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사회과지도안 - 6학년 3단원 대한민국의 발전 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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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초등사회과지도안 - 6학년 3단원 대한민국의 발전 세안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수업을 계획하며...
Ⅰ-ⅰ. 수업 목표 및 수업 모형에 대한 분석
Ⅰ-ⅱ. 수업 내용 및 방법에 대한 분석

Ⅱ. 수업을 위한 기초연구

Ⅲ. 수업의 설계
1. 단원명
2. 단원 개관
3. 단원의 목표
4. 단원(주제)의 지도 계획
5. 단원의 평가 계획
6. 본시 교수․학습 과정안
◈ 역할 대본 ◈
<개별학습지1>
<개별학습지2>
<노래 가사 바꾸기 예시참고자료>
7. 교재연구
◉ 참 고 문 헌 ◉

본문내용

박탈을 내용으로 하는 신협약안(新協約案)은 이토와 하야시를 거쳐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에게로 전달되었다. 이토는 하세가와와 함께 전후 3차례에 걸쳐 고종을 알현하였으며 11월 16일 정동(貞洞)의 손탁호텔에서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이하 8대신을 위협하여 협약안의 가결을 강요하였다. 이어서 그들의 강요 아래 5시간이나 계속된 17일의 어전회의(御前會議)에서도 결론이 내려지지 않자 이토와 하야시는 일본 헌병 수십 명의 옹위 아래 회의장에 들어가 대신 각각에게 가부의 결정을 강요하였다.
이때 고종은 다만 정부에서 협상 조처하라고 하여 책임을 회피했을 뿐이며 한규설만 무조건 불가하다고 하였다. 한규설에 동조한 사람은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 민영기(閑泳綺)와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이었고,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하여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등은 모두 책임을 고종황제에게 전가하면서 찬성을 표시하였는데, 이들을 을사오적(乙巳五賦)이라 한다.
이 조약의 체결 소식이 1905년 11월 20일자의 《황성신문(皇城新聞)》에 신문사 사장 장지연(張志淵)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게재함에 따라 전국에 알려져 국민들의 조약 체결에 대한 거부와 일제에 대한 항쟁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 이상설(李相卨)의 상소를 비롯하여 종1품 이유승(李裕承), 법부주사(法部主事) 안병찬(安秉瓚), 원임의정대신(原任議政大臣) 조병세(趙秉世),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 민영환(閉泳煥), 전참찬(參贊) 최익현(崔益鉉), 특진관(特進官) 이근명(李根命), 종묘제조(宗廟提調) 윤태흥(尹泰興), 승지(承旨) 이석종(李奭鍾), 유림(儒林) 이건석(李建奭) 등이 강경하게 상소하였다.
한편 민영환은 상소로도 조약체결이 원점으로 되돌아가지 않자 유서로써 전국민에게 경고하면서 자결 순국하였고, 뒤이어 조병세, 전참판 홍만식(洪萬植), 학부주사(學部主事) 이상철(李相哲), 평양대(平壤隊) 일등병(一等兵) 김봉학(金奉學), 주영공사(駐英公使) 이한응(李漢應) 등도 죽음으로써 일본에 항거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의병운동이 전개되어 전참판 민종식(閔宗植)이 홍주(洪州)에서 거병한 것을 비롯하여 전라도에서 최익현이, 충청도에서는 신돌석(申乭石)이, 경상도에서는 유인석(柳麟錫)이 각각 의병을 일으켰다. 그 외 이근택이완용이지용 등을 암살하기 위해 개별적인 거사를 하기도 하였다.
* 헤이그 특사
1905년 일제가 한국의 황제를 비롯해서 각료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이에 따라 외교권을 박탈하여 외국에 나가 있는 사신(使臣)을 소환하고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여 실권을 하나하나 박탈하였다.
이럴 즈음인 1907년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26개국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열린다는 정보가 들어와, 4월 고종은 전의정부 참찬(參贊) 이상설(李相卨)과 전 평리원 검사(平理院檢事) 이준에게 회의에 참석할 신임장과 러시아 황제에게 보내는…폐하는 한국이 무고하게 화를 당하고 있는 정상을 생각하여 짐(朕)의 사절로 하여금 한국의 형세를 만국회의에 설명할 수 있게 한다면 만국의 여론에 한국의 원권(原權)이 회복될 수 있을까 기대하며…라는 회의참석의 주선을 부탁하는 내용의 친서를 휴대하게 하여, 이들 대표에게 만국회의에 나가 당시 한국의 실상을 전 세계에 알리도록 하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일제는 고종을 감금하다시피 하고 그들의 현지공관과 회의 대표를 통해 한국대표의 회의참석 방해공작을 폈다. 이 때문에 의장 넬리도프는 책임을 형식상의 초청국인 네덜란드에 미루고, 네덜란드는 을사조약은 각국 정부도 이미 승인하였으니 한국 정부에는 자주적인 외교권을 승인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우리 대표의 참석과 발언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신문인 W.스테드의 주선으로 한국대표는 평화회의를 계기로 개최된 국제협회에서 호소할 기회를 얻었다. 이때 러시아어프랑스어영어 등 외국어에 능통한 젊은 이위종이 세계의 언론인에게 조국의 비통한 실정을 호소한 연설의 전문(全文)은한국을 위하여 호소한다라는 제목으로 세계 각국에 보도되어 주목을 끌었으나 구체적인 성과를 얻지 못하였으며, 이에 밀사 중 이준은 울분한 나머지 그곳에서 분사(憤死)하였다.
민영환
여흥. 자 문약(文若). 호 계정(桂庭). 겸호(謙鎬)의 아들. 명성황후의 조카. 백부(伯父)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태호(泰鎬)에게 입양하였다. 1877년(고종 14)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고, 이듬해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그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하였다. 그 뒤 정자(正字)수찬 등을 거쳐 1881년 동부승지(同副承旨), 1882년 성균관대사성으로 승진하였다. 그 해 생부 겸호가 임오군란으로 살해되자, 벼슬을 버리고 3년간 거상(居喪)하였다.
장지연
본관 인동(仁同). 호 위암(韋庵)숭양산인(嵩陽山人). 초명 지윤(志尹). 자 순소(舜韶). 경북 상주(尙州) 출생. 1894년(고종31) 진사(進士)가 되고, 이듬해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의병의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각처에 발송하고, 1897년 아관파천 때 고종의 환궁(還宮)을 요청하는 만인소를 기초하였다. 1899년《시사총보(時事叢報)》의 주필로 항일구국의 필봉을 휘둘렀으며, 한때 사직하고 광문사(廣文社)를 설립, 정약용의《목민심서》《흠흠신서》등을 간행, 1901년 황성신문사 사장이 되어 민중계몽과 자립정신 고취에 전력을 다하였다.
참 고 문 헌
교육 인적 자원부(2006), 초등학교 교사용 지도서 6-1
교육 인적 자원부(2004), 초등학교 사회 교육과정 운영 자료
부산교육대학교 부설초등학교(2004), 생각하는 수업, 새부산문화사
부산광역시 교육청(2003), 좋은 수업, 신나는 교실, 새부산문화사
서울특별시서부교육청(2002), 즐거운 수업 이렇게 시작해 볼까요?
부산광역시 교육청(2002), 초등학교 사회과 교수학습의 길잡이
부산교육대학교 부설초등학교(1998), 자기주도적 학습 방법의 실제Ⅰ, 새부산문화사
최병모 외 공역(1992), 사회과 교수법과 교재 연구, 서울 : 교육과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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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12.01
  • 저작시기20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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