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보상과 부보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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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보부상의 이동경로-저산팔구(苧産八區)의 예

부보상의 차림새

부보상단의 활동

결론과 소감

참고문헌 및 자료

본문내용

로에서 객사 하기도 한다. 부보상들은 이런 소문을 들으면 거침없이 도우니 비록 혈육을 나눈 형제가 없더라도 형제가 있는 것이로다. ......이에 부보상들은 혹시라도 삽혈동맹(血同盟) 백제가 망한 뒤 신라 문무왕 5년(665)에, 문무왕이 중국 당나라의 사신 유인원, 전 백제 임금의 아들 융(隆)과 함께 웅진 취리산에서 한 맹세. 신라의 팽창을 억제하여 자기 나라의 지배하에 두고자 한 당나라의 의도로 이루어진 것으로, 전 백제 왕자 융을 웅진 도독으로 삼아 그 선조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봉토를 지키며, 신라와 백제가 오랜 원한을 풀고 서로 화친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였다.
을 소홀히 할 수 없고 옛 친구를 힘써 도와서 돈독한 정의(情誼) 서로 사귀어 친해진 정.
가 영원히 잊혀지지 않도록 더욱 힘쓸지어다.
위는 1857년 7월의 신창설 한성부 완문의 서문이다. 이훈섭, 『부보상을 아십니까』, 한마음사, 2005, 126쪽~127쪽
'살아서 이익 없고 죽어서 손해없는 자'가 되는 것이 부보상이라 하는데, 부보상들의 활동이 활발해지기 전의 시기에는 확실히 그 말이 들어맞았을 것이다. 부보상이 존재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삼국시대 이전일 것인데, 인정을 받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서였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부보상들이 겪었던 설움과 이러한 경험을 함께 나눈 부보상 동지들에 대한 정이 있음을 이 글에서 느낄 수가 있다.
조선 후기 지방 장시의 발달은 부보상의 발달과 함께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부보상들은 자신들이 건국 태조인 이성계와 인조를 도우고, 각종 나라의 재난에 자신들의 힘이 된 것을 자랑으로 여기면서 부보상으로서의 자신의 일을 해나가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 부보상단이 형성, 발전함으로서 부보상 자체는 물론이고 지방 장시가 더욱 커져서 경제가 발전하는 데 보탬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부보상단의 엄격한 규율과 그에 따른 처벌 조항 등은 부보상을 통제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되었으며, 결국은 농업을 상업보다 중시하던 국가에 의해 공인받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우리가 흔히 '보부상'이라고 알고 있는 부보상은 단순히 정처없이 장터를 떠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존재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들만의 강력한 조직체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 조직체계를 바탕으로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는 나름의 보탬이 되기도 했다. 부보상이란 상인으로서 자신의 이익을 중요시여기는 면이 있으면서도, 다른 면으로는 같은 부보상 동지끼리의 우정을 중요시하게 생각하는 면이 있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어떤 면으로 생각해보면 아무리 상인으로서 자신의 이익을 중시한다고 해도 오랜 세월 동안 뿌리 깊숙이 박혀버린 유교 의식의 벽을 넘을 수는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참고문헌 및 자료
네이버 부보상 카페(http://cafe.naver.com/bubosang)
조재곤, 『근대 격변기의 상인 보부상』,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3
이훈섭, 『부보상을 아십니까』, 한마음사, 2005
『시간여행 역사속으로』, 2004.5.24, KBS 미디어
  • 가격1,500
  • 페이지수7페이지
  • 등록일2009.01.02
  • 저작시기2008.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12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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