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포이항쟁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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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포이항쟁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세포이항쟁 분석
1. 세포이항쟁 개관

2. 세포이항쟁의 시대적 배경

3. 세포이항쟁의 내부적 배경

4. 세포이항쟁의 도화선

5. 군인들의 명령거부

6. 민중폭동과의 결합

7. 반란군의 궐기

8. 요원의 불길

9. 인도의 잔다르크

10. 반란의 종식

11. 결론

12. 참고자료

본문내용

착수했다. 반란은 확실히 장기전의 모습을 띠어갔다. 그러나 한편 영국의 반격작전도 필사적이었다. 봄베이, 마드래스 양관구에서 파견된 군대가 북인도로 속속집결해 왔다. 펀잡의 시크병 보호국 네팔의 구르카병에게도 영국은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드디어 니콜슨을 대장으로 하는 펀잡으로부터의 원병 도착을 기하여 9월 14일에 영국의 반격이 개시되었다. 델리를 사수코자 한 세포이와 시민들로 이루어진 반란군은 우세한 영국군의 포격으로 심한 타격을 받았다. 영국군의 계속된 맹렬한 공격은 마침내 9월이 되자 델리를 다시 장악케 했다. 델리의 공방전은 처참을 극하여 영국군은 니콜슨을 포함하는 다수의 사상자를 내었다. 그리고 5월11일 이래 4개월 이상이나 끈 전투기간 중에 영국측의 델리 반공 총사령관이 4명이나 갈리는 큰 고전을 겪었다. 황제 바하루르샤는 포로가 되고 그 아들들은 처형당했다. 델리의 함락은 반란군과 영국군의 공수의 입장을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2월 초에 칸푸르가 함락되었다. 또 하나의 반란 중심지 리크나우도 일진일퇴의 격전을 벌인 끝에 다음해(1858년) 3월 칸푸르방면에서 진격해 온 영국의 대군과 북쪽 네팔로부터 남진해 온 쿠르카병에게 협공당하여 영국측에 돌아가고 말았다. 반란의 3대 거점을 상실한뒤에도 인도인들은 무기를 버리지 않고 각지에 흩어져 유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반란군의 패세는 돌이킬 수 없었으며 차츰 그 유력한 지도자들을 잃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유달리 이채를 띤 인물이 있었다. 줌나강 남쪽 기슭에 있는 예전의 소토호국 찬시의 여왕 락시미 바이가 바로 그였다. 그녀는 이 토호국의 왕실에 양녀로 들어갔었는데 1853년에 그 남편이 죽자 자식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그 영토는 영국에 강제 병합하였다. 그녀는 이러한 영국의 조치를 인정치 않고 스스로 여왕이라고 칭하여 주민들로 부터 동정과 신뢰를 받고 있었다. 세포이 반란이 일어나자 토후국의 주민들은 봉기하여 이에 참가하고 그녀를 자기네의 지도자로 삼았다. 그녀는 전쟁터에서 남장을 하고 앞장서서 싸워 영국군에 대한 완강한 저항운동을 훌륭하게 지도했으나 6월 중순의 전투중 영국측으로부터 맹공격을 받고 마침내 전사하게 된다. 락시마 바이는 이 때 23세 미만의 젊은 여성이었다.
10. 반란의 종식
봄베이나 마드래스 관구 및 하이데라바드 토후국 내에서도 세포이의 동요와 반란의 징조가 없지는 않았지만, 어느 곳이나 심한 탄압을 받아 싹이 트기도 전에 짓밟히고 마는 꼴이었다. 그리고 토후국들은 대체로 연명을 꾀하는 토후들의 통제 밑에 중립적 태도를 지켰다. 따라서 반란이 가장 치열한 형태를 취하게 된 곳은 벵골군 관할하에 있는 북인도의 영령지대였고 그중에서도 아와드가 가장 심했다. 영국은 아와드에 대한 철저한 소탕작전을 계속적으로 벌였지만 그런데도 완전한 진압에 성공하지 못한 채 다시 해를 넘겨 1858년을 맞이했다. 동년 4월 아와드의 반란군은 영국군의 전면적인 압박을 받고 네팔 국경지대로 추격당하여 반란에 적대하는 네팔을 앞에 두고 마침내 붕괴하고 말았다. 