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덕왕 시대의 신라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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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들어가는 말

Ⅱ. 『삼국유사』「왕력」으로 본 경덕왕

Ⅲ. 경덕왕 代의 여러 佛事

Ⅳ. 『삼국사기』로 대조해 본 당대상황

Ⅴ. 『삼국유사』를 통해 본 민중의 生活 분석

Ⅵ. 경덕왕의 대처 및 인식

Ⅶ. 맺는 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순정세력 대신 의충세력을 기용하여 연계하였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사실 당대의 정치사적 연구를 살펴보면 이러한 방면으로서 고찰한 게 많이 있다.
실제로 경덕왕 대를 이은 혜공왕 대를 보면 천재지변이 많이 일어난다. 이는 하늘의 말을 어겨서는 안 된다는 경고이기도 하지만, 당대 어지러운 상황을 말해주기도 한다. 『삼국유사』제 2 「기이」제 2 ‘혜공왕’. 이재호 譯 1권 p.243 ~ p.245. 당시의 변고에 대한 기사는 『삼국사기』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는 혜공왕이 너무나도 잦은 천재지변을 맞으면서 그만한 부담을 떠안게 된 것을 말하는 것임과, 당시 귀족들과의 세력다툼의 한 가운데에서 불리한 위치에 서 있던 것을 의미하지 않나 싶다. 실제로 혜공왕은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주로 태후가 섭정하였으며,(이 경우 외척이 끼어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민심의 확보를 위하여 죄수의 사면이 잦았다. 그러나 혜공왕 치세기간 동안에 ‘대공과 대렴의 난’, ‘김융의 난’, ‘김은거의 난’, ‘염상과 정문의 난’이 일어남으로 사회가 굉장히 불안정하였다. 그리고 결국 혜공왕 또한 김양상과 김경신에 의하여 만월부인과 살해당하게 된다.
이러한 이야기는 당대 신라의 상황을 후대에 들어서 경덕왕에 대한 비판적인 논조가 녹아들어가서 생긴 이야기가 아닌가 한다.
하늘에 무리한 요구를 함으로까지 아들을 낳으려고 한다. 기존의 예처럼 경덕왕은 승려를 통하여 하늘에게 빌어 아들을 점지 하려고 하는데, 이때 표훈대덕이 천계를 들락날락거린다. 하늘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경덕왕에게 선택을 하게 한다.
아들이냐? 아니면 나라의 운명이냐?
경덕왕은 여기에서 아들을 선택한다. 아마 자신의 정치세력의 존속을 위한 선택이라고 생각되는데, 후세의 사람들이 이를 가지고 꾸며서 경덕왕이 자신만을 생각하였다는 것으로 연결하기 위하여 이러한 이야기를 꾸미지 않았나 싶다.
어찌 되었든지 이 설화를 곧이곧대로 본다면 당시 경덕왕의 인식을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단순히 왜곡되어 기록된 것이 아닌, 「안민가」와 연계시켜서 생각해 본다면, 반드시 거짓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조금 심사숙고 해볼만한 가치가 있지 않나 싶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짧은 기사를 하나 살펴보자.
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4년에 오악五嶽 삼산三山의 신들이 간혹 육신을 나타내어 대궐 뜰에서 왕을 모셨다. 『삼국유사』제 2 「기이」제 2 ‘경덕왕과 충담사 표훈대덕’. 이재호 譯 1권 p.236
어디에선가 많이 본 듯한 기사이다. 여기에서 나오는 산신들의 춤은 헌강왕 때의 ‘처용랑과 망해사’설화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삼국유사』제 2 「기이」제 2 ‘처용랑과 망해사’. 이재호 譯 1권 p.268 ~ p.269
여기에서의 산신들은 주문을 외우면서 경고를 하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나지만, 용례를 생각해본다면 경덕왕 대의 분위기를 돌려서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때는 경덕왕 24년으로, 이 해에 경덕왕은 승하하게 된다. 그럼 경덕왕의 승하 후에 왕위를 계승한 혜공왕 시기의 혼란을 미리 예고한 것이란 말인가?
Ⅶ. 맺는 말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당시 시대가 천재지변이 너무나도 많아서 일일이 구제하지 못한 상황이라고 한다면야 아무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경덕왕과 당시의 여러 귀족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생각하고, 권위를 생각하여 대규모의 불사를 행하였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재화가 들어가고, 수많은 租가 들어간 불사의 뒷면에는 흉년으로 죽어가고, 가난에 찌들어 가는 민중이 있었다.
난 경덕왕의 失策이라고 단정하여, 이를 강하게 비판 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경덕왕이나 당시 귀족들의 인식을 살펴보면, 결국 중요한 건 백성이 아닌 자신들이라는 것을, 그리고 백성은 자신들을 위한 존재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어렵잖게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을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흔히들 이에 대해 당시의 통시대적 흐름이라고 말하지만, 꼭 그렇게만 말하기엔 그들에게 책임이 없다는 말을 하기 또한 어려울 것이다.
물론 경덕왕도 나름대로의 노력은 많이 하였다. 그러나 그는 적극적인 구휼을 통하여 백성을 구제하려고하는 모습은 적었다.
신라의 원성왕을 살펴보자. 그의 재위 2년을 보면 가을 7월에 가뭄이 들자 9월에 곡식 3만 3천 2백 40섬을 내어 구제하였고, 겨울에도 곡식 3만 3천석을 내어주었다. 그리고 6년에는 벽골제를 증축하여 농사에 도움이 되게 하였으며, 5월에는 한산과 웅천의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누어주었다. 11년에도 가뭄이 들자 죄수들의 형량을 낮추었으며, 12년에도 곡식을 풀어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삼국사기』권 제 10 「신라본기」 제 10 ‘원성왕’
이 또한 어찌 보면 자신의 취약한 권력기반을 보조하기 위하여 일부러 시혜를 베푼 것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원성왕은 경덕왕에 비하여 더욱더 적극적으로 민생구제에 힘쓴 것은 누구도 의심 할 수 없을 것이다.
난 사서에 적혀있지 않은, 백성의 실생활을 탐구해보려고 나름대로 노력하였다. 사서에는 민중의 실생활에 대해서 적혀있지 않지만, 이를 밝히려다보니 많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당시의 위정자들은 백성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국난을 타파하는 방법을 또 다른 방법에서 모색하였던 것 같다. 그리고 자신들의 길을 옳다고 여기고 정작 백성의 바람과는 동떨어진 선택을 하였다고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씁쓸하다. 현재의 위정자 또한 진정 민중의 목소리를 듣고 정치를 행하는가? 이러한 차이는 결국 의식의 차이에서 이루어진다고 봐야 하는가?
※ 참고문헌
『三國遺事』
『三國史記』
『관직명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일연 作 이재호 譯, 2006, 『삼국유사 1』, 솔
일연 作 이재호 譯, 2002, 『삼국유사 2』, 솔
한국역사연구회, 2004, 『고대로부터의 통신』, 푸른역사
강만길 등저, 1994, 『한국사 3 ; 고대사회에서 중세로 1』, 한길사
김정배 편저, 2006, 『한국고대사입문 3』, 신서원
金英美, 1994, 『新羅 佛敎思想史 硏究』, 民族社,
李志映, 1991, 「〈에밀레종〉전설과 그 소설적 변용 연구」,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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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1.02
  • 저작시기20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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