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봉집 경제문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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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삼봉집 경제문감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재 상

총 론

재상의 직

상 업

대 관

간 관

감 사

주 목

군 태수

현령

본문내용

진이 외부로부터 침략해 들어오고 또한 좀도둑이 왕왕 나라 안에서 일을 일으켰으니 밖에서 공격하고 안에서 지키면서 4백년을 전해내려 왔은즉 당시의 부병이 흥성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충렬왕이 원을 섬긴 이래로 매양 조정 안에서 환시와 부녀와 사신으로 오는 자들의 청탁으로 인하여 관작이 넘쳤는데 청탁된 사람들이 모두 부위의 관직에 제수 되면 세력을 믿고 교하여 제멋대로 행하면서 숙위를 하려고 들지 않았으니 이로부터 부위의 법도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무릇 숙위의 직무를 받은 자가 나라의 녹봉만을 도식하면서 할 일을 하지 않으니 마침내 나라를 잃기에 이르렀다. 이에 정도전이 부병을 개제하여 송 태종이 금군의 옛 호칭을 바꾸어 고쳐 사기를 새로이 진작시켰듯이 관명과 직호를 모두 고쳐 정하여 실제의 직분을 맡기자 하였다.
감 사 (각 도의 장관을 일컫던 말)
주(周) 대부로 하여금 방백의 나라를 살피게 하였는데 3인씩 이었다.
한(漢) 초기에는 승상부의 연리를 파견하여, 여러 고을을 나누어 감찰해서 어질고 어질지 않음을 가려 출척하고, 원통한 죄를 살펴 단안 하였으므로, 주 군의 맥락이 승상부에 통할수 있었다.
수(隋) 사예대를 두어 대부 한사람으로 기내를 순찰하게 하고 자사 14인으로 기외를 순찰토록 하여 주목의 폐해를 거의 징치 할수 있었으나 그 임금이 황음하였으니, 법이 비록 좋았다 하더라도 난이 일어나 멸망해가는 것을 메 꿀 수 없었다.
당(唐) 천하를 10도로 나누고 순찰사 20인을 두되 굳세고 밝으며 청렴하고 강직한 자로써 삼았다. 그러나 진의 장수는 모두 관찰의 직임을 겸하여 품계가 높고 중해져서 권력을 훔쳐 함부로 휘둘러도 그 그릇됨을 규탄하는 자가 없게 되어서 난이 일어날 바탕이 되고 말았다.
송(宋) 전운사를 두고 혹 제형 제거를 더 두었는데 한 나라 때 부자사의 남긴 뜻이다. 대성(臺省)ㆍ시감(寺監)으로 이를 삼았으며 비록 재신(宰臣)ㆍ종관(從官)이 진수(鎭帥)가 되더라도 규핵하게 하고, 명번(名藩 이름 있는 제후)이 서장(書狀)을 올릴 적에 그 이름을 감사보다 앞에 썼으므로 사람마다 직분에 분발하였다.
고려(高麗) 감사를 혹 안찰이라고도 일컬었고 혹은 안렴이라고도 일컬었다. 모드 시종 낭관으로써 이를 삼았다. 그 질(秩)은 낮으나 권한은 무거워 스스로 능히 격앙하여 볼 만한 바가 있었으니, 또한 한나라의 부자사(部刺史)와 송나라의 전운사(轉運使)의 남긴 뜻이었다. 말기에 이르러서는 법이 오래되어 폐단이 생기므로, 때의 손익(損益)에 따라 안렴을 도관찰사(都觀察使)로 고쳤다
본조(本調) 고려를 그대로 따랐으나, 반드시 묘당(廟堂)에 명하여 양부(兩府)에서 공정하고 청렴하며 근신한 자를 가려 파견하였으므로, 한ㆍ당(漢唐) 시대의 이점은 있어도 한ㆍ당 시대의 폐단은 없다.
감사는 그 사람됨을 가려 뽑아야 한다.
감사는 마땅히 그 직분을 다하여야한다.
황화에서 보내는 사자는 오로지 자방하기를 힘썼고 수의사자는 여러 성을 풍동시켰으니, 이 자리는 덮어 감추고 그럭저럭 편안히 넘길 자리가 아니다.
