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32
-
33
-
34
-
35
-
36
-
37
-
38
-
39
-
40
-
41
-
42


본문내용
의식개발에 주력하던 크리스챤아카데미는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이 활성화되면서 의식화 교육의 배후세력으로 지목되었고 결국 4월 16일 크리스챤아카데미 간사들이 용공혐의로 대거 구속되었다.
5
5
안동농민회 오원춘 사건
1979년 5월 5일 오원춘은 신원을 알 수 없는 2명에게 폭력적으로 납치되어 울릉도에 감금되었다가 5월 19일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납치사실을 교회에 보고하기까지 상당한 위협을 느꼈던 오원춘은 6월 13일 농민운동을 위해 진실을 밝혀야겠다는 양심선언을 하게 되었다. 이에 안동교구는 7월 17일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통하여 전국에 폭로하게 되었고 오원춘 사건에 대한 경찰의 답변을 요구하는 농성을 벌였다.
8
11
YH노조 사건
YH노조의 임금인상노사협의회 소집 요구에 회사가 직장 폐쇄로 답하자 노조 기숙사와 신민당사에서 농성한 사건.
조합원들은 회사정상화 요구가 받아들여질 때까지 농성을 계속할 것을 결의, 신민당은 보사부장관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것을 요청하는 등 중재노력을 하였지만 정부와 경찰은 어떤 약속도 전제하지 않은 채 무조건 해산을 요구하였다. 이때부터 YH 사태는 정부의 보도제재에도 불구하고 쟁점화되고, 이를 계기로 반유신투쟁의 힘을 모아가기 시작하자, 경찰은 8월 11일 새벽을 기해 ‘101호 작전’이라는 명칭 아래 마치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강제해산에 돌입하였다. 경찰의 무차별적인 폭력 진압의 과정에서 김경숙 노동자(당시 21세)가 목숨을 잃고, 조합원 대다수와 신민당에 남아 있던 30여 명의 신민당 당직자들과 국회의원, 그리고 기자들까지도 동맥이 끊기고, 코뼈가 부러지는 등의 무자비한 폭행을 당했다.
10
9
남민전 사건
경찰은 1979년 10월 9일, 16일, 그리고 11월 13일 3차례에 걸쳐 ‘남조선민족해방전선’사건의 수사진행 상황을 대대적으로 발표하여, 관련자 78명 가운데 자수 2명을 포함, 모두 74명을 검거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이들은 무장남파간첩도 아니며, 남파간첩과 접선하거나 고정간첩이라는 증거도 없으나, 단순한 ‘반체제’라고 보기는 어려운, 자생적 공산주의, 또는 공산주의 찬양조직이라고 설명하였다. 이 조직은 자금조달을 위해 ‘작전’명칭을 붙인 강도사건을 모의, 78년 12월부터 79년 4월까지 대낮에만 돈이 많은 사장집을 털거나 금방을 털기로 하여 그중 2건은 실행에 옮겼다고 하였다.
10
16
부마항쟁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부산과 마산의 학생, 시민들이 전개한 반독재민주화투쟁. 항쟁의 발단은 10월 16일 부산대 구내 도서관 앞에서 학생들이 ‘민주구국선언문’ 발표 등 반정부 시위를 한 것을 필두로, 이후 시민들이 합세한 대규모 반정부시위로 전개되었다. 시위대는 16일과 17일 이틀 동안 정치탄압 중단과 유신정권 타도 등을 외치며 파출소,경찰서,도청,세무서,방송국 등을 파괴하였고, 18일과 19일에는 마산 및 창원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이에 정부는 18일 0시 부산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1천58명을 연행,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하였으며, 20일 정오 마산 및 창원 일원에는 위수령을 발동하고 군을 출동시켜 5백5명을 연행하고 59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하였다. 시위는 진정되었으나, 유신정권 몰락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마침내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대통령 박정희가 암살됨으로써 유신체제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10
26
박정희 피살
10
27
비상계엄 발동
12
12
12.12 군사반란
1980
1
29
서울법대 동문 정교회 사건
서울법대 동문들의 친목단체인 정교회 회원들이 책을 읽고 토론한 것을 문제 삼아 회원을 연행, 반국가단체로 구속한 사건.
4
10
대학생 입영집체훈련 반대(거부) 농성·시위
대학생이 '계엄철폐'와 '유신잔재 청산' 등의 민주화의 이행을 요구하며 병영집체훈련을 거부한 사건
5
2
대학생 계엄철폐 가두시위
1980년 5월 2일 서울대에서는 입영집체훈련에 응소키로 하고 진행하기로 한 민주화 대행진에 1만 2천여 명의 전교생으로 확대, 이중 3천여 명이 철야농성을 진행하였고 고대, 충남대, 충북대, 경북대, 전북대 등에서도 시위와 농성을 진행함. 이후 각지에서 계엄철폐 가두시위가 5월 16일까지 진행됐다.
