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고조선왕국의 몰락원인
2. 고구려왕조의 몰락원인
3. 백제왕조의 몰락원인
4. 통일신라의 몰락원인
5. 발해의 몰락원인
6. 조선왕조의 몰락원인
2. 고구려왕조의 몰락원인
3. 백제왕조의 몰락원인
4. 통일신라의 몰락원인
5. 발해의 몰락원인
6. 조선왕조의 몰락원인
본문내용
없게 되자, 경순왕은 마지막 화백회의를 열어 국토를 고려에 맡길 것을 결정하고 스스로 고려의 수도 개경에 가서 그 절차를 밟았다. 고려의 태조는 경순왕을 정승에 배하여 태자의 상위에 예우하고, 태조의 장녀 낙랑공주를 아내로 삼게 하여 매년 1,000섬의 녹을 주었다. 이로써 시조로부터 56대왕, 992년을 이어온 신라의 사직은 끝나고, 고려는 이 해에 후백제마저 병합하여 이로부터 한반도는 새로운 통일왕조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5. 발해의 몰락원인
919년 요나라는 발해의 영토인 요동 지역을 공격하여 발해 주민을 약탈해가자,발해 또한 군사적 작전을 펼쳐 924년 요를 공격하여 장수실을 죽이고 거란인을 약탈하니 발해와 요는 이제 본격적인 전면 전만 남겨두었다.
무려,20년 가까이 전쟁을 한 것이다. 그 결과 발해는 요동 지역을 상실하였다.925년 12월 요의 황제 야율아보기는
\"이른바 두 가지 일중 하나는 이미 끝냈지만 발해가 대대로 내려오는 원수로서 아직 복수를 하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안주
할 수 있겠는가!\" 라는 조서를 내리고 거란군과 기타 원정군을 이끌고 발해를 공격한다.첫 공격지는 부여성이었다.
발해국이 강성할 시에는 거란에 대비하여 많은 군대가 주둔하였지만,요나라가 공격할 시에는 성의 수비가 약화된 상태였다.
그리고 주요 부대는 서쪽의 장령부에서 요의 침공을 대비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부여성은 3일 동안 요의 대군을 맞아 고립된 성을 사수하지만,끝내 요의 대군에 버티지 못하고 성주 이하 전체 병사들은
전사하고 성은함락되었다. 부여성의 함락은 곧 발해국의 멸망과 연결되었다.
요의 대군은 부여성에서 수도 상경용천부까지 어떠한 저항도 받지 않았다.부여성 함락후 6일 뒤에야 발해군이 나타났다.
발해의 노상이 이끄는 3만 발해군은 요의 안단이 이끄는 선봉 1만군과 상경용천부 근처에서 교전하지만,요군은 발해군을
괴멸시키고 수도를 포위하였다.
발해 수도의 군민들은 근처의 요군과 교전하지만,3일 후 발해 왕대인선은 신하 300여명을 이끌고 성 밖으로 나와 항복하였다.
이에 요군은 근시 강말달등 13명을 보내 성안의 무기를 수색하였다.
하지만 발해 병사들이 이들을 살해해 버리고,발해국왕 대인선도 다시 요군과 항전한다고 포고하니 요의 대군은 즉시 공격
하여 다음날 성을 함락시켰다. 함락과 동시에 왕과 귀족들은 요군에 투항하니 발해국은 드디어 멸망하였다.
15왕 229년의 역사가 끝난 것이다. 요나라 황제 야율아보기는 발해를 동란국으로 고치고 발해 지역에 대한 통치를 강화시켜 나
갔다. 발해군을 지휘했던 노상은 요군과 싸우다가 도망간 뒤 투항하여 동란국의 우대상이 되고,사도 대소현은 동란국의 좌차상이
된 것을 비롯하여 주요 귀족들은 요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하지만 발해 귀족 및 군민들은 계속적으로 요에 대항하여 치열하게
항쟁하였다.
927년 3월 발해의 장령부,안변부,막힐부,정리부 군민들이 요군과 교전하였으며,특히 장령부 군민들의 항쟁은 무려 6개월
간이나 지속되었다.그리고 그 해 5월 남해부,정리부 군민들이 요군과 싸웠으며,7월에는 철주 자사의 지휘하에 군민들이
요군과 접전하였다.하지만 요군에의하여 진압되었고,발해인은 여러 갈래로 발해국의 재건과 요의 항쟁에 참가한다.
6. 조선왕조의 몰락원인
제1단계 멸망: 1866년의 병인양요(프랑스)와 1871년의 신미양요(미국)이다.
이것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더 강화시킨 결과가 되었는데, 끝내는 서구렬강세력들의 식민지확보 전략의 측면에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으며,
국제정세에 어두워 멸망으로 가는 길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이 때 조선 조정에서는 어떻게 했어야 옳았겠는가? 이것은 이라크 파병과 무관하지 않다.
제2단계 멸망: 1882년 임오군란과 제물포조약의 체결이다.