감사는 마땅히 모두 들추어 탄핵하여야 한다.
감사는 지나치게 관후하여서는 안된다.
감사는 몸소 먼 곳을 순시하여야한다.
백성들은 궁벽한 시골이나 먼 고장에 살고 있는데, 강역이 광막하고 멀아 안찰이 드뭘게 임하게 되고 궁궐은 만리라서 하소하려해도 미칠 수 없으니 이곳 수령중에 탐오한 자가 있어도 호소하지 못하고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져 민생은 피폐하고 억울함은 펼 길이 없이 민정이 막혀버린즉 감사가 한번이라도 와서 그 억울함을 풀어주기만을 고대한다.
주 목(주의 장관)
주(周) 팔명을 목이라고 하였다.
진(秦) 감찰어사를 두었다.
한((漢) 처음에는 없앴다가 혜제 때에 이르러 또다시 어사를 파견하여 감보군을 감독하고 사송ㅇ르 살피더니, 두해만에 이를 고쳤다.
고려(高麗) 3유수 8목 4도호부를 두었으며 후에 늘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각자 그 주의 백성을 다스리고 있으므로, 이에 별도로 안찰사 안렴사를 파견하여 관리들을 규찰하고 송사를 청단 하였다가, 또다시 도관찰사로 고쳤는데 이것은 감사로 된것이고, 주목의 임무가 군 현과 같아진 것이다.
본조(本調)고려의 것을 모두 그대로 하였다.
군 태수
진(秦) 제후를 멸하고 그 지역을 군으로 만들어 수 승 위를 각각 1인씩 두었는데 수는 백성을 다스리고 승은 이를 보좌하며 위는 병을 맡았다.
한(漢) 경제는 군수라는 이름을 고쳐서 태수라고 하고 치민 진현 권공 결송 검간하는 일을 관장토록 하였다.
후한(後漢) 역시 그 소임을 중하게 여겨서 상서령 복야를 내보내 군수를 삼기도 하고 혹은 군수에서 들어와 삼공이 되게도 하였다.
진(晉) 송(宋) 혹은 수상 혹은 내사 혹은 태수라고 일컬었는데 연혁은 같지 않으나 모두 백성을 다스리는 관원이었다.
당(唐) 무덕 초년에 군태수를 주자사로 고쳤다가 후에 주자사를 도로 고쳐 군태수로 하였으니 이때부터 주군의 사(史) 수(守)가 교대하여 명칭이 되었으나, 그실상은 한가지였다.
대송(大宋) 대송의 초기에는 천하를 다스림에 친민의 소임을 중하게 여겨 독수의 이름을 병풍에 써 놓고 바라보면서 그 사람의 착한 점과 악한 점을 반드시 그 이름 아래 써놓았으니 이로써 주 군이 다 잘 다스려졌다.
고려(高麗) 지주사 지군사를 두었는데 바로 군 태수이다.
본조(本調) 고려를 그대로 따랐다.
현령(현(縣)에 둔 지방장관)
춘추시대(春秋時代) 열국들이 서로 멸망하였는데 대부분 그 멸망시킨 땅을 현으로 만드니 현은 크고 군은 작았다.
한(漢) 한제에 무릇 현이 1만호 이상이면 영이라 하고 1만호 이하이면 장이라 하였으며, 후국에는 상이라 하였으니 진나라의 제도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진(晉)송(宋) 모드 현령이라 일컬었다.
당(唐) 적 기가 있어, 망 긴을 상 중 하로 나누어 6등급의 차를 두었다.
고려(高麗) 현령 감무가 이었으니 바로 옛날의 현령이다.
본조(本調) 고려를 그대로 따랐다.
본조에서는 주 부 군 현의 관칭을 처음에는 전조의 옛 제도를 그대로 따랐으나 뒤에 의론하는 이들이 부 주 군 현이 너무 많으니 큰 것으로 작은 것을 거느리고 작은 것은 큰 것에 귀속시켜야 잘 다스려 질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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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8.15
  • 저작시기20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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