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서론
본론
고려대장경의 배경
고려대장경의 특성
고려대장경의 내용
고려대장경의 구성
고려대장경의 이동설
결론
본론
고려대장경의 배경
고려대장경의 특성
고려대장경의 내용
고려대장경의 구성
고려대장경의 이동설
결론
본문내용
이 가설엔 문제점이 있다. 당시 늘배 1척당 경판 800여 장을 선적하면 총 110척의 배가 필요한데다 경판의 무게 때문에 수심이 얕은 곳은 배가 지나기 어렵다. 또한 육로 운반엔 엄청난 수레와 인력이 소요된다. 우마차가 새재를 넘어 통행이 가능했던 건조선 후기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해로를 택했을 터인데 이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기록이 있다. 대장경판이 서울에 도착한 이틀 뒤, 태조 7년 5월 12일 "임금이 서강에 행차해 전라 조운선을 시찰했다"는 것, 아마도 이 배로 옮기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이다.
조운선은 1척당 경판 5천 장을 선적할 수 있어 총 20척 정도면 충분하다. 이 배를 이용했다면 당시의 조운로를 거쳤을 것이다. 한강에서 서해 바닷길로 나온 다음 남해를 돌아 낙동강 줄기인 고령에 이르러 배를 댄다.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육로로 운반한다. 이러한 방법은 시일도 한 달 남짓으로 단축되고 노동력도 훨씬 덜 든다.
고령의 장경나루에서 만난 한 향토사학자도 그렇게 방대한 양의 보물이 어떻게 교통로도 없던 뭍으로 왔겠냐며 육로운송설을 부인했다. 옛날 장경나루의 강폭은 지금보다 훨씬 커 조곡을 실어 나르는 바닷배들이 드나들 수 있었다. 경판 역시 바다를 통해 이곳으로 들어왔으며, 낙동강에서 해인사로 가는 데 이만한 포구가 없어 영남 승려들을 이곳에 다 불러 모으기도 했다. 일반인도 경판을 나르면 재수가 좋다고 하여 10리, 5리씩 릴레이 하듯 전했는데, 경판을 짊어지면 땀이나 불결해지기 때문에 주로 머리에 이고 옮겼다고 한다. 이렇게 힘든 과정을 통해서 그 방대한 양의 대장경이 이동을 했고, 지금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고려대장경의 대해 전반적인 사실을 알아보았다. 우리 조가 이 내용을 준비하면 느낀 점은 이렇게 대단한 역사를 진행한 선조의 위대함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고개가 숙여진다는 것이다.
또한 고려대장경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그 의의로는 인류 최초의 대장경인 관판대장경의 내용을 추측할 수 있는 유일한 대장경이라는 점과 단일 목조건물로는 세계 유일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점, 그리고 매우 방대한 내용이지만 과학적 배열로 오탈자 없는 정확한 대장경이라는 것 그리고 전 사회 계층이 참여하여 일체감을 확인하는 계기였다는 것, 유교와 불교의 교류, 선종과 교종의 통합결과물이었다는 것 등 수많은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한국사와 민족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이 대장경의 의의를 논한다면 바로 그것은 역사상 가장 어려울 때 중 하나였던 몽고군침입을 맞아 그 당시의 모든 불교문화를 정리하고 힘이 아닌 문화로서 그 시련을 극복하였다는 것이다. 그 당시의 다른 나라사람들에게는 어찌 보면 무식하고 말도 안 되는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고려인들이 선택한 이 방법을 통해서 그들은 영원이 이 세상에 의미 있는 존재로 남았다는 것이다. 무력을 앞세워 세계를 재패한 몽고제국은 세상에 사라져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는 지금에 그 당시에 몽고에게 대항하고 자신들만의 힘으로 자신들만의 철학으로 국난을 극복하려던 고려인들의 팔만대장경은 지금까지 남아서 우리가 그리고 세계가 자랑스러워하는 문화재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를 사는 우리들은 반성할 것이 많아진다. 조금만 힘들어도 하지 않으려하고, 어려운 난관이 부딪히며 그것을 웬만하면 피하려하고, 현실에 부딪혀 포기하고 적당히 타협하는 경우가 자주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 지금 우리의 실정이다. 