제3단계 원인 : 1875년의 운양호 사건과 그 이듬해 강화조약이다.
이를 강화도조약이라고들 하는데, 그저 강화(江華)이다. 강화조약으로 조선은 자주국가이다라고 했지만, 이 자체가 식민지라는 말을 은폐한 것이다.
국제협상 용어에 익숙해야 한다. 요즘의 국제관계도 마찬가지다.
제4단계 멸망: 1895년의 명성황후 시해사건 과 청일전쟁과 마관조약(시모노세끼조약)이다.
국모가 시해된지 2년이 지났는데 \"대한제국\"이란 국가명칭을 사용할 수 있는가? \"황제\"란 말로 호칭을 격상시켜주니 우쭐되었나?
외교의 명분과 실리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제5단계 멸망: 1907년 정미칠조약과 군대해산이다. 이것은 1910년 한일합방으로 바로 이어진다.
오늘이 8월 1일이다. 100년도 안되는 97년 전의 일이다.
1907년 7월 19일 고종(高宗)은 순종(純宗)에게 황위를 양위한다고 조칙을 발표하고, 모든 각부처의 차관을 일본인으로 모두 임명하는 조약에 24일 조인했다.
사흘이 지난 27일에 신문지법을 강행한 언론탄압이 있었고, 29일에 집회방지의 보안법이 공포되었다.
그리고 31일 군대해산령이 떨어졌고, 이날밤 아침이 되어 8월 1일에는 맨손체조훈련을 한답시고 모였다가,
군부협판 한진창이 순종즉위 조칙을 낭독하고나서 일본군 헌병들이 중무장하여 그 자리에서 계급장을 모두 떼어버렸다.
도망간 자 78명이 일본군이 일제히 쏘아댄 총에 맞아 죽었다. 싸워보지도 못하고 당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군인들이야 \"만번 죽은들 무엇이 아깝겠는가!\"라고 외쳐본들 정치가 썩어버리니, 총칼은 쓸모 없는 쓰레기보다도 못하게 되었었다.
바로 이 다섯 가지의 명망단계 때문에 미국 력사학자가 말했듯이 \"지리학적으로 조선은 국제정치학의 아버지이다.\"는 말을 낳게 한 것이라고 본다.
대한제국은 이름만큼 크지도 않았는지, 나무늘보보다도, 수면제 먹은 코끼리보다도, 한편 영화의 슬로우 모션(slow motion)보다도 더 느긋하게,
아무런 힘도, 반항도, 기도 쓰지 못하고, 가위눌린듯이 그렇게 망했다.
정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정치가는 알아야 한다.
실질적으로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버린 것은 1910년이 아니라, 1907년 8월 1일이다.
이렇게 조금씩 단계씩 올라가면 제1단계 멸망까지 소급할 수 있다는 말이다.
여기에는 모두 정치전략의 부재가 있었다
5. 발해의 몰락원인
919년 요나라는 발해의 영토인 요동 지역을 공격하여 발해 주민을 약탈해가자,발해 또한 군사적 작전을 펼쳐 924년 요를 공격하여 장수실을 죽이고 거란인을 약탈하니 발해와 요는 이제 본격적인 전면 전만 남겨두었다.
무려,20년 가까이 전쟁을 한 것이다. 그 결과 발해는 요동 지역을 상실하였다.925년 12월 요의 황제 야율아보기는
\"이른바 두 가지 일중 하나는 이미 끝냈지만 발해가 대대로 내려오는 원수로서 아직 복수를 하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안주
할 수 있겠는가!\" 라는 조서를 내리고 거란군과 기타 원정군을 이끌고 발해를 공격한다.첫 공격지는 부여성이었다.
발해국이 강성할 시에는 거란에 대비하여 많은 군대가 주둔하였지만,요나라가 공격할 시에는 성의 수비가 약화된 상태였다.
그리고 주요 부대는 서쪽의 장령부에서 요의 침공을 대비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부여성은 3일 동안 요의 대군을 맞아 고립된 성을 사수하지만,끝내 요의 대군에 버티지 못하고 성주 이하 전체 병사들은
전사하고 성은함락되었다. 부여성의 함락은 곧 발해국의 멸망과 연결되었다.
요의 대군은 부여성에서 수도 상경용천부까지 어떠한 저항도 받지 않았다.부여성 함락후 6일 뒤에야 발해군이 나타났다.
발해의 노상이 이끄는 3만 발해군은 요의 안단이 이끄는 선봉 1만군과 상경용천부 근처에서 교전하지만,요군은 발해군을
괴멸시키고 수도를 포위하였다.
발해 수도의 군민들은 근처의 요군과 교전하지만,3일 후 발해 왕대인선은 신하 300여명을 이끌고 성 밖으로 나와 항복하였다.
이에 요군은 근시 강말달등 13명을 보내 성안의 무기를 수색하였다.
