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림1(조광조 편)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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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유림1(조광조 편)을 읽고...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목 차

서. 들어가면서

본. 왕도(王道)
제1장 천인무간
제2장 기묘사화
제3장 지치주의
제4장 문정공

결. 끝맺음

본문내용

종에 의해서 등용된 인물로 향약보급운동, 반정공신위훈 삭제, 현량과 실시 등 각종 개혁정치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개혁의 내용이 지나치게 급진적이어서 훈구대신들이었던 남곤, 심정들이 정치적 반격이라 할 수 있는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이 사화로 조광조는 전라도 능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선조 때 영의정으로 높임을 받고, 문정공이란 시호를 받았다. 심곡서원은 사당과 강당만으로 이루어진 조선 후기의 소규모 서원이지만 상당히 짜임새가 있다고 한다.
심곡서원을 보면 사액이란 글씨가 분명히 양각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임금 효종으로부터 사액된 편액됨이 분명한 것이다. 효종은 친필로 사액하여 내림으로써 정식으로 조광조의 복원을 조광조 사후 130년만에 만천하에 공표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오랫동안 역적으로 몰려 있던 조광조에 대한 사액을 내린 것을 보면 효종이 얼마나 자주정신에 투철하였던가를 알 수 있다. 효종은 ‘심곡서원’ 이란 사액을 직접 내렸을 뿐 아니라 예조좌랑 채지연을 직접 이곳까지 보내어 조광조의 영령 안에 제사를 지내도록 명령하는 등 각별한 신경을 써주었다.
학포 양팽손은 조광조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인연을 맺고 있었다. 조광조의 시신을 고향 앞 골짜기에 가매장하여 들짐승의 밥이 되지 않도록 하였을 뿐 아니라 이듬해 봄 조광조의 시신을 심곡서원까지 운구하였던 은인이다. 두 사람이 최초로 인연을 맺은 것은 1506년 중종 원년 양팽손의 나이 19세가 되던 해였다. 이 무렵 조광조는 이곳에서 학문에 정진하고 있었는데, 도가 지나쳐 ‘사람들은 선생이 하는 것을 보고 어떤 사람은 미치광이라 칭하고 어떤 사람은 재앙의 근원이라 칭하여 친구들이 간간히 끊어지기도 했으나 선생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도 하였다’ 고 기록하고 있을 정도였다. 친구들마저 찾아오지 않을 정도로 미친 사람처럼 학문에 열중하던 조광조에게 여섯 살이나 어린 양팽손은 소문을 듣고 조광조를 찾아간다. 이처럼 양팽손은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있던 조광조를 불원천리하고 능성에서 용인으로 찾아간 봉우였으며, 마침내 조광조가 진사시험에 방수되고 양팽손이 생원시험에 일등으로 합격한 후에도 두 사람은 서로 강론하고 질의하여 빠진 날이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각별한 사이였기에, 역적죄로 사사된 죄인의 시신은 함부로 수습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양팽손은 조광조의 시신을 홀로 염하고 매장한다. 그뿐 아니라 날이 따뜻해지자 조광조의 체백을 용인에 보내 장례를 치르도록 하였던 것이다.
결. 끝맺음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서, 한 짝은 검고 한짝은 흰 태사혜의 신발을 마지막으로 선물해 준 갖바치의 참위를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조광조는 여전히 한짝은 검고, 한짝은 흰 가죽신을 신고 있는 것이다. 500년이 흐른 지금도 그는 여전히 짝짝이의 신발을 신고 있는 것이다. 조광조를 자신이 검은 신을 신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은 조광조 역시 검은 신을 신었다고 할 것이며, 스스로를 흰 신을 신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은 조광조 역시 흰 신을 신었다고 할 것이다. 이렇듯 자신의 이념이나 이기주의에 의해서 조광조는 아직도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정암 조광조.
그는 정명주의를 바탕으로 왕도국가를 세우려 했던 뛰어난 개혁정치가였다. 그는 공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공자의 입으로 말을 하고, 공자의 귀로 소리를 듣고, 공자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다. 공자조차 이루지 못한 왕도정치를 권력에 접목시키려 했다.
결론적으로 그의 사상은 수렴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숙명적일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지치의 이상에 가장 적합한 대안들을 제시하려했다. 그의 개혁사상이 결코 후퇴된 것이 아니었으며 사회적인 혼란이 그의 개혁정치의 실패요인이지 그의 사상은 온건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성리학적인 이념아래 군왕의 중요성을 항시 강조하였고 이는 조선사회를 전개하는 커다란 중추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광조가 하고자 했던 백성을 위한 개혁들, 왕도정치, 유교사상과 정신은 후대에도 길이 남을 것이다.
두서없이 시작한 글을 쓰면서 조광조라는 우리나라 최고의 개혁정치가에 대해서 조명해 볼 수 있었고 나 자신에게도 많은 도움이 된 것 같다. 다가오는 5.31일은 지방선거가 있는 날이다. 공명정대한 선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고 더 나아가 조광조와 같은 ‘마음으로 정치’ 를 하는 위대한 개혁정치가가 나와서 이 어려운 현실을 조금이나마 개혁해 나갔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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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07.05.20
  • 저작시기2006.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10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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