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득 붉은 수프가 가득 든 수프 볼 하나가 곧 넘칠 듯 가슴속에서 출렁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넘치면 안 돼. 걸음을 늦추면서 조심했지만 수프는 금세 목구멍까지 역류해 올라왔다. 그리고 입가를 흉하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이 혼하자. 집 앞까지 거의 다 왔을 때 여자의 입에서 그 말은 결국 새어나왔다. 남편이 걸음을 멈췄다. 조금만 넘쳤을 때 내려놓아야지, 여자는 생각했다. 추운 1월의 끄트머리였다. 일주일이나 내리던 폭설이 멈추자 눈은 더 이상 내리지 않았지만 아파트 앞 곳곳에 잔설이 쌓여 길이 딴딴하게 얼어 있었다. 왜? 남편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물었다.
“더 이상 당신, 사랑하지 않아.”
누군가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치려고 할 때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은 왜 언제나 똑같을까. 평소에는 결코 하지 않던 말을 이럴 때만 하게 된다. 신이 그런 목적으로 그 단어를 창조한 건 아닐 것이다.
“……그래서? 그게 문제가 돼?”
남편의 하얀 더플코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수프 볼이 더 기울었다. 자신이 비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자는 애꿎은 반대쪽을 기울여 균형을 잡으려고 했다.
“예 전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어. 답답해. 어머님 아버님이 나 안 좋아하시는데 착한 며느리인 척하는 거 싫어. 내가 담배도 피우고 술도 마신다는 거, 우리 집이 사실은 그분들이 아시는 집이 아니라는 거, 더 이상 숨기고 싶지도 않고.”
“그게 문제였어? 그런 거, 다 감수하기로 한 거 아니었니? 이제 와서 싫어진 거야? 알았어. 부모님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다시 그런 얘기 하지 마.”
남편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여자의 팔을 힘주어 잡았다. 그 무심한 표정을 보자 애써 균형을 잡아놓은 수프 볼이 다시 휘청였다. 감수하기로 한 적은 없는데. 난 그냥 입을 다물었을 뿐인데. 붉은 수프가 쿨렁쿨렁 넘쳐나왔다.
“그게 문제 아냐. ……사실은 다른 사람 좋아해.”
남편이 웃음을 터뜨렸다.
“거짓말. 내가 그러면 몰라도 네가 그런다고? 네가 어떻게 다른 사람을 좋아해.”
갑자기 수프 볼이 확 뒤집혔다.
“당신 후배야. 당신 아팠던 날 영화 보러 나간 적 있었지. 그날부터 같이 있었어. 계속 같이 있고 싶어.”
남 편은 그 전날부터 독감에 걸려 있었다. 그는 예매해둔 표 썩히기가 아깝다며 아무 의심 없이 회사 후배에게 표를 돌렸다. 이거 우리 와이프가 꼭 보고 싶어하는 영화거든. 에스코트 좀 부탁해. 남편은 후배에게 저녁 메뉴까지 신경 써서 추천해주었다. 그날 남편의 후배와 여자는 영화를 보지 않았다. 집에 들어오기 전에 여자는 PC방에 들러 인터넷에서 그 영화 줄거리와 영화잡지에 실린 영화평을 꼼꼼히 읽었다. 남편에게 말해줄 별점까지 정했다.
여 자는 더 이상 남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빨간 코트를 적시고 흘러나온 수프 국물로 여자의 발 밑이 흥건했다. 붉게 물든 양파와 피망이 눈 위에서 흉하게 굴러다녔다. 여자는 망연자실하게 서 있다가 아직 쏟아지지 않은 두 개의 수프 볼마저 놓아버렸다.
“……같이 지내기로 했어. 이제 돌이킬 수 없어.”
“거짓말. 너 지금 거짓말하는 거지. 너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며. 나한테 얘기했잖아. 심심해서, 하지도 않은 나쁜 짓 만들어서 고해성사할 때 말하곤 했다고.”
남 편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지고 눈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성정이 약한 사람이었다. 붉게 감돌던 노을이 밤으로 변해가는 하늘의 푸른 멍빛에 먹히는 것만 보아도 눈꼬리가 기름해지는 남자였다. 전에 사귄 사람들과의 일을 간신히 잊는 데만 삼 년이 걸린 사람이었다. 여자는 그의 얼굴에 하얗게 금이 가는 걸 보면서 자신이 잔인하게도 점점 떳떳해진다고 생각했다. ‘너무 오래 참았어.’ 그 생각만 깨진 수프 볼 위를 몇 번이고 맴돌았다. 조각나기 시작한 남편의 얼굴 표정은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주 저앉아 있는 남편을 내버려두고 집으로 혼자 들어가 가방을 꺼냈다. 시부모님은 외출해 집에 없었다. 빠르게 옷가지 몇 개를 챙겨넣으면서 여자는 한 가지만 생각했다. 그 사람은 다음날인 월요일 회사를 옮기기로 했다. 조건이 좋은 회사로 스카우트되어 가는 것이었다. 그가 남편과 얼굴을 마주칠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이었다. 곧 아파트를 마련하겠다고 그 사람은 말했다. 여자는 결혼하는 데 일 년쯤 걸렸으니 이혼하는 데는 아마 좀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차근차근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깨져버린 그릇에 다시 뭘 담을 수는 없었다. 여자에게 이혼은 어릴 때 사전에서 찾아본 몇 줄의 설명만큼이나 쉬운 일로 보였다.
