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청자-고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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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려청자-고미술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론

2. 청자의 발생
(1) 토기와 청자와의 관계
(2) 청자의 발생

3. 청자의 발전과 쇠퇴
(1) 초기 청자
1) 햇무리굽 청자
2) 녹청자
(2) 청자의 발생
1) 11세기 전반
2) 11세기 후반, 12세기 초
(3) 고려 순청자의 절정기(12세기 전반)
1) 순청자의 세련
2) 청자의 종류
3) 청자 상감의 전성기(12세기 중엽 ∼ 13세기 전반)
(4) 청자의 쇠퇴
1) 쇠퇴기(후기)
2) 쇠퇴기의 상황

참고문헌

본문내용

은 전각을 세웠으며 관란정(觀瀾亭) 북쪽에 세운 양이정(養怡亭)을 청자로 덮었다"는 기사로써 짐작되어 왔었다.
이 사당리 요지에서는 청자 기와뿐 아니고 같은 층위에서 많은 순청자가 발견되었고 청자 타일류의 파편들도 다양하게 나왔으며 그것들 가운데 청자 상감이 소량 섞여 있어서 상감 기법이 성행하기 시작하였을 때에는 순청자의 수요가 더 많았으나 점차 상감청자의 수요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또한 고려 궁실의 호사스러움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고 아울러 고려 청자의 편년에 있어서도 빼놓을 수 없는 자료가 되었다.
1220년대 이후 1270년대 중엽인 원종 때까지 고려 도자와 상감 기법은 쇠퇴의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으나 문양과 기형은 그 이전의 모습을 어느 정도 계승하고 있었다.
(4) 청자의 쇠퇴
1) 쇠퇴기(후기) 개관
몽고군의 내침에 따른 수십 년에 걸친 사회 불안과 경제의 혼란으로 인하여 그처럼 정기 어렸던 고려 청자의 기품이 흐트러지기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양상은 원종대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쇠퇴의 그림자는 청자의 기형, 태토와 유약, 번조 수법 그리고 장식 의장에 이르기까지 고루 미치게 되었고 이러한 하강 곡선은 지나간 영광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운명적인 것이었다.
극도의 혼란 속에 충렬왕이 원제의 부마로서 왕위에 올랐으며 이후 고려는 원의 부마국이 되었다. 왕권의 확립으로 혼란이 쉽게 안정된 것은 아니나 충렬왕 때의 고려 청자는 일시적으로 그 질이 좋아졌다.
충렬왕대에 일시적으로 원 세력하에 지배 체제가 안정되면서 사회는 다시 평정을 되찾고 고려의 자예도 활기를 되찾았지만 그 기간이 짧아 얼마 안 있어 다시 쇠퇴 일로를 걷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충렬왕 때가 그 발전의 중심이었고 일부 왕실이나 귀족들이 사용하는 청자만이 양질의 고급 청자였을 것이다. 또한 이 때의 고려 청자는 일부 기형과 문양의 내용과 구성에 큰 변화가 있다. 이후 청자 상감 의장은 과거의 양식을 그대로 계승한 것도 있고 새로운 의장과 문양 구성을 하였으되 조잡하고 거칠었으며 그 표현에는 밀도가 줄어들기 시작하였고 상감 의장의 일부를 일정한 인형(印形)으로 압날(押捺)해서 손쉽게 처리하는 등 매우 절제 없는 풍조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그 다음 시대에 등장하는 조선 시대 인화문 기법의 시원이 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조선조 초기로 넘어가는 인화분청사기 의장의 전조적인 싹이었던 것이다.
고려 청자가 지닌 곡선의 아름다움은 시대가 내려올수록 흐트러져서 우아 유려하기보다는 혼란한 사회에 알맞은 조잡한 질과 무겁고 둔한 형태와 간략하고 거친 문양으로 적당히 만들어지고 그 사회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160년 동안에 걸친 긴 경로를 하나로 묶어 쇠퇴기라고 본 것은 고려의 정치 사회가 그러하였듯이 고려의 자예 또한 고려의 국운과 너무나 닮은 경로를 밟고 있었기 때문이다.
2) 쇠퇴기의 상황
