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자리 잡은 용계리의) 세시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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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잠깐 마을 보기

2. 한눈에 볼 수 있는 용계리의 세시풍속

3. 각 달에 행해지는 세시풍속

4. 불교세시

5. 기독교 세시

6. 여러 가지 종교들이 어울러져 만들어낸 용계리의 세시풍속

본문내용

우러진 검박골과 유교식으로 무장한 탁(卓)씨들과의 갈등과 교회마을의 기독교적인 이해부분에서의 갈등 또한 끌어안고 있는 마을이다.
용계리 이 마을은 어쩌면 625 사변 후 급격하게 변화해 갔던 우리의 종교의식의 갈등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기본적인 세시풍속은 아직도 미흡하게나마 남아있는데 이러한 세시풍속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더욱 종교세기적인 성격을 강하게 가지게 될 것이며 훗날에는 설, 추석 등 명절밖에 기억하지 못할 그러한 때가 오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과거의 모든 세시풍속지가 모두 과거의 농경의례에 걸맞게 짜여 있음에 변화하고 있는 세시풍속을 이 자료에 싣고자 고민하다가 각각의 마을 안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종교세시를 이 글에 싣게 되었다. 선행 자료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학생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주관하여 한 조사이므로 많은 미흡한 점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시풍속지가 언제까지 과거의 틀 속에서 움직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처음으로 마을의 세시풍속에서 종교세시를 실어봤고 우리는 정해진 궤도를 벗어나 새로운 길로 조심스럽게 한 발을 내딛었다고 생각한다.
7. 용계리마을 현지조사를 다녀와서.
-아침 6시에 마을로 가는 버스를 타고 오후 4시에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타다-
늦게 준비한 답사였다. 하루 이틀을 미루다보니 어느덧 머릿속에서 까마득히 잊혀 진 답사였다. 며칠을 남겨두고 처음으로 도서관에서 조원 전체가 모였다. 처음부터 어느 마을을 조사할 것인가 대해 몇 시간을 옥신각신 했다. 가까운 마을로 갈 것이냐 아니면 조금 멀리 떨어진 마을로 갈 것이냐. 유교적 성격이 강한 마을로 들어 갈 것이냐 아니면 민속적인 성격이 강한 마을로 들어 갈 것이냐. 그리고서야 묵계리와 용계리 두 마을로 의견이 수렴되었는데 여기에서도 우리는 많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묵계서원이 있는 묵계리로 갈 것이냐 아니면 당집이 남아있다는 용계리로 갈 것이냐. 이 두 마을은 성격이 너무나도 반대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신중을 기하기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찾아본 안동의 시군 마을지도에는 분명 용계리에는 당집이 있다고 표시되어 있었다.
우리는 드디어 결정을 내렸다. 당집이 있는 마을은 분명 세시풍속도 많이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한 믿음을 안고 우리 조원은 무작정 28번 버스를 탔다. 그제야 알았다. 용계리로 가는 버스는 하루에 딱 2대 뿐이라는 것을. 아침 6시에 마을로 들어가는 버스가 한 대 있고 오후4시 마을을 떠나는 버스가 한 대 있었다. 이렇게 두 대의 버스를 우리는 첫날이고 둘째 날이고 계속해서 탈 수 없었다.
첫째 날은 무작정 길안면 버스정류장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지나가는 마을 어른들께 물어물어 용계리의 위치를 파악 하였는데 우리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먼 곳에 용계리가 자리 잡고 있음을 알고 우리는 또 한 번의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젊음의 힘을 믿고 무작정 걸을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결국 버티고 버티다 어쩔 수 없이 차 한 대를 빌려 꼬깃꼬깃 쪼그리고 앉아 우리는 차를 타고 20분정도를 달려서 용계리에 도착 할 수 있었다.
천념기념물로 지정된 ‘용계은행나무’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그 크기와 높이를 보고 우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용계리는 ‘용계은행나무’의 뒤편의 꼬불꼬불한 산길을 따라 약 10분정도를 걷다보니 작은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곳에 자리 잡고 있는 가옥들이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만큼의 작은 숫자였고 그래서 일까? 마을의 분위기도 고요 그 차체였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구수2리를 지나 교회의 십자가가 보이는 마을이 용계리에 포함된 마을이었다. 이 두 마을들은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으며 버스로는 두정거장 이상의 거리이다.
첫날은 이장님을 만나 이 마을의 대체적인 정보를 듣고 주요 제보자를 파악하는데 힘썼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에 봉착했다. 대부분의 마을 어른들이 연세가 너무 많으셔서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을 제보자와의 만남 이전에 각각의 마을에서 중요한 직책을 담당하는 분들을 먼저 찾아뵙고 나머지 제보자들에게는 그 분들이 해주신 이야기를 확인 작업과 동시에 더 보충 할 내용을 찾고자 하였다.
둘째 날은 아침 7시20분에 배방방면에 가는 버스를 타고 그곳에서 무작정 내려 약 10KM 정도를 걸어 용계리에 도착하였다. 두 팀으로 나누어 조사를 시작하였는데 한 팀은 어제 잠시 살펴보았던 검박골에 들어갔고 또 한 팀은 교회마을에 들어가 현지조사를 시작했다. 서로간의 연락은 휴대폰으로 주고받았다.
조사를 하면서 알 수 있었던 용계리의 가장 큰 특징은 두 마을이 서로 다른 종교를 기반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이번 조사에서 종교세시를 시도하기로 결정하고 한 팀은 검박골과 깊은 연관성을 갖는 ‘천지암’ 절을 찾으려 예고도 없던 등산길에 올랐고 한 팀은 믿지도 않는 ‘아멘~’을 외치며 조사를 하였다.
처음 우리가 꿈꾸던 당집을 비롯한 세시풍속은 과거의 마을이 수몰되면서부터 완벽하게 사라졌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도서관에서 보았던 그 자료도 사실은 수몰 이전의 자료였던 것이다. 조사를 하면서 느낀 것이 현재 용계리에 남아있는 세시풍속은 여타의 마을과 크게 다를 바라가없는 평범한 그 자체였다. 그래서 우리는 이장님을 중심으로 한 용계리의 전통 세시풍속을 조사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용계리로 시집 온 할머니들의 세시풍속도 같이 조사하였다. 또한 세시풍속 때 행해지던 놀이와 음식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가장 중점을 둔 것이 검박골과 교회마을의 종교세시를 설명하는 부분이었다.
처음으로 2학년이 주체가 되어 부딪혀본 현지조사였다. 그래서 마을까지 가는대에도 많은 어려움이 따랐고 마을 안에서 조사를 하는 대에도 많은 좌절을 맛보아야했고 그 후 자료를 정리하고 글을 쓰는 대에는 많은 눈물과 노력을 들여야 했다.
이 답사지에 씌여 진 하나하나의 글들은 모든 조원들의 땀과 정성과 미숙함의 결정체 들이다. 이러한 경험이 진정한 민속학도가 될 수 있는 한걸음이라 생각하고 우리는 또 다른 마을을 꿈꾸며 2006년 2학기 세시풍속강의의 답사 보고서를 마칠까 한다.
  • 가격3,000
  • 페이지수28페이지
  • 등록일2007.07.31
  • 저작시기2006.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23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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