하지만 발해 병사들이 이들을 살해해 버리고,발해국왕 대인선도 다시 요군과 항전한다고 포고하니 요의 대군은 즉시 공격
하여 다음날 성을 함락시켰다. 함락과 동시에 왕과 귀족들은 요군에 투항하니 발해국은 드디어 멸망하였다.
15왕 229년의 역사가 끝난 것이다. 요나라 황제 야율아보기는 발해를 동란국으로 고치고 발해 지역에 대한 통치를 강화시켜 나
갔다. 발해군을 지휘했던 노상은 요군과 싸우다가 도망간 뒤 투항하여 동란국의 우대상이 되고,사도 대소현은 동란국의 좌차상이
된 것을 비롯하여 주요 귀족들은 요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하지만 발해 귀족 및 군민들은 계속적으로 요에 대항하여 치열하게
항쟁하였다.
927년 3월 발해의 장령부,안변부,막힐부,정리부 군민들이 요군과 교전하였으며,특히 장령부 군민들의 항쟁은 무려 6개월
간이나 지속되었다.그리고 그 해 5월 남해부,정리부 군민들이 요군과 싸웠으며,7월에는 철주 자사의 지휘하에 군민들이
요군과 접전하였다.하지만 요군에의하여 진압되었고,발해인은 여러 갈래로 발해국의 재건과 요의 항쟁에 참가한다.
6. 조선왕조의 몰락원인
제1단계 멸망: 1866년의 병인양요(프랑스)와 1871년의 신미양요(미국)이다.
이것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더 강화시킨 결과가 되었는데, 끝내는 서구렬강세력들의 식민지확보 전략의 측면에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으며,
국제정세에 어두워 멸망으로 가는 길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이 때 조선 조정에서는 어떻게 했어야 옳았겠는가? 이것은 이라크 파병과 무관하지 않다.
제2단계 멸망: 1882년 임오군란과 제물포조약의 체결이다.
제3단계 원인 : 1875년의 운양호 사건과 그 이듬해 강화조약이다.
이를 강화도조약이라고들 하는데, 그저 강화(江華)이다. 강화조약으로 조선은 자주국가이다라고 했지만, 이 자체가 식민지라는 말을 은폐한 것이다.
국제협상 용어에 익숙해야 한다. 요즘의 국제관계도 마찬가지다.
제4단계 멸망: 1895년의 명성황후 시해사건 과 청일전쟁과 마관조약(시모노세끼조약)이다.
국모가 시해된지 2년이 지났는데 \"대한제국\"이란 국가명칭을 사용할 수 있는가? \"황제\"란 말로 호칭을 격상시켜주니 우쭐되었나?
외교의 명분과 실리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제5단계 멸망: 1907년 정미칠조약과 군대해산이다. 이것은 1910년 한일합방으로 바로 이어진다.
오늘이 8월 1일이다. 100년도 안되는 97년 전의 일이다.
1907년 7월 19일 고종(高宗)은 순종(純宗)에게 황위를 양위한다고 조칙을 발표하고, 모든 각부처의 차관을 일본인으로 모두 임명하는 조약에 24일 조인했다.
사흘이 지난 27일에 신문지법을 강행한 언론탄압이 있었고, 29일에 집회방지의 보안법이 공포되었다.
그리고 31일 군대해산령이 떨어졌고, 이날밤 아침이 되어 8월 1일에는 맨손체조훈련을 한답시고 모였다가,
군부협판 한진창이 순종즉위 조칙을 낭독하고나서 일본군 헌병들이 중무장하여 그 자리에서 계급장을 모두 떼어버렸다.
도망간 자 78명이 일본군이 일제히 쏘아댄 총에 맞아 죽었다. 싸워보지도 못하고 당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군인들이야 \"만번 죽은들 무엇이 아깝겠는가!\"라고 외쳐본들 정치가 썩어버리니, 총칼은 쓸모 없는 쓰레기보다도 못하게 되었었다.
바로 이 다섯 가지의 명망단계 때문에 미국 력사학자가 말했듯이 \"지리학적으로 조선은 국제정치학의 아버지이다.\"는 말을 낳게 한 것이라고 본다.
대한제국은 이름만큼 크지도 않았는지, 나무늘보보다도, 수면제 먹은 코끼리보다도, 한편 영화의 슬로우 모션(slow motion)보다도 더 느긋하게,
아무런 힘도, 반항도, 기도 쓰지 못하고, 가위눌린듯이 그렇게 망했다.
정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정치가는 알아야 한다.
실질적으로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버린 것은 1910년이 아니라, 1907년 8월 1일이다.
이렇게 조금씩 단계씩 올라가면 제1단계 멸망까지 소급할 수 있다는 말이다.
여기에는 모두 정치전략의 부재가 있었다
키워드
역대왕조의 몰락원인과 비교분석, 고조선왕국의 몰락원인, 고구려왕조의 몰락원인, 백제왕조의 몰락원인 , 통일신라의 몰락원인, 발해의 몰락원인, 조선왕조의 몰락원인 , 고구려, 신라, 공격, 백제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