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역사 5장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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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여왕이 황금, 보석, 조미료등 자신의 상품 견본을 가지고 솔로몬을 찾아 온 것이다.
c.구리산업
솔로몬의 수출에서 구리가 상당량을 차지했다. 솔로몬의 성전의 기구들을 제작하는데 많은 구리가 필요했다. 성경에는 이 기구들이 요단 계곡에 있는 주물공장에서 제조 되었다고 말한다(왕상 7:45f).
d.말과 병거의 무역
병거는 이집트로부터 한 대에 은 육백 세겔, 또 말은 길리기아로부터 한 마리에 은 백 오십세겔에 가져다가 인도하였다. 솔로모은 의심할 여지없이 자기 군대의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이 사업에 관여하게 되었다. 많은 병거와 말이 필요했는데 이스라엘은 병거를 만들지도 못하고 말을 기르지도 못했기 때문에 둘 다 모두를 수입해야 했다. 이집트는 훌륭한 병거를 제작했고 길리기아는 고대에 가장 좋은 말의 원산지였다. 솔로몬은 이집트와 수리아간의 모든 교역로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교역에서 중간상이 되었다. 길리기아의 말과 이집트의 병거는 그의 대리상을 통해서만 살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왕실의 독점 사업이었기 때문에 상당한 수입을 가져다 주었다.
3.이스라엘의 황금 시대
a.이스라엘의 경제적 번영
솔로몬이 무역 및 산업의 독점과 왕실 재산에서 얻은 수입으로 인해서 부유해지고 굉장한 부호가 되고 국가의 생활수준도 높아졌다. 솔로몬이의 사업들이 독점이라 해도 백성들에게 취업의 기회를 주었고 많은 사람들을 자극하였다. 도시들은 발전했고 새로운 도시들이 건설되었다.
b.솔로몬의 건설 활동: 성전
솔로몬의 부는 수많은 건설 사업에 활용되었다. 가장 주목할 것은 예루살렘성전이다.
성전은 당신 팔레스타인과 수리아 지방에 유행하던 양식을 본떠 두로 출신 건축가가 지었다. 성전은 두 가지의 목적을 충족시키는데 왕조의 성소, 즉 왕실의 예배당이었고 대제사장은 왕이 임명한 사람으로 내각의 각료가 되었다. 성전 부근에는 왕궁건물이 있었고 솔로몬의 궁도 있었다. 솔로몬궁을 건축하는데 13년이 걸렸다. 바로의 딸을 위한 궁도 있었다.
c.문화의 개화
문자의 사용이 널리 행해졌다. 고대 국가들은 외교 서신을 다루고 공식 기록 문서들을 보관하고 통상적인 행정을 처리하는 서기관들을 두었는데 솔로몬도 예외없이 많은 서기관들을 필요로 했다. 다윗 궁중사를 비롯한 구전되는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음악과 시와 영창(永唱)도 성행했다. 지혜문학도 성행하였는데 특히 솔로몬 자신이 잠언의 저자로 알려진다.
4.왕정의 부담
a.솔로몬의 재정 문제
솔로몬의 천재적인 모든 재능에도 불구하고 그가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이 너무 적었기 때문에 국가의 번영을 위한 탄탄한 토대를 마련할 수 없었다. 비용이 수입을 초과하였다. 지출은 늘어난 반면 조공으로부터 생긴 수입은 늘지 않았다. 무역을 통해 엄청난 이익을 얻었지만, 수입된 모든 품목 대신에 토산품들을 수출해야 했기 때문에 그 격차를 메울 수가 없었다.
b.솔로몬의 행정 구역
솔로몬은 세금을 부과하는 형식으로 자신의 신민(臣民)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안겨주었다. 솔로몬은 국가의 수입을 늘리는 것 외에도 한 걸음 더 나아가 의심할 여지없이 지파에 대한 충성심을 약화시키고 가나안족 주민들에게 조직 안에 더욱 철저하게 통합하여 권력을 휘어 잡으려고 했다.
c.그 밖의 재정 및 행정상의 조치들
만성적인 재정 궁핍과 자신의 수많은 건설 사업을 위해 노동력을 공급해야 할 필요성 사이에서 어쩔 줄 몰랐던 솔로몬은 백성들의 백성들을 원성을 산 '강제노역'에 의지하였다. 국가 노예제도와 국가를 위한 강제 노동은 고대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다윗이 피정복민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켰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마 그것을 당연한 일오 받아들였을 것이다. 솔로몬은 이 정책을 답습했고 팔레스타인의 가나안족 주민들에게 노예 인력을 요구함으로써 그 정책을 확대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충분치 않자 일반 백성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백성의 원성을 샀다. 게다가 아코만 부근의 국경에 인접해 있는 몇몇 성들을 두로 왕에게 할양 하는데, 이후로는 그 성들을 되찾지 못했고 백성들은 또 다시 절망해야 했다.
d.이스라엘의 내적 변혁
씨족의 유대는 지속되었고 열 두 지파 체제도 성례(聖禮)의 전통으로 존속되었지만 국가적 차원에서 지파들은 더 이상 지파의 구실을 하지 못했다. 지파들의 독립성이 끝난 것이다.
중앙 정부의 권위와 정치적 의무를 전혀 몰랐던 지파 사람들은 무거운 세금과 징병의 의무를 지고서 정부의 각 행정 구역으로 나뉘어 조직되었다. 솔로몬 시대에는 징병이 노동을 위한 징용으로 바뀌었다. 지파체제는 무너졌고, 종교도 왕권아래서 모든 생활이 집중되었던 현실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5.왕정의 신학적 문제점
a.다윗과의 언약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왕가에 불만을 품기도 했지만, 새로운 체제로 이익을 본 사람은 새로운 왕정체제의 지지자가 되었다. 다윗과 솔로몬의 업적은 눈부셨고 나라를 위하여 아주 많은 기여를 했기 때문에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진 일이고, 그들의 종교에서 말하는 아브라함과의 약속의 성취로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윗의 왕권에 관한 신학은 제왕시편들에서 볼 수 있다. 다윗의 왕권에 관한 신학을 고전적으로 표현한 것은 나단의 신탁(삼하 7:4-17)이다.
b.왕과 제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왕권은 일종의 성례적인 제도였다. 이 제도에는 신학적 제의적 토대가 있었다. 왕권에 관한 공식적인 개념은 제의를 통해서 정기적으로 재천명되었고 절기들의 의식(儀式)에서 왕은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여호와가 시온과 다윗을 선택했다는 것이 제의에서 강조되었다.
c.왕정과 긴장
왕정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를 기억할 수 있는 사람들, 왕정이 생겨난 경위를 목격한 사람들이 아직 생존해 있었고, 왕정은 이스라엘이 서로 엇갈린 평결을 내렸던 문제 많은 제도로 남아 있었다. 왕정은 결코 긴장을 피하지 못했다. 다윗이나 솔로몬은 그들의 눈부신 업적에도 불구하고 왕정의 근본적인 문제인 지파의 독립성과 중앙정부의 요구 관계, 옛 전통과 새로운 체제의 요구 사이를 메우는 문제를 풀지 못했다. 오히려 솔로몬의 억압 정책은 그 간격을 넓혀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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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07.10.23
  • 저작시기2007.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33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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