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 론
Ⅱ. 본 론
1. 경기체가의 이해
(1) 명칭
(2) 형식적 특징
(3) 장르적 성격
(4) 경기체가 작품
2. 경기체가의 문학사적 흐름
(1) 경기체가의 생성기
(2) 경기체가의 발전·변천기
(3) 경기체가의 쇠퇴기
Ⅲ. 결 론
※ 참고문헌
Ⅱ. 본 론
1. 경기체가의 이해
(1) 명칭
(2) 형식적 특징
(3) 장르적 성격
(4) 경기체가 작품
2. 경기체가의 문학사적 흐름
(1) 경기체가의 생성기
(2) 경기체가의 발전·변천기
(3) 경기체가의 쇠퇴기
Ⅲ. 결 론
※ 참고문헌
본문내용
형제곡
미상
미상
형제의 우애와 조선의 문화를 칭송
악장가사
불우헌곡
성종
정극인
전 6장. 이두로 표기
불우헌집
화전별곡
중종
김구
해남에 귀향가서 그곳에서의 생활을 읊은 것. 전 6장.
자암집
(3) 경기체가의 쇠퇴기 (1532~1860)
조선조 사회가 안정되면서 더 이상 악장이 필요하지 않게 되고 문이재도의 문학관이 확립되자 훈구파는 사림파의 비판과 공격을 받으면서 점차 힘을 잃게 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나라의 안녕과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국태민안을 기원하고 왕실을 찬양하는 악장계 경기체가들이 필요했다. 그러나 성종대를 지나면서 제도와 문물이 완비되고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게 되자 우선 악장이 사라지면서 더 이상 궁중의 연향에서 경기체가가 필요없게 되었다. 더욱이 우리말로 된 시조와 가사가 성립되어 노래를 통해 유학의 이념을 충분히 전파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더 이상 한문투의 경기체가는 필요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도학이 힘을 얻게 되자 서서히 퇴조하다가 조선 중기에 발전하기 시작하는 가사문학과 그 세를 달리하게 된다. 이이의 제자인 권호문이 지은 「독락팔곡」은 가사문학의 4음보율이 나타는 등 그 형태를 거의 잃게 된다.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산수 사이에서 노닐며 도학을 닦는 산림처사의 자세를 나타내고 있으나, 찬양하고 감탄할 만한 대상은 떠오르지 않아 경기체가의 관습을 따르지 못하고, 감화를 나타낼 때에는 서정적인 표현을 사용한다. 형식이 산만해 산문에 가까운 작품을 내놓아 경기체가의 해제를 촉진한다.
이전까지는 「독락팔곡」을 경기체가의 마지막 작품으로 보았으나, 조선후기 느지막이 1860년에 민규라는 사람이 지은 <충효가> 한 편이 발견되어 이를 최후의 경기체가로 본다.
마지막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들의 내용을 아래 표에 제시하였다.
작품명
연 대
작 자
내 용
출 전
독락팔곡
(獨樂八曲)
선조
권호문
자연에서 느낀 기쁨을 노래. 전 7장
송암속집
충효가
(忠孝歌)
철종 11년
(1860)
민규
유영일의 효행을 찬양한 노래.
최후의 경기체가
고흥유씨세보
Ⅲ. 결 론
경기체가는 조선전기 사대부 국문시가의 대표적인 갈래로 자리 잡았다. 그 때를 경기체가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물을 열거하면서 감탄하는 기본요건이 경기체가의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요인이었다. 가사가 성장하는 데 비례해 몰락하는 것이 필연적인 추세였다. 생활이나 심성을 조용하게 살피며 가다듬기에 부적당해 사라지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을 지녔다는 평을 듣는다. 하지만 600년동안 현존해 온 작품들을 통해 경기체가의 연구는 명칭 · 장르사 · 작자계층 · 형식 및 장르적 성격과 작품성격 · 작품구조 · 표현특징 · 미의식 등의 전체적인 검토에서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는 것을 엿볼 수 있었다.