5
17
전국대학총학생회장단 연행 사건
5월 16일 오후 5시 30분부터 전국 55개 대 학생대표 95명이 이화여대에 모여 제1회 전국대학총학생회장단 회의를 개최하였다. 5월 16일 가두·교내시위를 일단 중단하기로 결정한 후, 향수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회의를 진행하던 중, 수백 명의 기동대원들이 이대에 난입하였다. 회의장을 급습하여 하여 18명의 학생회 간부들을 체포하였다. 24시 계엄확대와 더불어 공수부대가 각 대학에 진입하였고, 남아있는 학생들은 무차별 연행했으며 동시에 합동수사본부요원들이 학생회 간부와 복학생들의 집으로 들이닥쳐 무조건 체포하였다.
5
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5
18
광주 민주화 운동
광주에서는 비상계엄확대 소식을 듣고 18일 아침에 전남대 교문 앞에 대학생 200여명이 모였으나, 공수부대의 과잉 진압으로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자 학생들은 광주 도심지로 옮겨 시위를 벌였고, 공수부대는 곤봉과 대검으로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19일에는 계엄군의 만행에 분노한 광주 시민들이 학생시위에 동참하여 5.18민주화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20만 명 이상의 광주 시민이 시위대를 형성 시청을 접수하고, 차량시위를 벌이며 편파방송을 하던 광주MBC를 불태우는 등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고, 계엄군의 발포에 대항해 예비군 부대 무기고에서 총을 꺼내 무장을 함으로써 시위는 시가전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일부 시민들은 차를 몰고 광주 외곽지역으로 나가 광주의 진상을 전했다. 계엄군은 광주 시민에게 무자비하게 발포하고, 광주 외곽으로 나가는 도로를 점령하고 이곳을 지나는 양민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일시 외곽으로 빠졌던 계엄군은 26일부터 대대적인 진압 작전에 나서 광주 시내로 진격, 27일 새벽 상황실에서 끝까지 싸우던 시민군 대부분을 사살하고 도청을 접수하면서 열흘간의 항쟁은 막을 내렸다. 정부공식 발표 사망 191명, 부상자 852명이었다.
5
5
안동농민회 오원춘 사건
1979년 5월 5일 오원춘은 신원을 알 수 없는 2명에게 폭력적으로 납치되어 울릉도에 감금되었다가 5월 19일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납치사실을 교회에 보고하기까지 상당한 위협을 느꼈던 오원춘은 6월 13일 농민운동을 위해 진실을 밝혀야겠다는 양심선언을 하게 되었다. 이에 안동교구는 7월 17일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통하여 전국에 폭로하게 되었고 오원춘 사건에 대한 경찰의 답변을 요구하는 농성을 벌였다.
8
11
YH노조 사건
YH노조의 임금인상노사협의회 소집 요구에 회사가 직장 폐쇄로 답하자 노조 기숙사와 신민당사에서 농성한 사건.
조합원들은 회사정상화 요구가 받아들여질 때까지 농성을 계속할 것을 결의, 신민당은 보사부장관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것을 요청하는 등 중재노력을 하였지만 정부와 경찰은 어떤 약속도 전제하지 않은 채 무조건 해산을 요구하였다. 이때부터 YH 사태는 정부의 보도제재에도 불구하고 쟁점화되고, 이를 계기로 반유신투쟁의 힘을 모아가기 시작하자, 경찰은 8월 11일 새벽을 기해 ‘101호 작전’이라는 명칭 아래 마치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강제해산에 돌입하였다. 경찰의 무차별적인 폭력 진압의 과정에서 김경숙 노동자(당시 21세)가 목숨을 잃고, 조합원 대다수와 신민당에 남아 있던 30여 명의 신민당 당직자들과 국회의원, 그리고 기자들까지도 동맥이 끊기고, 코뼈가 부러지는 등의 무자비한 폭행을 당했다.
