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머리말
2. 안등창익 이해의 새로운 시각
3. 안등창익의 <법세물어>와 박지원의 <호질>
4. 글쓰기 방식 혁신의 비교
5. 글쓰기의 역사에서 본 동리 양상
6. 사상사적 위치와 평가
7. 논의의 확대를 위한 전망
참고 1 -「홍대용과 박지원」
참고 2 -「왕부지의 기철학」
※참고문헌※
2. 안등창익 이해의 새로운 시각
3. 안등창익의 <법세물어>와 박지원의 <호질>
4. 글쓰기 방식 혁신의 비교
5. 글쓰기의 역사에서 본 동리 양상
6. 사상사적 위치와 평가
7. 논의의 확대를 위한 전망
참고 1 -「홍대용과 박지원」
참고 2 -「왕부지의 기철학」
※참고문헌※
본문내용
을 마련했다. 그의 문학론이 작품이고 작품이 문학론이다. 그는 한문학에만 힘쓰면서 글자는 비록 전에 쓴 것과 같지만, 글은 독특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유가의 언어가 진실과 합치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진실은 분별하고 형용해야 비로서 구체화된다는 새로운 발언을 하였다. 분별과 형용이 장식의 수단이 아닌 탐구의 방법이라 하였다.
그는 또한 글 쓰는 것은 전투와 같다 해서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측공이나 역공의 방법을 다각도로 찾았다. 그는 또한 고문을 쓰면서 옛것을 야유의 대상으로 삼아 뒤집어엎었다. 그는 고정관념을 깨고 사물을 새로이 인식하며, 이념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탐구자가 되려는 노력을 하였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서실과 허구를 적절히 배합하고 서술시점을 다양화했다. 특히 <호질>은 <열하일기> 전편에서 하고자 하는 말을 유학자로 존경받은 인물의 위선적인 내막을 폭로하는 방식으로 집약해 나타낸 작품이다. <열하일기>는 단순한 견문기가 아닌 복합적인 구성과 심각한 주제를 가진 다면적인 작품인 것이다.
박지원은 한문학에서 요구하는 명문의 요건을 최대한 갖추면서 뒤집었다. 중세문인으로서의 수련을 철저히 하고 자기 혁신을 이룩해 근대문학에 다가왔다. 철학에 근거를 둔 이론을 창작과 밀접하게 연관시킨 수준은 그 뒤의 어느 누구도 따르지 못했다.
참고 2 -「왕부지의 기철학」
왕부지는 북송 시대 장재의 사상에 공감하여 기 중심의 사상을 전개했다. 왕부지는 이의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고 이는 다만 기 가운데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입장을 {역경} 계사전에 나오는 '형이상의 것을 도라 하고, 형이하의 것을 기라 한다'는 말에 그대로 적용하여 이렇게 주장했다. 도가 무형인 것, 즉 이이고, 기가 구체적인 사물, 즉 기라고 할 때, 이는 기혹은 기에 종속되는 것이고, 구체적인 사물에서 벗어난 추상적인 도란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기에 비해서 도를 우위에 두었던 이전 유학자들의 견해와는 사뭇 다르다. 기를 우위에 두는 입장은 다음과 같이 기를 우위에 두는 입장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이는 음양의 묘를 상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기야말로 음양의 실질이다. 기의 선한 움직임에 따르는 것이 이이며, 기밖에 독립한 이가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참고문헌※
조동일.『한국의 문학사와 철학사』.지식산업사.2000.
조동일.『한국문학통사3 제4판』.지식산업사.2005.
그는 유가의 언어가 진실과 합치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진실은 분별하고 형용해야 비로서 구체화된다는 새로운 발언을 하였다. 분별과 형용이 장식의 수단이 아닌 탐구의 방법이라 하였다.
그는 또한 글 쓰는 것은 전투와 같다 해서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측공이나 역공의 방법을 다각도로 찾았다. 그는 또한 고문을 쓰면서 옛것을 야유의 대상으로 삼아 뒤집어엎었다. 그는 고정관념을 깨고 사물을 새로이 인식하며, 이념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탐구자가 되려는 노력을 하였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서실과 허구를 적절히 배합하고 서술시점을 다양화했다. 특히 <호질>은 <열하일기> 전편에서 하고자 하는 말을 유학자로 존경받은 인물의 위선적인 내막을 폭로하는 방식으로 집약해 나타낸 작품이다. <열하일기>는 단순한 견문기가 아닌 복합적인 구성과 심각한 주제를 가진 다면적인 작품인 것이다.
박지원은 한문학에서 요구하는 명문의 요건을 최대한 갖추면서 뒤집었다. 중세문인으로서의 수련을 철저히 하고 자기 혁신을 이룩해 근대문학에 다가왔다. 철학에 근거를 둔 이론을 창작과 밀접하게 연관시킨 수준은 그 뒤의 어느 누구도 따르지 못했다.
참고 2 -「왕부지의 기철학」
왕부지는 북송 시대 장재의 사상에 공감하여 기 중심의 사상을 전개했다. 왕부지는 이의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고 이는 다만 기 가운데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입장을 {역경} 계사전에 나오는 '형이상의 것을 도라 하고, 형이하의 것을 기라 한다'는 말에 그대로 적용하여 이렇게 주장했다. 도가 무형인 것, 즉 이이고, 기가 구체적인 사물, 즉 기라고 할 때, 이는 기혹은 기에 종속되는 것이고, 구체적인 사물에서 벗어난 추상적인 도란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기에 비해서 도를 우위에 두었던 이전 유학자들의 견해와는 사뭇 다르다. 기를 우위에 두는 입장은 다음과 같이 기를 우위에 두는 입장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이는 음양의 묘를 상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기야말로 음양의 실질이다. 기의 선한 움직임에 따르는 것이 이이며, 기밖에 독립한 이가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참고문헌※
조동일.『한국의 문학사와 철학사』.지식산업사.2000.
조동일.『한국문학통사3 제4판』.지식산업사.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