그 건 국어사전을 만든 사람들의 거짓말이었다. 남편의 얼굴을 몇 번 더 대하면서 여자는 법원에 몇 번 드나들었다. 법원에 가야 하는 날마다 여자는 택시를 탔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몸 전체가 갈색으로 변하고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져 땅바닥에 달라붙는 것 같아 지하철역까지 걸을 수가 없었다. 그 사람에게도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 역시 그녀와 헤어지는 데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일 년 사귄 사람인데 많이 힘들어한다고 했다. 여자는 서교동에 조그만 원룸을 하나 잡고 이모의 집에서 나왔다. 그 작업실에서 몇 편의 동화를 썼다. 어린이들에게 환경의 중요성을 깨우쳐주는 동화였다. 생각 없이 쓰레기를 버리고 나뭇가지를 꺾기 좋아하던 아이가 어느 날 지구가 아파하는 소리를 듣고 잘못을 뉘우친다는 내용이었다.
책 이 나오고 다른 출판사에서 책을 하나 더 내게 됐다. 왜 갑자기 일이 쏟아지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여자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바닷빛 머리카락을 지닌 요정 여왕이 아이들에게 잃어버린 꿈을 찾아주는 스토리였다. 서양의 판타지 소설들을 한동안 참고삼아 읽으면서 여자는 자기 세계가 넓어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이 전화를 받지 않기 시작한 건 그 책이 나온 날부터였다. 무슨 일이 있겠지, 그렇게만 생각했다. 현실은 동화와 다르니까. 여자는 시내로 나가 영화를 보기로 했다. 극장 불이 꺼진 뒤에도 전화기를 켠 채 두었다. 용감한 소녀가 옷장 문을 열고 들어가 눈 덮인 나니아의 땅을 처음 밟는 장면에서 여자는 이상하게 속이 울렁거렸다. 눈이 너무 새하
이 혼하자. 집 앞까지 거의 다 왔을 때 여자의 입에서 그 말은 결국 새어나왔다. 남편이 걸음을 멈췄다. 조금만 넘쳤을 때 내려놓아야지, 여자는 생각했다. 추운 1월의 끄트머리였다. 일주일이나 내리던 폭설이 멈추자 눈은 더 이상 내리지 않았지만 아파트 앞 곳곳에 잔설이 쌓여 길이 딴딴하게 얼어 있었다. 왜? 남편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물었다.
“더 이상 당신, 사랑하지 않아.”
누군가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치려고 할 때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은 왜 언제나 똑같을까. 평소에는 결코 하지 않던 말을 이럴 때만 하게 된다. 신이 그런 목적으로 그 단어를 창조한 건 아닐 것이다.
“……그래서? 그게 문제가 돼?”
남편의 하얀 더플코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수프 볼이 더 기울었다. 자신이 비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자는 애꿎은 반대쪽을 기울여 균형을 잡으려고 했다.
“예 전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어. 답답해. 어머님 아버님이 나 안 좋아하시는데 착한 며느리인 척하는 거 싫어. 내가 담배도 피우고 술도 마신다는 거, 우리 집이 사실은 그분들이 아시는 집이 아니라는 거, 더 이상 숨기고 싶지도 않고.”
“그게 문제였어? 그런 거, 다 감수하기로 한 거 아니었니? 이제 와서 싫어진 거야? 알았어. 부모님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다시 그런 얘기 하지 마.”
남편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여자의 팔을 힘주어 잡았다. 그 무심한 표정을 보자 애써 균형을 잡아놓은 수프 볼이 다시 휘청였다. 감수하기로 한 적은 없는데. 난 그냥 입을 다물었을 뿐인데. 붉은 수프가 쿨렁쿨렁 넘쳐나왔다.
“그게 문제 아냐. ……사실은 다른 사람 좋아해.”
남편이 웃음을 터뜨렸다.
“거짓말. 내가 그러면 몰라도 네가 그런다고? 네가 어떻게 다른 사람을 좋아해.”
갑자기 수프 볼이 확 뒤집혔다.
“당신 후배야. 당신 아팠던 날 영화 보러 나간 적 있었지. 그날부터 같이 있었어. 계속 같이 있고 싶어.”
