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술변법운동 선구자 강유위의 일생 및 대동서 완벽 분석
본 자료는 5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해당 자료는 5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5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무술변법운동 선구자 강유위의 일생 및 대동서 완벽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당시의 시대 상황

2. 강유위의 일생

3. 강유위의 주변 인물들

4. 강유위의 사상

5. 대동서 분석

6. 총평 및 나의 생각

cf) 강유위 연보

※참고 문헌

본문내용

의도가 깔려 있다. 그래서 인간의 진화를 위해서는 열등한 인간 혹은 문제가 있는 인간은 종의 번식에 참여하면 안 된다는 무시무시한 논리로 전개될 수가 있다. 강유위의 이 같은 발상은 사람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매우 위험하고 그릇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강유위의 대동서>삼성출판사 52p 참조.
여기에 이어 강유위는 또한 인종차별도 하고 있다. 다음에 제시된 강유위의 인종차별적인 발언에 대해 살펴보자.
「만약 갈색인종이나 흑인종 중에 성격이 매우 나쁘거나 모습이 아주 흉하거나 혹은 질병이 있는 자는 의사가 후손을 끊는 약을 먹여 그 인자가 유전되는 것을 끊어 버린다. 천수백 년 뒤에는 지구에 인구가 많은 것이 걱정일텐데, 너절한 흑인의 못된 종자들이 우리 좋은 종자들을 더럽히고 퇴화시키게 할 수는 없다. 이 때문에 도태시키면 유전되는 것이 많지 않을 것이다.」 <대동서> 을유문화사, 이성애 저 2006 295~296p,
<대동서> 을유문화사, 이성애 저 2006 297~299p를 참조하면 삼세설에 따른 그의 인종관을 구체적으로 살 펴 볼 수 있다.
강유위의 위와 같은 발언은 흑인과 갈색인종을 포괄하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대동세도 진정한 유토피아는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또한 지나치게 급진적이거나 현대에서도 납득하기 힘든 사상들이 많이 제시되어 있어서 당시에 받아들여지기 힘들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특히 무부에서 보았던 기간 약정 혼인은 상당히 비합리적인 주장이 아니었나 싶다.
책 내용이 중복되는 내용이 많았던 것도 아쉬운 측면의 하나이다. 물론, 워낙 방대한 양이다 보니 그럴 수 있겠지만, 중복되는 내용을 반복해서 읽다보니(물론 큰 틀은 다르지만,) 다소 지루함이 느껴졌다. 게다가 한문 번역본이어서 그런지 몇 번을 읽어도 문맥이 정확히 읽혀지지 않는 곳이 있어서 답답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 예를 들면 <대동서>에 “태평세에는 경쟁이란 없다. 경쟁이 새로운 것의 창조에 반드시 필요한 것인가? 경쟁을 해야만 반드시 지혜가 장려되는 것인가? 지혜는 경쟁할수록 정교해지고, 새로운 것이 발견될수록 더욱 상승한다.” 라는 문장이 나온다. <대동서> 강유위 지음, 이성애 옮김, 을유문화사, 2006 622p
분명 지혜를 장려하자는 뜻임은 확실한데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어서 좀 불편한 점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정말로 강유위가 주장한 <대동서>라는 세상이 왔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지금은 워낙 자본주의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세상이지만, 만약에 그가 주장하는 대동세가 실현되었다면 대동세 속에서 그것이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살고는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이 과제를 하면서 강유위라는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물론 전부를 수용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선각자적인 정신과 깨어있는 의식은 본받을 만 했다. 진심으로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평생토록 대동의 실현을 위해 동분서주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주관을 끝까지 주장할 수 있는 자신감 있는 행동들 역시 내가 본받을 만하다고 생각되었다.
cf) 강유위 연보 <대동서> 강유위 지음, 이성애 옮김, 을유문화사, 2006, 679~680p
1858(출생) 광동(廣東) 남해현(南海懸)에서 태어남. 원래 이름은 조이(祖), 자는 장소(長素), 호는 갱생(更生), 만호(晩號)는 천유화인, 증조부 무붕은 평민으로 고향에서 강학하였고, 조부 찬수는 1846년 거인(擧人)이 되어 염주와 합포에서 관직을 지냈다. 아버지 달초의 자(字)는 식모, 호는 소농으로서 광주(廣州) 대유(大儒)인 주차기에게서 수학, 강서지현을 지냈다. 어머니는 노련지, 노태부인이라고도 칭함.
1862(5세) 당시(唐詩) 수백 수를 암송.
1863(6세) 봉의에게서 『대학(大學)』,『중용(中庸)』,『논어(論語)』,『효경(孝經)』을 배움.
1868(11세) 부친 별세. 큰아버지에게서 공부함. 『삼국지(三國志)』,『명사(明史)』등을 읽고 이미 시문이 상당한 수준에 이름.
1876(19세) 큰아버지 별세. 18세 때부터 아버지의 스승인 주차기에게서 수학. 송학을 위주로 한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문을 닦음. 중국 역사도 공부함.
1882(25세) 과거를 보기 위해 수도에 올라왔으나 낙방하고 상해로 감. 서양인들의 식민정치를 보고 중국의 장래를 걱정하면서 서양의 기초적인 서적과 공업, 군사학, 의학서 등을 번역.
1883(26세) 남해의 서초산에 은거하면서 중국의 전적을 공부하고 불경에 심취함.
1884(27세) 대동서를 완성
1888(31세) 외세의 힘이 강해져감을 통감하고 호부상서 겸 국자감사로 있던 옹동화에게 상소를 보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음.
1889(32세) 거처를 광주 운구서옥으로 옮기고, 양계초와 진천추의 권유로 만목초당에서 강학 시작. 전통적인 공학, 불학, 송명학 외에도 사학과 서구학문을 가르치고 외국어 교육도 중시함.
1834(37세) 과거에 다시 낙방. 중국과 일본 사이에 마관화약이 성립되자 각 성의 응시자들과 함께 거부운동을 벌임. 강학회를 창설했으나 반 년만에 중지됨.
1896(39세) 옹동화의 추천으로 덕종을 만나 신임을 얻었으나 보수파의 저지로 변법자강책의 개혁은 실패로 끝남.
1897(40세) 만목초당에서 강학을 계속.
1898(41세) 그의 변법자강책을 채용하려던 광서제가 보수파에 의해 유폐되고 그는 해외망명을 떠남. 유럽 각지와 캐나다 등으로 가서 중국과 서양을 비교한 기행문을 썼음.
1909(52세) 필리핀에서 기거.
1910(53세) 홍콩으로 돌아옴. 무창사건으로 다시 일본으로 감.
1923(66세) 모친상으로 귀국. 상해 신원으로 거처를 옮기고 장백정의 주선으로 저서를 간행.
1927(70세) 사망.
※참고 문헌.
naver 백과사전
yahoo 백과사전
<대동서>, 강유위 저 을유문화사 2006
<강유위의 대동서> 삼성출판사 2007
<역사를 만든 20인 세계의 여성들> 새날 출판사 박석분 저 2000
<중국 근대화를 이끈 걸출한 인물들>지식산업사, 이병주 저 2006
<천하관과 근대화론 : 양계초를 중심으로> 문학과지성사 이혜경 저 2002
<아편전쟁> 우리터 진순신 저
  • 가격2,000
  • 페이지수17페이지
  • 등록일2008.06.02
  • 저작시기2008.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67436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