※ 참고문헌
- 박경주, 『경기체가 연구』, 이회문화사, 1996.
- 임기중 외, 『경기체가 연구』, 태학사, 1997.
- 조동일, 『한국문학통사2』, 지식산업사, 2005.
- 최선경, 「경기체가의 장르와 주제의식」,『한국 고전 시가사』, 집문당, 1997.
미상
미상
형제의 우애와 조선의 문화를 칭송
악장가사
불우헌곡
성종
정극인
전 6장. 이두로 표기
불우헌집
화전별곡
중종
김구
해남에 귀향가서 그곳에서의 생활을 읊은 것. 전 6장.
자암집
(3) 경기체가의 쇠퇴기 (1532~1860)
조선조 사회가 안정되면서 더 이상 악장이 필요하지 않게 되고 문이재도의 문학관이 확립되자 훈구파는 사림파의 비판과 공격을 받으면서 점차 힘을 잃게 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나라의 안녕과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국태민안을 기원하고 왕실을 찬양하는 악장계 경기체가들이 필요했다. 그러나 성종대를 지나면서 제도와 문물이 완비되고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게 되자 우선 악장이 사라지면서 더 이상 궁중의 연향에서 경기체가가 필요없게 되었다. 더욱이 우리말로 된 시조와 가사가 성립되어 노래를 통해 유학의 이념을 충분히 전파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더 이상 한문투의 경기체가는 필요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도학이 힘을 얻게 되자 서서히 퇴조하다가 조선 중기에 발전하기 시작하는 가사문학과 그 세를 달리하게 된다. 이이의 제자인 권호문이 지은 「독락팔곡」은 가사문학의 4음보율이 나타는 등 그 형태를 거의 잃게 된다.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산수 사이에서 노닐며 도학을 닦는 산림처사의 자세를 나타내고 있으나, 찬양하고 감탄할 만한 대상은 떠오르지 않아 경기체가의 관습을 따르지 못하고, 감화를 나타낼 때에는 서정적인 표현을 사용한다. 형식이 산만해 산문에 가까운 작품을 내놓아 경기체가의 해제를 촉진한다.
이전까지는 「독락팔곡」을 경기체가의 마지막 작품으로 보았으나, 조선후기 느지막이 1860년에 민규라는 사람이 지은 <충효가> 한 편이 발견되어 이를 최후의 경기체가로 본다.
마지막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들의 내용을 아래 표에 제시하였다.
작품명
연 대
작 자
내 용
출 전
독락팔곡
(獨樂八曲)
선조
권호문
자연에서 느낀 기쁨을 노래. 전 7장
송암속집
충효가
(忠孝歌)
철종 11년
(1860)
민규
유영일의 효행을 찬양한 노래.
최후의 경기체가
고흥유씨세보
Ⅲ. 결 론
경기체가는 조선전기 사대부 국문시가의 대표적인 갈래로 자리 잡았다. 그 때를 경기체가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물을 열거하면서 감탄하는 기본요건이 경기체가의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요인이었다. 가사가 성장하는 데 비례해 몰락하는 것이 필연적인 추세였다. 생활이나 심성을 조용하게 살피며 가다듬기에 부적당해 사라지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을 지녔다는 평을 듣는다. 하지만 600년동안 현존해 온 작품들을 통해 경기체가의 연구는 명칭 · 장르사 · 작자계층 · 형식 및 장르적 성격과 작품성격 · 작품구조 · 표현특징 · 미의식 등의 전체적인 검토에서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는 것을 엿볼 수 있었다.
※ 참고문헌
- 박경주, 『경기체가 연구』, 이회문화사, 1996.
- 임기중 외, 『경기체가 연구』, 태학사, 1997.
- 조동일, 『한국문학통사2』, 지식산업사, 2005.
- 최선경, 「경기체가의 장르와 주제의식」,『한국 고전 시가사』, 집문당,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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