그 지도자 나나 사히브는 그후 전혀 소식이 끊기었다. 한편 그의 심복이요 전우였던 탄디아 토피는 전년 10월에 나르바다강을 건너 데칸고원으로 들어갔으며 이 지방에서 대규모 봉기를 꾀했으나 실패했고 도리어 영국군의 맹추격을 받음으로써 여기저기 피해 다녀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동지로 믿은 동료의 배신행위였으며 이리하여 그도 1859년 4월 중순에 영국군에 의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 시기에 이르러서야 1857년부터 3년간에 걸친 장기의 대반란이 거의 완전히 진압되었다고 할 수 있다.
11. 결론
이리하여 1857년 7월, 2년 3개월의 반란은 끝을 맺었다. 반란측도 잔학행위를 했다고는 하나 영국측의 보복은 바로 그 광폭함 그 자체였다. 인도인을 몇 사람을 한데 묶어놓고 대포를 쏘아대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영국의 반란 진압기념비는 콘포이(갠지스강가의 도시)와 기타 여러 곳에 세워졌다. 그러나 전사한 인도인들을 위한 기념비는 없다. 이 반란과 진압에 관해서 허위의 왜곡된 역사가 상당히 많이 이어져왔다. 인도인들이 거기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거의 활자화를 표현되지 못한다. 1857-58년의 반란은 약간의 민족주의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봉건적인 봉기였다. 그렇지만 동시에 영국인이 반란을 분쇄하는데 성공한 것은 제후와 그밖의 봉건적 족장들이 불참하거나 적극적으로 도운 덕분이었다. 반란에 가담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영국당국에 의해 자신의 권력이나 특권을 물려받지 못하게 되었거나 박탈당한 이들 아니면 그런 운명이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다고 두려워한 이들이었다. 세포이 반란 이후 영국의 정책은 약간 주저한 끝에 제후를 점차적으로 회유하여 포섭하여 병합하는 교묘한 정책을 취하였고 동시에 인도의 촌락 공동체를 중심으로 하는 고유의 가치 제도에 본질적인 변혁을 하지 않는다는 기본 방책을 세우고 군사력을 요지에 배치하는 식민지 체제를 정비하여 나갔다. 그 동안 1869년 수에즈 운하 개통, 인도 내지의 개발, 도로, 통신망 구축과 그 발전 및 본국 중심의 관세정책 실시 등에 의하여 본국 공업 제품의 인도 침투는 촉진되었고 한편 인도는 본국의 발전에 봉사하는 농업 식민지로서 변모를 보았다. 이어 영국은 인도 지배를 확실히 하기 위하여 네팔을 정복하고 아프가니스탄을 보호국화 했으며 3차의 전쟁끝에 미얀마(구 버마)를 인도 제국에 병합하였다.(1886년)
이 항쟁은 비록 무기 부족과 내부의 단결력 약화, 영국의 무력에 의해 성공은 못했지만 인도 역사상 최초의 반식민지적 민족 운동으로 이후 인도 민족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세포이 항쟁 이후 영국은 이름뿐인 무굴제국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동인도 회사를 해산시킨 다음 『인도 통치법』을 공포하여 인도를 영국 정부의 직접 지배하에 둠으로써 식민지 통치를 강화하고 경찰 기구를 확대시켜 종교적인 대립이나 카스트의 구별, 종족간의 대립을 부채질하여 <분할 통치>정책을 펴서 인도에 대한 영원한 지배를 꾀하였다.
12. 참고자료
오연석 김규호, 세계사, 동아출판사
조성을.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집현전
  • 가격1,500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08.10.14
  • 저작시기2008.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85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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