그러나 우리 선조 고려인들은 당시 현실적으로 불가항력이었던 몽고군의 침입을 맞아 어쩔 수 없이 결과적으로 굴복을 하긴 했지만 문화의 자존심만은 꺾일 수 없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칼과 총을 들고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와 문화를 사용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당시 대국인 몽고가 여러 나라를 정복하였지만 이렇게 문화적 자존심을 사수하려는 나라는 고려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서 고려인들의 정신과 얼이 고려대장경에 남아서 지금의 모든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21세기 현대에는 상황이 뒤바뀌어서 도리어 우리나라의 원조를 받고 있는 몽고를 볼 수 있는데 바로 이러한 것에서 한국사와 민족의 발전이라는, 그렇게 멀지도 어렵지도 않는 곳에서 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가진다. 가까이 있는 고려 대장경을 통해서 우리는 앞으로 우리나라와 민족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하는지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안타까운 일은 우리의 선조들은 그 힘든 상황에서 대장경을 통해서 자신들의 문화의 우수성을 알렸지만 그 문화의 결정체를 가지고 있는 우리들은 그 결정체를 세상에 알리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힘들게 남겨주신 문화재를 잘 보존하는 것은 더 이상 말할 필요 없는 당연한 문제이지만 보존과 함께 내용의 연구가 절실하다는 생각은 누구도 중요시 생각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사실 세계에서는 일본대장경이 연구에 자주 쓰이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들은 너무 소극적으로 보존에만 집착해왔던 것이 아닌가 하는것이다. 일본은 우리나라에서 가지고간 대장경을 가지고 일본대장경을 만들어 그것을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서 불교나 불교경전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쉽게 사용하도록 해서 문화의 우수성을 알리고 있는 반면에 우리는 그렇게 좋은 팔만대장경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작업을 하지 않아 그 문화의 우수성을 알리지 못하고 있다. 구술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라는 속담이 있다. 아무리 좋은 문화재와 유산을 가지고 있으면 뭐할것인가. 그 것을 활용하지 않으면 집안의 휴지보다도 못한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훌륭한 문화유산, 우리의 자랑인 팔만대장경이 지나간 역사의 유물이 아니라, 현재에도 살아 숨 쉬는 문화유산으로 거듭났으면 하는 것이 우리의 바람이다. 그러한 작업을 이제는 하나하나 해나가야 하는 것이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보고 배우고 발전해나갈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글의 개요
서론
본론
고려대장경의 배경
고려대장경의 특성
고려대장경의 내용
고려대장경의 구성
고려대장경의 이동설
결론
그렇다면 해로를 택했을 터인데 이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기록이 있다. 대장경판이 서울에 도착한 이틀 뒤, 태조 7년 5월 12일 "임금이 서강에 행차해 전라 조운선을 시찰했다"는 것, 아마도 이 배로 옮기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이다.
조운선은 1척당 경판 5천 장을 선적할 수 있어 총 20척 정도면 충분하다. 이 배를 이용했다면 당시의 조운로를 거쳤을 것이다. 한강에서 서해 바닷길로 나온 다음 남해를 돌아 낙동강 줄기인 고령에 이르러 배를 댄다.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육로로 운반한다. 이러한 방법은 시일도 한 달 남짓으로 단축되고 노동력도 훨씬 덜 든다.
고령의 장경나루에서 만난 한 향토사학자도 그렇게 방대한 양의 보물이 어떻게 교통로도 없던 뭍으로 왔겠냐며 육로운송설을 부인했다. 옛날 장경나루의 강폭은 지금보다 훨씬 커 조곡을 실어 나르는 바닷배들이 드나들 수 있었다. 경판 역시 바다를 통해 이곳으로 들어왔으며, 낙동강에서 해인사로 가는 데 이만한 포구가 없어 영남 승려들을 이곳에 다 불러 모으기도 했다. 일반인도 경판을 나르면 재수가 좋다고 하여 10리, 5리씩 릴레이 하듯 전했는데, 경판을 짊어지면 땀이나 불결해지기 때문에 주로 머리에 이고 옮겼다고 한다. 이렇게 힘든 과정을 통해서 그 방대한 양의 대장경이 이동을 했고, 지금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고려대장경의 대해 전반적인 사실을 알아보았다. 우리 조가 이 내용을 준비하면 느낀 점은 이렇게 대단한 역사를 진행한 선조의 위대함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고개가 숙여진다는 것이다.
