을 그렇게 산발적인 방식으로 삽입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훨씬 더 가능성이 많은 것은, 그가 사용했던 자료 속에서 이미 “우리”라는 말을 발견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것은 특히, 사도행전 13-28 속에 기본 자료로서 여행 이야기가 들어있다는 가정에 대한 합리적인 근거만 있다면, 더욱 가능하다. W. G. 큄멜 저. 신약정경개론. 박익수 역.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8, pp.177-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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