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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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서의 역사 자체, 아니 차라리 세계들의 여러 역사들이 주어져 있다. 하이데거의 견해는 명백하지 않은 "존재의 역사"에 대한 그의 "미래적인" 사유의 자기이해에 있어 각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존재이해와 세계이해를 다른 것과 구별지어 파악해야 하는 그러한 해석학에로 넘어가는 듯이 보인다. 개개의 커다란 시대와 세계의 "있음"(ist)은 모든 것을 의미하며 개개의 다른 "여기"와 "저기"를 뜻한다. 끊임없이 번역과 전수의 전이가 필연적이다. 이해는 여기에서 언제나 "유비적"이다. 그런데 예전의 표현양식을 빌어 낯설은 것 속에로의 감정이입에 있어서도 해석과 의미부여에 있어서의 불합치를 결코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차이는 항상 동일성에 비해 더 큰 것으로 존립해 있고, 유비적인 이해에서도 아직 남아 있는 낯설음이 더 지배적이고 결코 완전히 극복될 수 없다 "Quanto maior similtudo tanto maior dissimilitudo(유사함이 크면 클수록 또한 그 만큼 차이점도 크다)"라고 1215년의 라테란 공의회는 신학적인 형이상학의 표현방식을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자기자신에로 되던져짐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독특한 동일성은 다른 것과의 경계를 의식하고 이제 비로소 자기 자신으로 이해된다. 이제 비로소 역사적인 자기이해가 힘을 펴기 시작한다.
칼 라너(Karl Rahner)는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있은 80회 생일 축하식에서 가진 마지막 강연에서 그의 스승 에리히 프르치바라(Erich Przywara)의 유비이론이 자신의 "신비의 신학"의 본래적인 핵심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전(全) 유비이론은 "존재의 유비"를 1500년 동안을 통한 분배의, 배당의, 비례의 유비로서 더 날카롭게 전개시켰다. 그러나 칼 라너는 "역사적 유비"와 그에 속하는 개념을 아직까지 우리에게 정리작업해 주지 못하고 있다. 하이데거 역시 못하고 있다. 그는 현대 "인간의 자연 성향으로서의 형이상학"을 우리의 시대에 맞는 형태로서 그러한 "메타역사학"에 아주 가깝게 이끌고 왔다. 그는 범주적 개념과 실존론적 개념을 구별하면서 이 메타역사학을 준비했다. 그는 이를 위해 몇몇 근본 낱말들(예컨대 "사건")을 찾아냈으며, 그로써 우리 형이상학의 자기이해가 가야 할 길의 방향을 제시하기는 했지만 그 이상은 못했다. 이 가야할 길의 방향은 참된 존재자 전체에 대한 존재론 및 이 존재자 전체가 자기를 계시하는 신적인 것으로서의 최고 존재자에 대해 갖는 관계의 존재론으로서의 고전적 고대 형이상학에서 출발하여, 자연현실에 대한 그리고 윤리적 자유의 절대적 확실성에 대한 판단들의 정당성의 가능조건들을 확실히 해야 하는 초월론적 형이상학의 중간지점을 거쳐, 세계 역사적 해석학의 메타역사학의 현대에 이르기까지 뻗치고 있다. 참된 것의 앎(고전적 형이상학)에서부터 인식과 행위에 있어 정당한 것으로 변론된 확실성(초월철학의 형이상학)을 거쳐 역사적 진리의 유비적 이해(역사학)에 이르기 까지의 길 말이다. 이러한 과정에 대한 반성에서 형이상학은 오늘날 자신의 자기이해를 찾아야 한다. 과연 그렇게 하고 있는가?
(7) 이 모든 것을 다시 한번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결국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에 있어 오직 세 가지 원칙적으로 상이한 문제제기의 방식들만을 확인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중세의 그리스도교적 형이상학을 거쳐 헤겔의 세속화된 형이상학에 이르기까지의 고전적 고대 형이상학의 주제와 그것의 연속을 "존재와 정신"이라는 표제어로 부를 수 있다. 칸트에 의한 초월론적 형이상학에로의 결정적인 변형은 "객관성과 주관성" 또는 "대상성과 주체성"이라는 핵심 주제로 특징지울 수 있다. 하이데거와 그 후의 현상학적으로 규정된 오늘날의(현상학 이후의) 형이상학은, 만일 그것이 자기자신을 완전히 이해하기를 원한다면, 메타역사학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그것의 과제는 (역사학적) "의미와 (역사적) 자유"의 해석에서 찾아져야 한다. 메타역사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은 의미형이상학(Sinnmetaphysik)이며 자유형이상학이다. 존재와 정신, 객관성과 주관성, 의미와 자유의 이 세 가지를 이해하는 사람은 아마도 현대에서 자기자신을 서양의 형이상학 사상에서부터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상사는 진보의 의미로서도 또 퇴보의 의미로서도 "전개"가 아니며 그것은 단순히 우리의 "역사"이다
물음은 아직 남아있다. 이러한 마지막 해석과 더불어 하이데거 형이상학의 자기이해가 적중되었는가, 다시 말해서 이해되었는가? 이것은 대답 안 된 채 남아있다. 어쨌든 여기에서도 이해함과 이해 못함이 아주 가까이 서로 결부되어 있다. 이것은 불충분함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모든 해석의, 모든 해석학의 유비성에 근거하고 있다. 또 물음을 던져야 할 것은 "나 막스 뮐러가 그의, 즉 하이데거의 길을 나의 길에서부터 보고 있고 나의 길을 그의 길에서부터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2) 이것은 물론 긍정되어야 한다. 그럴 경우 비록 두 길이 같은 길들로 남아 있지는 않지만, 원함의 내용에서가 아니고 그 방향에 있어서의 동일성은 있을 것이다. 동일성은 주장하는 존재들의 일치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정신의 움직임의 방향이 일치해 있는 데에 있다. 그리고 아마도 이 방향이 오늘날의 많은 철학하는 "동반자"와 "동시대인들"의 형이상학적 원함의 자기이해에 대해 대변적인 형태로 그 일치를 가능케 하고 있을 것이다.
* 각 주 *
1. 참조 B. Casper, "Martin Heidegger und die Theologische Fakult t Freiburg 1909 - 1923", in: Freiburger Di zesan-Archiv, 100.Bd.(1980) 534 -541.
2) 천재적인 스승과 모방하는 제자와의 거리를 분명히 의식하면서 이 말을 한다.
* 이 글은 막스 뮐러의 글 "Was ist Metaphysik - heute? Drei Betrachtungen zu ihrem Selbstverst ndnis"(in: Philosophisches Jahrbuch 92 [1985], 52 - 67)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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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5페이지
  • 등록일2008.03.20
  • 저작시기2008.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56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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