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에 두고 온 교회 독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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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북녘에 두고 온 교회 독후감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의주읍 교회
소래교회
장대현 교회
신환포 교회
원산 광석 교회
재령 동부 교회
삭주읍 교회
문천읍 교회
소우물 교회
은율읍 교회
벽동 교회
산정현 교회
겸이포 중앙 교회
오산교회
토마스 기념 전도단
....

본문내용

그는 또한 평양 신학교에 입학한다. 하지만 학교일이 너무 바빠서 중간에 중퇴를 한다. 그래도 이승훈 선생과 같이 훌륭한 독립 운동가가 신학을 한다는 것은 다른 기독교인들에게는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그 영향으로 오산학교에서는 훗날 많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나온다. 주기철 목사와 한경직 목사도 오산학교 출신이다.
토마스 기념 전도단은 황해도 겸이포 중앙 교회의 이승길 목사가 복음 전하는 일에 치중하고, 토마스 목사를 기념하기 위해서 조직한 전도단이다. 인천 내리 감리교회의 박 장로의 도움으로 악기를 구입한 전도단 17명은 황해도 옹진군에 갔다. 가는 길에 사도바울이 유라굴로 태풍을 만났을 때와 비슷한 경험을 한다. 그 때 죽다 살아난 전도단은 죽을 뻔한 것 살려 주신 것에 감사하여 평생에 대한 헌신을 더욱 다짐했다. 그들은 옹진읍에 도착해서 전도 사업을 시작한다. 악사들이 북과 관악기를 연주하며 행진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따라 왔고 사람들이 모이면 목사님들이 말씀을 선포했다. 이런 방법으로 전도를 했다. 가끔은 돌이 날라 오는 등의 핍박도 당하지만, 약 2년 동안 옹진과 연백에서 14개의 교회를 세운다. 이목사가 옹진읍에 세운 교회가 바로 옹진읍 중앙 교회다. 당시 지역은 모두 감리교였지만 처음 장로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처음에 예배를 드릴 때 월남해온 장로교인들이 모여 80여명이 참여했다. 1948년 옹진반도에서 엄패산 전투가 벌어져 주민들이 전쟁의 위협 속에서 발발 떨고 있을 때, 이목사는 오히려 무덤덤하게 교회를 수리하며 전도하는데 더욱 힘썼다. 이런 이목사의 태도는 당시 불안정하던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되고 위로가 되었다. 후에 이목사는 교회를 1년 동안 시무하면서 교인이 300여명 모이는 큰 교회로 발전시켰다. 하지만 한국전쟁 때 남쪽으로 피난 오면서 교회는 설립된 지 1년 만에 문을 닫는다.
평양 교회의 실태
이것은 필자가 총회신학대학교 동기인 목사를 통해서 전해들은 이야기다.
현재 평양에는 1988년에 지은 봉수 교회를 제외하고는 교회가 전혀 없다. 한국 전쟁 때 폭격으로 인해서 모두 무너졌으며, 다시 짓지 않아서 없다. 평양의 장대현 교회는 소년 궁전이라는 이름의 국립 탁아소가 되었고, 산정현 교회는 국립 인민 궁전이라는 이름의 외부 손님 접대와 전시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북한의 기독교인의 실태는 1989년에 북한 봉수 교회에서 부활절 예배를 드릴 때 여실히 밝혀졌다. 평양을 방문한 20여명의 미국 주재 한국인 목사들은 봉수교회에서 부활절 예배를 드리러 갔다. 그때 미국을 방문한 문익환 목사도 예배에 참석했다. 예배에는 400여명의 사람들이 참석했는데, 그중에 대다수는 불신자인데 예배에 동원된 인력이었다. 담임목사가 부르자고 한 찬송은 다 잘 따라 불렀지만, 워싱턴 한인 침례교회 이동원 목사가 불쑥 다른 찬송을 하니까 몇 사람만이 눈물을 흘리며 따라 불렀다고 한다. 또한 김창선 목사가 일정중에 다른 곳으로 이동 할 때 안내원에게 예수와 하나님을 아냐고 물었더니, 그것이 무엇이냐는 호기심 있는 표정의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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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7페이지
  • 등록일2008.04.14
  • 저작시기2007.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6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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