10
9
남민전 사건
경찰은 1979년 10월 9일, 16일, 그리고 11월 13일 3차례에 걸쳐 ‘남조선민족해방전선’사건의 수사진행 상황을 대대적으로 발표하여, 관련자 78명 가운데 자수 2명을 포함, 모두 74명을 검거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이들은 무장남파간첩도 아니며, 남파간첩과 접선하거나 고정간첩이라는 증거도 없으나, 단순한 ‘반체제’라고 보기는 어려운, 자생적 공산주의, 또는 공산주의 찬양조직이라고 설명하였다. 이 조직은 자금조달을 위해 ‘작전’명칭을 붙인 강도사건을 모의, 78년 12월부터 79년 4월까지 대낮에만 돈이 많은 사장집을 털거나 금방을 털기로 하여 그중 2건은 실행에 옮겼다고 하였다.
10
16
부마항쟁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부산과 마산의 학생, 시민들이 전개한 반독재민주화투쟁. 항쟁의 발단은 10월 16일 부산대 구내 도서관 앞에서 학생들이 ‘민주구국선언문’ 발표 등 반정부 시위를 한 것을 필두로, 이후 시민들이 합세한 대규모 반정부시위로 전개되었다. 시위대는 16일과 17일 이틀 동안 정치탄압 중단과 유신정권 타도 등을 외치며 파출소,경찰서,도청,세무서,방송국 등을 파괴하였고, 18일과 19일에는 마산 및 창원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이에 정부는 18일 0시 부산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1천58명을 연행,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하였으며, 20일 정오 마산 및 창원 일원에는 위수령을 발동하고 군을 출동시켜 5백5명을 연행하고 59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하였다. 시위는 진정되었으나, 유신정권 몰락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마침내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대통령 박정희가 암살됨으로써 유신체제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10
26
박정희 피살
10
27
비상계엄 발동
12
12
12.12 군사반란
1980
1
29
서울법대 동문 정교회 사건
서울법대 동문들의 친목단체인 정교회 회원들이 책을 읽고 토론한 것을 문제 삼아 회원을 연행, 반국가단체로 구속한 사건.
4
10
대학생 입영집체훈련 반대(거부) 농성·시위
대학생이 '계엄철폐'와 '유신잔재 청산' 등의 민주화의 이행을 요구하며 병영집체훈련을 거부한 사건
5
2
대학생 계엄철폐 가두시위
1980년 5월 2일 서울대에서는 입영집체훈련에 응소키로 하고 진행하기로 한 민주화 대행진에 1만 2천여 명의 전교생으로 확대, 이중 3천여 명이 철야농성을 진행하였고 고대, 충남대, 충북대, 경북대, 전북대 등에서도 시위와 농성을 진행함. 이후 각지에서 계엄철폐 가두시위가 5월 16일까지 진행됐다.
5
17
전국대학총학생회장단 연행 사건
5월 16일 오후 5시 30분부터 전국 55개 대 학생대표 95명이 이화여대에 모여 제1회 전국대학총학생회장단 회의를 개최하였다. 5월 16일 가두·교내시위를 일단 중단하기로 결정한 후, 향수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회의를 진행하던 중, 수백 명의 기동대원들이 이대에 난입하였다. 회의장을 급습하여 하여 18명의 학생회 간부들을 체포하였다. 24시 계엄확대와 더불어 공수부대가 각 대학에 진입하였고, 남아있는 학생들은 무차별 연행했으며 동시에 합동수사본부요원들이 학생회 간부와 복학생들의 집으로 들이닥쳐 무조건 체포하였다.
5
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5
18
광주 민주화 운동
광주에서는 비상계엄확대 소식을 듣고 18일 아침에 전남대 교문 앞에 대학생 200여명이 모였으나, 공수부대의 과잉 진압으로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자 학생들은 광주 도심지로 옮겨 시위를 벌였고, 공수부대는 곤봉과 대검으로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19일에는 계엄군의 만행에 분노한 광주 시민들이 학생시위에 동참하여 5.18민주화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20만 명 이상의 광주 시민이 시위대를 형성 시청을 접수하고, 차량시위를 벌이며 편파방송을 하던 광주MBC를 불태우는 등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고, 계엄군의 발포에 대항해 예비군 부대 무기고에서 총을 꺼내 무장을 함으로써 시위는 시가전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일부 시민들은 차를 몰고 광주 외곽지역으로 나가 광주의 진상을 전했다. 계엄군은 광주 시민에게 무자비하게 발포하고, 광주 외곽으로 나가는 도로를 점령하고 이곳을 지나는 양민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일시 외곽으로 빠졌던 계엄군은 26일부터 대대적인 진압 작전에 나서 광주 시내로 진격, 27일 새벽 상황실에서 끝까지 싸우던 시민군 대부분을 사살하고 도청을 접수하면서 열흘간의 항쟁은 막을 내렸다. 정부공식 발표 사망 191명, 부상자 852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