또한 고려대장경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그 의의로는 인류 최초의 대장경인 관판대장경의 내용을 추측할 수 있는 유일한 대장경이라는 점과 단일 목조건물로는 세계 유일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점, 그리고 매우 방대한 내용이지만 과학적 배열로 오탈자 없는 정확한 대장경이라는 것 그리고 전 사회 계층이 참여하여 일체감을 확인하는 계기였다는 것, 유교와 불교의 교류, 선종과 교종의 통합결과물이었다는 것 등 수많은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한국사와 민족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이 대장경의 의의를 논한다면 바로 그것은 역사상 가장 어려울 때 중 하나였던 몽고군침입을 맞아 그 당시의 모든 불교문화를 정리하고 힘이 아닌 문화로서 그 시련을 극복하였다는 것이다. 그 당시의 다른 나라사람들에게는 어찌 보면 무식하고 말도 안 되는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고려인들이 선택한 이 방법을 통해서 그들은 영원이 이 세상에 의미 있는 존재로 남았다는 것이다. 무력을 앞세워 세계를 재패한 몽고제국은 세상에 사라져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는 지금에 그 당시에 몽고에게 대항하고 자신들만의 힘으로 자신들만의 철학으로 국난을 극복하려던 고려인들의 팔만대장경은 지금까지 남아서 우리가 그리고 세계가 자랑스러워하는 문화재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를 사는 우리들은 반성할 것이 많아진다. 조금만 힘들어도 하지 않으려하고, 어려운 난관이 부딪히며 그것을 웬만하면 피하려하고, 현실에 부딪혀 포기하고 적당히 타협하는 경우가 자주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 지금 우리의 실정이다. 그러나 우리 선조 고려인들은 당시 현실적으로 불가항력이었던 몽고군의 침입을 맞아 어쩔 수 없이 결과적으로 굴복을 하긴 했지만 문화의 자존심만은 꺾일 수 없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칼과 총을 들고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와 문화를 사용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당시 대국인 몽고가 여러 나라를 정복하였지만 이렇게 문화적 자존심을 사수하려는 나라는 고려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서 고려인들의 정신과 얼이 고려대장경에 남아서 지금의 모든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21세기 현대에는 상황이 뒤바뀌어서 도리어 우리나라의 원조를 받고 있는 몽고를 볼 수 있는데 바로 이러한 것에서 한국사와 민족의 발전이라는, 그렇게 멀지도 어렵지도 않는 곳에서 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가진다. 가까이 있는 고려 대장경을 통해서 우리는 앞으로 우리나라와 민족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하는지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안타까운 일은 우리의 선조들은 그 힘든 상황에서 대장경을 통해서 자신들의 문화의 우수성을 알렸지만 그 문화의 결정체를 가지고 있는 우리들은 그 결정체를 세상에 알리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힘들게 남겨주신 문화재를 잘 보존하는 것은 더 이상 말할 필요 없는 당연한 문제이지만 보존과 함께 내용의 연구가 절실하다는 생각은 누구도 중요시 생각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사실 세계에서는 일본대장경이 연구에 자주 쓰이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들은 너무 소극적으로 보존에만 집착해왔던 것이 아닌가 하는것이다. 일본은 우리나라에서 가지고간 대장경을 가지고 일본대장경을 만들어 그것을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서 불교나 불교경전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쉽게 사용하도록 해서 문화의 우수성을 알리고 있는 반면에 우리는 그렇게 좋은 팔만대장경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작업을 하지 않아 그 문화의 우수성을 알리지 못하고 있다. 구술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라는 속담이 있다. 아무리 좋은 문화재와 유산을 가지고 있으면 뭐할것인가. 그 것을 활용하지 않으면 집안의 휴지보다도 못한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훌륭한 문화유산, 우리의 자랑인 팔만대장경이 지나간 역사의 유물이 아니라, 현재에도 살아 숨 쉬는 문화유산으로 거듭났으면 하는 것이 우리의 바람이다. 그러한 작업을 이제는 하나하나 해나가야 하는 것이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보고 배우고 발전해나갈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글의 개요
서론
본론
고려대장경의 배경
고려대장경의 특성
고려대장경의 내용
고려대장경의 구성
고려대장경의 이동설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