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굽타시대의 고전문화
2. 인도문화의 국외 전파
3. 힌두교의 완성과 불교의 쇠퇴
4. 굽타 왕국의 성립
5. 하르샤의 통치
출처
2. 인도문화의 국외 전파
3. 힌두교의 완성과 불교의 쇠퇴
4. 굽타 왕국의 성립
5. 하르샤의 통치
출처
본문내용
a Gupta)에서 부터 시작 되었다. 이 기간에도 평화와 번영을 누렸으나, 흉노족의 침입이 시작되었다. 이 기간에는 아직 군사력이 건재하여 큰 어려움 없이 막아 낼 수 있었다. 스칸다 굽타(Skanda Gupta)는 유능한 군인왕이었다. 그는 왕자 때 흉노족을 물리쳐 전공을 세웠다. 이후 황제가 된 후에도 흉노족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저지하는 업적을 세웠으나 계속된 전쟁으로 굽타제국의 재정적, 군사적 자원이 심각하게 고갈 되었다. 스칸다 굽타가 사망한 후 뿌루 굽타(Puru Gupta)가 계승하였으나 재정적 어려움에 왕위 다툼까지 겹쳐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부다 굽타(Budha Gupta)이후에는 각 지사들이 굽타제국에 대한 맹목적 종주권도 인정하지 않으면서 독립군주로 행세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왕위를 둘러싼 잇단 내분으로 중앙집권이 현저히 약화되었다. 국가의 기강이 해이해져 군사력 또한 약해졌으며 이로 인해 흉노족, 쿠샨족, 사산족 등이 인도 변경에서 수시로 압력을 가해오는 상황에도 대적할 수 없게 되었다.
5. 하르샤의 통치
굽타제국이 쇠약해진 후 북인도는 네 개의 왕국으로 지배세력이 재편되었다. 옛 마가다 지방에서 맥을 유지하고 있는 굽타왕조, 마우카리, 푸쉬야부띠, 마이트라카가문 등이 그것이었다. 굽타왕조가 크게 위축된 형세에서 마우카리가 까나우즈를 중심으로 하여 서우따르 프라데시를 지배하였으며, 점차 마가다 지방으로 그 세력을 확장하였다. 푸쉬야부띠는 델리 부근 탄네사르에 근거했으나 마우카리 가문과 혼인동맹을 체결하여 두 나가 사이에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마우카리의 마지막 왕이 사망하자 왕족들은 푸쉬야부띠의 지배자인 하르샤 바르다나에게 스스로 통합해 들어가기로 결의하였다. 푸쉬야부띠 가문은 흉노족의 침입 이후 북인도에서 득세하였으며 굽타제국이 쇠약해진 후 어느 왕조보다도 인도사에서 두드러진 기록을 남긴다.
하르샤 바르다나는 가장 위대한 통치자중 한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르샤는 주변세력들을 위압하고 대대적반란과 외부로부터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강력한 군사력을 필요로 한다. 이에 따라 보병 10만, 기병 2만, 상군 6만으로 추산되는 강력한 군대를 조직한다.
수도를 탄네사르에서 갠지스 강변의 까나우즈로 옮겨 세력을 확대하였다. 무정부 상태에 빠져 있던 북인도에 질서를 회복하여 굽타왕조의 세력을 만회하는 듯 하였다.
하르샤는 관대한 군주로서 학문을 좋아하고 학자들을 우대하였다. 정복지에 대해 왕이 충성과 조공을 다짐하면 영토를 돌려주어 지사로 임명하였다. 세금은 전통적 힌두왕국의 세율인 1/6을 납부토록 하였다. 또한 그 시절 학문의 중심이었던 나란다대학의 융성은 그의 지원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는 불교를 비호하여 성장하도록 하였다. 나란다 대학의 지원뿐 아니라 불사와 불탑을 건축하고 동물의 살육도 엄금하였다. 이렇게 불교를 지원하였으나 힌두교에도 탄압을 가하거나 무관심하지 않고, 모든 종교에 관대한 태도를 보이려 노력하였다.
출처
인도사 <조길태> 민음사
한권으로 읽는 인도사 <김진섭> 지경사
부다 굽타(Budha Gupta)이후에는 각 지사들이 굽타제국에 대한 맹목적 종주권도 인정하지 않으면서 독립군주로 행세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왕위를 둘러싼 잇단 내분으로 중앙집권이 현저히 약화되었다. 국가의 기강이 해이해져 군사력 또한 약해졌으며 이로 인해 흉노족, 쿠샨족, 사산족 등이 인도 변경에서 수시로 압력을 가해오는 상황에도 대적할 수 없게 되었다.
5. 하르샤의 통치
굽타제국이 쇠약해진 후 북인도는 네 개의 왕국으로 지배세력이 재편되었다. 옛 마가다 지방에서 맥을 유지하고 있는 굽타왕조, 마우카리, 푸쉬야부띠, 마이트라카가문 등이 그것이었다. 굽타왕조가 크게 위축된 형세에서 마우카리가 까나우즈를 중심으로 하여 서우따르 프라데시를 지배하였으며, 점차 마가다 지방으로 그 세력을 확장하였다. 푸쉬야부띠는 델리 부근 탄네사르에 근거했으나 마우카리 가문과 혼인동맹을 체결하여 두 나가 사이에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마우카리의 마지막 왕이 사망하자 왕족들은 푸쉬야부띠의 지배자인 하르샤 바르다나에게 스스로 통합해 들어가기로 결의하였다. 푸쉬야부띠 가문은 흉노족의 침입 이후 북인도에서 득세하였으며 굽타제국이 쇠약해진 후 어느 왕조보다도 인도사에서 두드러진 기록을 남긴다.
하르샤 바르다나는 가장 위대한 통치자중 한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르샤는 주변세력들을 위압하고 대대적반란과 외부로부터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강력한 군사력을 필요로 한다. 이에 따라 보병 10만, 기병 2만, 상군 6만으로 추산되는 강력한 군대를 조직한다.
수도를 탄네사르에서 갠지스 강변의 까나우즈로 옮겨 세력을 확대하였다. 무정부 상태에 빠져 있던 북인도에 질서를 회복하여 굽타왕조의 세력을 만회하는 듯 하였다.
하르샤는 관대한 군주로서 학문을 좋아하고 학자들을 우대하였다. 정복지에 대해 왕이 충성과 조공을 다짐하면 영토를 돌려주어 지사로 임명하였다. 세금은 전통적 힌두왕국의 세율인 1/6을 납부토록 하였다. 또한 그 시절 학문의 중심이었던 나란다대학의 융성은 그의 지원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는 불교를 비호하여 성장하도록 하였다. 나란다 대학의 지원뿐 아니라 불사와 불탑을 건축하고 동물의 살육도 엄금하였다. 이렇게 불교를 지원하였으나 힌두교에도 탄압을 가하거나 무관심하지 않고, 모든 종교에 관대한 태도를 보이려 노력하였다.
출처
인도사 <조길태> 민음사
한권으로 읽는 인도사 <김진섭> 지경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