남 편은 그 전날부터 독감에 걸려 있었다. 그는 예매해둔 표 썩히기가 아깝다며 아무 의심 없이 회사 후배에게 표를 돌렸다. 이거 우리 와이프가 꼭 보고 싶어하는 영화거든. 에스코트 좀 부탁해. 남편은 후배에게 저녁 메뉴까지 신경 써서 추천해주었다. 그날 남편의 후배와 여자는 영화를 보지 않았다. 집에 들어오기 전에 여자는 PC방에 들러 인터넷에서 그 영화 줄거리와 영화잡지에 실린 영화평을 꼼꼼히 읽었다. 남편에게 말해줄 별점까지 정했다.
여 자는 더 이상 남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빨간 코트를 적시고 흘러나온 수프 국물로 여자의 발 밑이 흥건했다. 붉게 물든 양파와 피망이 눈 위에서 흉하게 굴러다녔다. 여자는 망연자실하게 서 있다가 아직 쏟아지지 않은 두 개의 수프 볼마저 놓아버렸다.
“……같이 지내기로 했어. 이제 돌이킬 수 없어.”
“거짓말. 너 지금 거짓말하는 거지. 너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며. 나한테 얘기했잖아. 심심해서, 하지도 않은 나쁜 짓 만들어서 고해성사할 때 말하곤 했다고.”
남 편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지고 눈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성정이 약한 사람이었다. 붉게 감돌던 노을이 밤으로 변해가는 하늘의 푸른 멍빛에 먹히는 것만 보아도 눈꼬리가 기름해지는 남자였다. 전에 사귄 사람들과의 일을 간신히 잊는 데만 삼 년이 걸린 사람이었다. 여자는 그의 얼굴에 하얗게 금이 가는 걸 보면서 자신이 잔인하게도 점점 떳떳해진다고 생각했다. ‘너무 오래 참았어.’ 그 생각만 깨진 수프 볼 위를 몇 번이고 맴돌았다. 조각나기 시작한 남편의 얼굴 표정은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주 저앉아 있는 남편을 내버려두고 집으로 혼자 들어가 가방을 꺼냈다. 시부모님은 외출해 집에 없었다. 빠르게 옷가지 몇 개를 챙겨넣으면서 여자는 한 가지만 생각했다. 그 사람은 다음날인 월요일 회사를 옮기기로 했다. 조건이 좋은 회사로 스카우트되어 가는 것이었다. 그가 남편과 얼굴을 마주칠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이었다. 곧 아파트를 마련하겠다고 그 사람은 말했다. 여자는 결혼하는 데 일 년쯤 걸렸으니 이혼하는 데는 아마 좀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차근차근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깨져버린 그릇에 다시 뭘 담을 수는 없었다. 여자에게 이혼은 어릴 때 사전에서 찾아본 몇 줄의 설명만큼이나 쉬운 일로 보였다.
그 건 국어사전을 만든 사람들의 거짓말이었다. 남편의 얼굴을 몇 번 더 대하면서 여자는 법원에 몇 번 드나들었다. 법원에 가야 하는 날마다 여자는 택시를 탔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몸 전체가 갈색으로 변하고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져 땅바닥에 달라붙는 것 같아 지하철역까지 걸을 수가 없었다. 그 사람에게도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 역시 그녀와 헤어지는 데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일 년 사귄 사람인데 많이 힘들어한다고 했다. 여자는 서교동에 조그만 원룸을 하나 잡고 이모의 집에서 나왔다. 그 작업실에서 몇 편의 동화를 썼다. 어린이들에게 환경의 중요성을 깨우쳐주는 동화였다. 생각 없이 쓰레기를 버리고 나뭇가지를 꺾기 좋아하던 아이가 어느 날 지구가 아파하는 소리를 듣고 잘못을 뉘우친다는 내용이었다.
책 이 나오고 다른 출판사에서 책을 하나 더 내게 됐다. 왜 갑자기 일이 쏟아지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여자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바닷빛 머리카락을 지닌 요정 여왕이 아이들에게 잃어버린 꿈을 찾아주는 스토리였다. 서양의 판타지 소설들을 한동안 참고삼아 읽으면서 여자는 자기 세계가 넓어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이 전화를 받지 않기 시작한 건 그 책이 나온 날부터였다. 무슨 일이 있겠지, 그렇게만 생각했다. 현실은 동화와 다르니까. 여자는 시내로 나가 영화를 보기로 했다. 극장 불이 꺼진 뒤에도 전화기를 켠 채 두었다. 용감한 소녀가 옷장 문을 열고 들어가 눈 덮인 나니아의 땅을 처음 밟는 장면에서 여자는 이상하게 속이 울렁거렸다. 눈이 너무 새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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