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의 기호학적 의미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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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2. 본론
2.1. 장미의 이름
2.2. 중세
2.3. 추리소설<장미의 이름>
2.4. 역사소설
2.5. ‘책’의 존재, 세상이라는 ‘책’
2.6. 웃음과 진실
2.7. 화자 앗조

3. 기호의 상대성

*참고문헌

본문내용

중세 사람들에게는 생소하지 않았을 터인 화법이나 시적인 용어를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문제는 상당히 오랜 기간 나를 괴롭혔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아리아와 레치타티보 사이의 音域을 바꾸는 문제를 해결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또 다른 문제는, 목소리의 포장, 혹은 화자가 나타낼 견해의 포장과 관련된 문제이다. 나는, 이 소설의 <나>가 다른 사람의 언어를 빌어 이 이야기를 하고있다는 걸 분명히 인식하고 있엇다. 물론 <서문>에서도 나는 아드소의 언어는, 비록 문헌학상으로만 기능하기는 하지만(하지만 이걸 누가 믿을 것인가) 적어도 다른 두 사람(즉 미비용과 발레 수도사)에 의해 여과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밝힌 바도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드소의 일인칭 기술이 문제를 제기했다. 잘 아시다시피 아드소는 나이 여든에 이르러 열 여덟 살 때 겪은 일을 기술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작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여든 살이 된 아드소인가? 아니면 열 여덟 살인 아드소인가? 물론 둘 다 말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게 기술적으로 까다로웠다. 그래서 나는 속임수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젊은 시절에 보고 느낀 것을 회상하는 대목에서 끊임없이 늙은 아드소를 등장시킨 것이다.
아드소는 나에게 대단히 중요했다. 처음부터 나는 한 사춘기 소년의 입을 통해 이야기(그 미스테리, 정치적, 신학적 사건, 심지어는 이러한 사건이 지니는 이중적인 의미까지)를 하게 하고 싶었다. 이때 내가 말하는 사춘기 소년은 문제의 사건을 경험하고 이것을 사진처럼 그려낼 수는 있되, 그 사건의 진정한 의미는 이해하지 못해야 한다(늙어서는, 곧 자기 스승도 가르쳐 준 적이 없는 적멸에 들기 때문에 끝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해야 한다). 말하자면 나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의 언어를 통해 독자들에게 이것을 이해하도록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 (1992) p.51~54.
앗조의 회상을 통해 중립적인 입장에서 독자들에게 말을 하고 있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당시 상황을 보면서 느꼈던 앗조의 생각들이 계속 반영되어 독자들은 작가의 의도대로 상상하며 읽게 되는 것이다.
3. 기호의 상대성
윌리엄의 태도는 기호에 관한 그의 입장과 무관하지 않다. 호르게는 기호를 불신한다. 그것이 문자로 적혀있든 그림의 형태든 아니면 눈으로 볼 수 있는 지상의 사물이든 어떤 것도 ‘진리 자체’를 드러내주지는 못한다. 기호는 기호일뿐 진리와 구분된다. 기호는 진리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 진리를 파괴하고 왜곡하는 수단으로 본다. 그러므로 호르게는 어떤 그림도, 어떤 상징도, 어떤 해학과 웃음도, 어떤 회의도 허용할 수 없었다. 이와같은 진리는 더 이상 보충될 필요도, 혁신될 필요도 없다. 이미 알려진 진리는 제대로 지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윌리엄은 진리란 늘 기호를 통해 접근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지식을 추구하는 과정은 가설을 설정하고 그것을 확인할 증거와 자료를 수집하고 검증을 한뒤 해석 절차를 거친다. 하지만 방법에는 늘 한계가 있고 알 수 있는 범위도 제한되어있다. 윌리엄은 세계의 질서와 그것에 대한 개념적 파악 가능성을 믿었던 중세의 거대 형이상학에 대해 로저 베이컨, 오컴, 스코투스의 반형이상학적, 기호학적 철학을 따른다. 이 철학의 특징은 ‘세계의 우연성’ 즉 현실 속에는 필연적으로 정해진 질서가 없고 모든 것은 신의 절대 의지에 달려있다는 믿음이다. 세계가 이렇게 있다는 사실 외에, 그것이 왜 그렇게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가 물을 필요가 없게 된다. 세계는 지금 이렇게 돌아가고 이렇게 존재할 뿐이다. 세계가 이렇게 있는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학자의 일이란,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주어진 그대로 기술하는 것으로 족하다. 세계는 우리가 기호를 매개로 탈출구를 찾아야 할 일종의 미로이다. 이와 같은 입장은 우리의 인식과 세계 구조를 동일시 하지 않고 오히려 그 사이에 거리가 있게 한다. 우리의 인식은 기호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기호는 세계 구조와 반드시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오컴의 윌리엄에 따르면 우리의 지식은 현실에 관한 기호에 관한 것이고 보편 개념을 다룰 때는 단지 ‘기호의 기호’를 다루는 것에 불과 하다. 우리가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직접적인 기호가 있는 개별자에 불과하다. 바스커빌의 윌리엄도 이 점에서는 오컴과 동일한 입장을 보인다. 이들의 이론은, 보이는 세계를 보이지 않는 세계의 상징으로 보던 12세기의 ‘형이상학적 기호학’에 대해 ‘인식론적 기호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인식론적 기호학이 반성하느 srl호는 사물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 사물의 표상이다. 기호는 사물과 갖는 유사성보다는 사물을 지창하는 데서 그 고유한 기능을 찾아볼 수 있다. 비록 확실성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기호를 더듬어 현실을 파악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 처한 삶의 조건이라는 생각이 여기에 들어있다. 절대 진리에 대한 맹신보다 오히려 인간존재의 애매성, 기호의 이중성, 현실적 구체적 삶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과 감각이 이와 같은 의식으로부터 비롯될 수 있다.
모두가 기호일 수 있다 하더라도, 기호를 넘어선 현실을 앗조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요한복음>1장 1절로 시작하는 소설 소두에서 이미 기호를 통해 진리를 파악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지적한뒤 끝에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하나의 완결된 원을 그리고 있다. 기호를 넘어선 현실은 그러나 우리가 언어로 그릴 수 있는 감각의 세계가 아니라 그것은 모든 구별과 차이, 무와 존재, 여기와 거기, 지금과 과거를 뛰어넘은 세계이다. 그곳에 이를 수 있는 길은 그러므로 침묵밖에 없다.
<참고문헌>
강영안, <기호와 진실>, <<문화와 기호>>기호학연구 1집 , 한국기호학회, 1995.
pp285~312.
로버트 숄즈, 유재천 역, 기호학과 해석, 현대문학, 1988.
움베르토 에코, 이윤기 역, 나는 <<장미의 이름>>을 이렇게 썼다. 열린책들, 1992.
, , 장미의 이름, 열린책들, 1996.
, , 기호학이론, 문학과 지성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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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12.01
  • 저작시기20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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