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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따질 것이 없고, 다만 그것을 실천하는 것만 남았다고 보았다. 규범과 도덕에 따라 개인이 인격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성리학을 절대화시키는 이러한 경향은 개인의 주체를 약화시켰다. 왕수인은 외적인 규범보다, 도덕 실천의 주체인 이 마음의 확립을 강조하여 내 마음에는 도덕을 실천할 모든 가능성이 주어져 있는데 그것이 바로 양지라고 주장했다. 왕수인의 후예는 양지가 결국 도덕율에 따르는 양심이라 보아 성리학에 접근하는 우파와, 양지란 우리 마음의 타고난 상태 그대로라고 보는 좌파로 나뉜다. 후자는 명나라 말에 지식인 사회를 풍미하며 극단적으로 발전하여, 양지를 식욕 성욕 등으로 보기까지 했다. 명나라가 망하고 이민족인 만주족의 청나라가 등장하자 지식인들은 명의 멸망의 한 원인으로 양명학을 지목하여 비판한다. 청은 성리학을 지배 이념으로 삼고 지식인들이 자유로운 의견을 제시하는 것을 극단적으로 탄압하여 지식인들은 성리학이나 양명학의 관념론적 이론에서 벗어나, 고전의 실증적인 연구에 몰두했다. 실증은 있으나 체계화된 철학이 없었던 시대가 도래한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치밀하고 방대한 고전에 대한 고증은 후대에 중국 철학을 연구하는 기초 자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