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평가자료]서태후의 삶과 그녀의 업적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우수평가자료]서태후의 삶과 그녀의 업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 론

2. 본 론
1) 서태후의 출생
2) 서태후의 생애
(1) 입궁에서 황태후
(2) 서태후와 자인태후
(3) 동치황제의 등극과 사망
(4) 광서황제의 옹립
(5) 서태후 광서황제의 대립과 서태후의 사망
(6) 서태후의 능의 위치
3) 서태후와 청말 개혁
(1) 양무운동과 번법운동
(2) 서태후의 개혁

3. 결 론

- 참 고 문 헌 -

본문내용

의 압력에 못이겨 신정의 방향을 입헌으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헌정개혁은 정치체제 중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타파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당시의 개혁에 상당한 혼란을 가져왔고, 서태후에게도 상당한 압력으로 작용하였다.
원래 후발 국가가 초기에 사회적 안정을 이루면서 현대화를 추진하려면 강력한 중앙집권제가 필요한데, 일본이 바로 그 선례라 할 수 있다. 일본은 1868년에 메이지유신을 시작하여 1889년에 『대일본제국헌법(大日本帝國憲法)』을 반포하기까지 20년이 걸렸다. 그러나 중국은 신정을 시행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다시 헌정개혁으로 전환하게 되었으니,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1906년 광서황제는 서태후의 명을 받들어 “예비방행헌정(預備倣行憲政)”을 선포하고 관제개혁에 착수하였다. 관제개혁은 행정과 사법의 상호 독립이란 기본 원칙을 전제로 쓸데없는 인력을 없애고 전문 인력을 배치하여 맡은 바 직무를 다하게 하는 것이었다. 관제개혁은 권력과 이익의 대대적인 조정으로 이어짐으로써 통치집단 내부의 혼란을 야기시켰다. 이로 인하여 관제개혁에 관한 진정서가 빗발치듯 날아들어 서태후를 심각한 고민에 빠뜨렸다. 관제개혁 중 가장 골치 아픈 문제는 중앙과 지방의 권한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청나라 정부에서는 본래 관제개혁을 통하여 지방관의 병권과 재정권을 흡수하려 하였으나 지방관들이 오히려 내각과 개국회(開國會)를 설치하여 중앙정부를 협박함으로써 중앙과 지방의 갈등이 더욱 심화되었다. 그 결과 관제개혁은 진퇴양난에 빠지고 말았다.
1908년 헌정 편사부(編査部)에서는 예비 입헌 사업 9개년 준비 계획서를 반포하였으며, 이와 동시에 서태후와 광서황제도 『예비 입헌사업 추진 9개년 준비 조칙(九年預備立憲逐年推行籌備事宜諭)』를 반포하였다. 그러나 그해 10월 73세 고령의 서태후는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으며, 그녀의 죽음으로 개혁은 구심점을 잃고 내분에 휩싸여 방황하다가 실패로 돌아갔다.
3. 결 론
서태후의 '혐의'를 벗겨 주기 위한 작업은 크게 3가지 각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 역사학자들의 언급을 근거로 이 3가지를 간략히 설명하기로 한다.
첫째, 중국 학자들은 "서태후가 아니었더라도 청나라는 이미 멸망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는 논지를 펴고 있다. 그들에 따르면, 15, 6세기 이래 유럽 경제의 발달과 신항로·신작물의 출현에 따라 유럽-미국-중국이 상호 연동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하였으며, 도광제(道光帝, 재위 1820~1850년) 시절에는 외국 쌀이 중국 시장을 교란하는 현상까지 나타났다고 한다. 그리고 건륭제(乾隆帝)의 총신(寵臣)인 화신의 농단으로 인해 이미 가경제(嘉慶帝, 재위 1796~1820년) 시기부터 청나라의 재정이 고갈되기 시작하였으며, 도광제 때에 이르러서는 무역적자까지 나타났다는 것이 그들의 언급이다. 이와 같은 점들을 근거로, 중국 학자들은 서태후의 사치 때문에 청나라가 재정위기를 겪은 게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둘째, 중국 학자들은 서태후의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녀가 태평천국(1851~1864년) 이후에 사회질서를 재건하였고, 유능한 한족 관료들을 중용하였으며, 양무운동(洋務運動)을 주도했다는 점 등을 강조하고 있다.
셋째, 중국 학자들은 서태후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한족 강경파들의 부정적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다. 청류파로 대표되는 한족 강경파들이 양무운동을 반대하고 또 신문물 수용을 반대함으로써 근대화 작업에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그리고 흔히 서태후의 발언으로 알려진 "내 나라를 이웃나라에 줄지언정 가노(家奴, 백성)들에게는 주지 않겠다"는 발언도 실제로는 일본에 망명 중이던 혁명파들의 입에서 나온 것일 뿐, 서태후가 실제로 그런 발언을 했다는 실증적 근거가 없다는 점도 강조되고 있다.
위와 같이, 19세기 후반의 40년 동안 중국을 풍미했던 권력자 서태후는 사후에 망국의 책임을 혼자 떠맡다시피 했다가, 죽은 지 100년 만에 명예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럼, 서태후가 이처럼 복권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최근 중국 역사학자들이 사료를 중심으로 치밀한 고증작업을 벌이고 있다. 종래에 별다른 근거도 없이 나돌던 서태후에 관한 '안 좋은 소문'들이 치밀한 작업을 통해 하나씩 시정되고 있다.
둘째, 한족 중심의 현 중국 정부가 만주족을 적극적으로 통합하려 하고 있다. 이 점은 다른 역사공정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만주족인 서태후의 이미지를 재조명함으로써 만주족의 '마음'을 사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만주족을 적극적으로 통합하려는 것이다.
셋째,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고 있다. 흔히 중국은 여성의 지위가 높은 나라라고 인식되고 있지만, 모든 영역에서 다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역사라는 영역에서는 중국 여성들도 차별을 받고 있었다. 측천무후가 690년에 세운 후주(後周)라는 나라가 정식 왕조로 인정되지 않는 데에서도 그 점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암탉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라는 속설은 흔히 여성의 정치 참여를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 점은 한국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개혁·개방 이후 중국 내에서 여성의 지위가 상승함에 따라, 역사 속의 여성에 대한 인식도 개선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제는 '청나라는 암탉 때문에 멸망한 게 아니라 수탉(한족 강경파) 때문에 멸망했다'는 인식상의 역전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중국 역사학자들이 조만간 '신상품'으로 내놓을 서태후는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나타날까. 역사상의 인물이 시대적·정치적 상황에 따라 매번 재창조를 거듭하는 것에 대중들은 과연 어떤 평가를 내릴지 주목된다.
- 참 고 문 헌 -
- 양백화 / 서태후 상,하 / 깊은샘 / 1988
- 신성곤 /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 서해문집 / 2004
- 김정미 / 역사를 이끈 아름다운 여인들 / 눈과 마음 / 2005
- 김은빈 / 한권으로 읽는 중국사 / 지경사 / 2006
- 펄벅, 이종길역 / 연인 서태후 / 길산 / 2003
- 김향 / 악녀의 세계사 / 가람기획 / 2000
  • 가격1,000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7.08.04
  • 저작시기2007.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23872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