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삼위일체론적인 사고의 필요성
2. 종교다원주의의 실체
3. 종교다원주의 비판
4. 다원주의의 그리스도 이해
5. 삼위일체론에서의 종교다원주의 평가
Ⅲ. 결론
<참고문헌>
Ⅱ. 본론
1. 삼위일체론적인 사고의 필요성
2. 종교다원주의의 실체
3. 종교다원주의 비판
4. 다원주의의 그리스도 이해
5. 삼위일체론에서의 종교다원주의 평가
Ⅲ.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리였던 삼위일체론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이들의 주장은 단군신화를 삼위일체론적으로 해석하려 했던 윤성범의 토착화신학의 시도보다 훨씬 더 과격하다고 하겠다. 우리는 이 점에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싶다. 과연 기독교의 독특성을 포기하면서까지 종교다원주의를 옹호하며 타종교와의 대화를 시도해야 하는가?
이점에서 종교다원주의는 배타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포괄주의 보다 더 과격한 운동임을 알 수 있다.
종교다원주의의 논의에서 성령에 관한 언급을 찾아보기 쉽지 않는데, 이점은 종교다원주의의 또 하나의 특징이다. 기독론이 아니라 기독론을 전제한 성령론에 입각한 포괄주의를 시도할 수는 없을까? 즉 성령은 그리스도를 준비시킨 이로서 그리스도가 찾아온 자들도 준비시키시는 분이다. 그러나 문화나 종교는 그 자체로 선한 것이 아니라 꾸중과 경책을 받아야 마땅하다. 이 점에서 비기독교적 종교들을 동정적이고 비판적으로 접근할 수는 없을까?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였도다."(행 14:15-16) 이런 복음전도는 다원주의자들이 비판하듯이 제국주의의 전횡이 아니라 "온유와 두려움"(벧전 3:16)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기독자의 변증은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나타난다. 이 점에서 예수 이름에 근거한 내용적 배타주의는 방법적 포괄주의를 지녀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 간의 대화가 때로는 새로운 선교의 방법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선교와 전도에 의한 개종은 궁극적으로는 성령의 역사에 속한다. 진리의 영인 성령님은 모든 문화와 종교를 초원하여 종교의 본질을 드러내며, 모든 문화나 종교가 지니는 비 본질을 심판하신다.
Ⅲ. 결론
다원주의는 개별성을 존중하는 운동이다. 따라서 각 종교의 정체성과 특수성을 확인시켜주는 계기가 된다. 이는 무책임한 혼합주의를 금하며 도전과 충격을 줄 수는 있다. 우리가 다원성을 거절할 수 없는 한, 다원주의의 한 양태로서 종교 간의 대화는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구원 등은 다른 종교의 개념으로 환원될 수 없는 독특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 중심적인 종교다원주의를 결코 수용할 수 없다. 유해무, http://www.kcsi.or.kr/news/notice/newsletter/news54/4.html, 9월 월례발표회
<참고문헌>
전호진, 종교 다원주의와 타종교 선교 전략 (개혁주의신행협회, 2003)
유해무(한국칼빈학회), 칼빈신학해설(대한기독교서회, 2005)
유해무, http://www.kcsi.or.kr/news/notice/newsletter/news54/4.html, 9월 월례발표회
방기섭, http://kdaq.empas.com/dbdic/db_view.jsp?ps=src&num=3076385, 2003-05-01
이점에서 종교다원주의는 배타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포괄주의 보다 더 과격한 운동임을 알 수 있다.
종교다원주의의 논의에서 성령에 관한 언급을 찾아보기 쉽지 않는데, 이점은 종교다원주의의 또 하나의 특징이다. 기독론이 아니라 기독론을 전제한 성령론에 입각한 포괄주의를 시도할 수는 없을까? 즉 성령은 그리스도를 준비시킨 이로서 그리스도가 찾아온 자들도 준비시키시는 분이다. 그러나 문화나 종교는 그 자체로 선한 것이 아니라 꾸중과 경책을 받아야 마땅하다. 이 점에서 비기독교적 종교들을 동정적이고 비판적으로 접근할 수는 없을까?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였도다."(행 14:15-16) 이런 복음전도는 다원주의자들이 비판하듯이 제국주의의 전횡이 아니라 "온유와 두려움"(벧전 3:16)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기독자의 변증은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나타난다. 이 점에서 예수 이름에 근거한 내용적 배타주의는 방법적 포괄주의를 지녀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 간의 대화가 때로는 새로운 선교의 방법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선교와 전도에 의한 개종은 궁극적으로는 성령의 역사에 속한다. 진리의 영인 성령님은 모든 문화와 종교를 초원하여 종교의 본질을 드러내며, 모든 문화나 종교가 지니는 비 본질을 심판하신다.
Ⅲ. 결론
다원주의는 개별성을 존중하는 운동이다. 따라서 각 종교의 정체성과 특수성을 확인시켜주는 계기가 된다. 이는 무책임한 혼합주의를 금하며 도전과 충격을 줄 수는 있다. 우리가 다원성을 거절할 수 없는 한, 다원주의의 한 양태로서 종교 간의 대화는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구원 등은 다른 종교의 개념으로 환원될 수 없는 독특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 중심적인 종교다원주의를 결코 수용할 수 없다. 유해무, http://www.kcsi.or.kr/news/notice/newsletter/news54/4.html, 9월 월례발표회
<참고문헌>
전호진, 종교 다원주의와 타종교 선교 전략 (개혁주의신행협회, 2003)
유해무(한국칼빈학회), 칼빈신학해설(대한기독교서회, 2005)
유해무, http://www.kcsi.or.kr/news/notice/newsletter/news54/4.html, 9월 월례발표회
방기섭, http://kdaq.empas.com/dbdic/db_view.jsp?ps=src&num=3076385, 2003-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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