청자의 쇠퇴기는 대략 3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 1기는 몽고가 침입하기 시작한 1220년대 말부터 원종대까지인 1270년대 중엽까지이며 제 2기는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까지이고 제 3기는 1330년경부터 고려 말까지이다.
이 쇠퇴기의 제 1기에 있어서도 여전히 청자 상감은 그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고 어찌 보면 오히려 전보다 한층 양산화하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 쇠퇴기 가운데 제 1기의 최후를 장식하는 편년 자료로서 기사, 경오, 임신, 계유, 갑술, 임오 등 간지명(干支銘)이 들어있는 일련의 대접, 접시 등이 있다.
제 2기는 원 문화와 원을 통한 서역, 서방 문화의 영향이 간접적으로 고려 문화에도 영향을 미친 때이다. 고려 도자기도 예외는 아니어서 기형 가운데 대접의 구연부가 외반된 것이 나타나며 편호가 생겨나고 문양에도 전혀 새로운 모란당초와 봉황당초, 용봉운문, 화분당초문 등이 등장하며 투각 장식이 다시 나타나는 등 고려 청자에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난다.
이러한 변화는 몽고가 침입해서 국토를 유린하고 물자를 약탈 할 때부터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나 충렬왕 이전까지는 그 영향이 미미하였으며 이후에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전에는 '기사', '경오' 등 명문이 들어 있는 대접에 주로 보이는 문양과 그 기형이 고려 청자의 모습이었다. 변화가 있었다면 거기에 매우 희귀하나 새로운 모란당초문이 나타나기 시작하거나 인화문양이 많아지기도 하고 육각 접시가 등장하는 것 등이었다.
제 3기에 들어서면 청자가 보여 주는 퇴보적인 변화는 한층 분명해져서 매우 거칠어졌다. 원과의 관계는 물론 고려의 정치·사회·종교의 혼란으로 고려 청자는 충렬왕 때의 일시적 안정 이후 극도로 퇴보 일로를 걷고 있었다. 기형은 점점 둔하고 선은 흐트러졌으며 그릇은 두껍고 무거우며 모양은 본래 지녔던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의미를 상실하여 억지로 약화되고 이상하게 변형되었으며 인화문이 늘어난다. 이와 같이 의미 없이 변형된 선조 문양을 흐트러진 채 자꾸 답습하여 내려가다가 결국 몇 개의 단절된 굴곡선으로 나타난다. 번조 때 받침도 14세기 초부터 모래받침이고 새로이 태토비짐눈이 생겨나고 규사눈은 점차 없어져서 굽 바닥은 둔하고 지저분하고 된다. 이러한 쇠퇴기의 고려 청자가 조선조 전기 분청사기의 모체가 된다.
고려시대에는 단군 숭배의 전통적인 토속 신앙과 불교, 노장, 풍수도참 사상 등을 배경으로 청자를 주로 생산하였고 세련시켜 12세기 전반에 비색 순청자로서 유례가 없는 독특한 특색을 나타냈고 12세기 중엽에 유약을 맑고 밝게 발전시켜 청자 상감으로서 다시 한 번 꽃을 피웠다. 토기에서 청자로의 이행은 인류 문화 발전의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으나 고려 도자기 가운데에는 청자가 특히 많이 생산되었다.
고려 청자에는 자연의 향기가 넘쳐 흐른다. 은은하면서 맑고 명랑한 비색, 조각도의 힘찬 선을 지니고 기물과 일체가 된 시적인 운치가 넘치는 회화적인 상감문양, 유연하고 유려한 선의 흐름을 지닌 형태, 구리의 붉은색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였으며 이를 한두 점 악센트로 사용하는 이외에는 모두 담담하게 표현하는 점등이 그 특색이며 아름다움이다.
참고문헌
정양모, 고려 청자, 대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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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8.08
  • 저작시기200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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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475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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