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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유학 역사][유학 理(이)개념][홍범사상][정산사상][신라시대 유학][고려시대 유학]유학의 의의, 유학의 역사, 유학의 理(이)개념, 유학과 홍범사상, 유학과 정산사상, 신라시대의 유학, 고려시대의 유학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유학의 의의

Ⅱ. 유학의 역사

Ⅲ. 유학의 理(이)개념

Ⅳ. 유학과 홍범사상

Ⅴ. 유학과 정산사상

Ⅵ. 신라시대의 유학

Ⅶ. 고려시대의 유학

참고문헌

본문내용

있다. 국정운영에 대한 의견개진(封事)의 내용을 분석함으로써 신하들이 가졌던 당시 문제들에 대한 의식을 파악하고자 한다. 詔書와 封事는 그 자체가 갖는 布告的, 儀禮的, 形式的 성격의 제한점이 있으나, 成文法典이 없는 상황에서 군주가 내리는 조칙은 최고 법률로서의 성격을 가지며, 봉사는 당시 신하들의 비교적 솔직한 의견개진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는 크다. 太祖詔書와 訓要十條의 분석을 통해 太祖는 민본의 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왕실의 재용을 절감하고 백성에 대한 조세나 역역의 경감을 강조하고 있으며, 禮孝仁 등의 유교덕목으로 백성을 순화하기 위해 어진 관리의 임용을 강조하였다. 훈요십조는 불교사상이나 도참사상이 강조된 것으로 여겨지기보다는 전반적으로 유교정치사상이 강하며 태조가 훈요에서 강조한 것은 현인의 등용, 올바른 인사법의 시행, 형상의 공정한 유지 및 天命思想 등이며 그것은 주로 조서들에 나타난 태조의 정치사상이 종합적으로 반영된 것이다. 光宗代는 유교정치사상의 실천에 있어서 장애요인이 되었던 호족에 대한 억제가 가능했던 시기였고 그 대신 과거제를 통해 지방의 신진관료를 중앙으로 흡수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됨으로써 결국 고려사회가 유교정치사상으로 통치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했다. 成宗 敎書와 성종대의 封事를 분석하여 성종이 통치목표로 설정한 것은 堯舜의 통치를 모델로 하여, 周公과 孔子의 도를 먼저 알아야 하고 그것을 위해 국왕은 仁으로 통치하고 밖으로 京外에 학교를 세워 周公과 공자의 사상을 널리 전파하고자 한 것이다. 崔承老의 봉사를 분석하여 최승로가 제시한 이상적인 군주상은 夏殷周 三代의 군주, 당 태종, 태조 및 四祖의 통치 중 본받아야 할 것 등으로 정리하였고, 時務策은 중앙집권적 귀족정치의 실현을 목표로 건의된 것으로 보기보다는 민본과 仁政이 실현될 수 있는 집권적 정치질서의 구축에 있었던 것이다. 한편, 崔承老의 封事는 太祖~光宗代의 통치하에서 그 영역을 신장시켜간 유교정치사상이 성종대까지 계기적으로 연결되어 진 상황 하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김부식은 고려중기의 잦은 정변이나 개혁논의 속에서 예교에 입각한 군신간의 질서를 고수하였고 - 그것은 결국은 태조 이래의 왕조질서 자체에 대한 존중이다 -, 그러한 자신의 충의와 정당함을 토로하고자 하였다. 이 점에서 三國史記의 사론에는 한 현실정치가의 자기변호와 항의가 공존하고 있다.
고대나 중세의 역사인식은 대개 지배자 계층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의 인식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므로 왕의 측근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중요시되었다. 또한 史官은 왕 측근에서 보고들은 바의 모든 것을 기록하였으므로 사관이란 직책도 옛부터 要職이었다. 그러나 史館이란 뚜렷한 관직이 확립된 것은 중국의 경우 당에 이르러서이다. 史館은 光宗朝에 당송의 영향을 받아 세워졌다고 짐작된다. 이는 광종이 學士政治를 통하여 단행된 개혁 등을 기록하게 하여 자기의 업적을 남기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설치된 官府이다. 史館에서는 監修國史修國史同修國史修撰官直史館으로 구성되었다. 監修國史를 지냈던 처음 인물은 광종조의 金廷彦으로, 修國史에는 顯宗朝에 金審言, 修撰官에는 柳邦憲, 直史館에는 李子淵으로 나타난다. 광종조에 설치된 史館이 顯宗時에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광종 때에 활약하던 인물들이 배척되고 그들에 대한 史跡도 소멸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 외 일시적으로 判史館事란 관직도 두어졌다. 비록 史館이 왕권강화의 수단으로 설치되었지만 견제의 기능으로 왕권을 어느 정도 제약할 수 있었다. 그리고 內部는 이원적 구조를 이루어 상승부는 옹호적인 면이 강하였고, 하부는 견제적인 면이 강하였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어디까지나 귀족사회 내에서의 기능이었다.
고려사회는 천인합일사상에 입각한 천문관을 중국의 천문사상으로 수용하여 천문상의 변이가 군주나 치자계층의 부덕의 소치로 말미암는 것이며 따라서 치자에 대한 天譴으로 인식하고 수성과 덕치주의를 지향하여 항상 선정을 구현하도록 촉구되었다. 이러한 유가적 天文觀의 보편적 형세는 중국적 전제군주 정치에 대한 유교의 지식인들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의 기회를 갖게 한다. 유자들은 군주와 그의 치적을 비판하고 반성하게 함으로써 계속해서 군주에 대한 견제력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고려의 유교주의 정치이념의 구현은 덕치주의를 향한 유가적 정치이상을 실현하려 하였다는 결론을 내린다. 고려사회는 유교사상을 정치이념으로 수용하면서 중국적 천문사상도 아울러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것은 天人合一思想에 입각한 천문관을 바탕으로 한 것이며 天文上의 變異가 군주나 治者階層의 不德의 소치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것이며, 따라서 치자에 대한 天譴으로 인식하고 修省과 덕치주의를 지향하여 항상 선정을 구현하도록 촉구되었다.
고려는 景宗대를 앞서서 이미 천문기구인 司天院을 정비하여 이후 唐宋元 특히 唐制를 중심으로 한 천문과 역서를 주관하는 관제기구를 정비하였다. 한편 日月星變이 일어나는 중요한 원인은 역대 중국에서 보는 것과 같이 군주를 비롯한 치자의 부덕에 대한 하늘의 譴責으로서 나타난다고 생각하였다. 荀子 이래의 합리적 천문관이 고려사회에도 수용되어 자연과 인간을 峻別하는 지식이 중국과 같이 고려사회에도 간혹 군주나 지식인에 의해 주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역대 중국에서와 같이 천인합일설의 강력한 대세가 여전히 主流를 이루는 가운데 두 개의 사상이 간혹 混淆되기도 하였다. 仁政을 성취하려는 고려의 유교주의 정치이념의 구현은 이러한 天文 災異思想의 수용과 함께 그 내용을 더욱 확충한 것이며 고려의 정치의식을 전개함으로써 덕치주의를 향한 유가적 정치이념을 실현하려 하였던 것이다(이희덕).
참고문헌
ⅰ. 금충열(1984), 고려유학사, 고려대출판부
ⅱ. 도현철(1994), 14세기 전반 유교지식인의 현실인식, 14세기 고려의 정치와 사회
ⅲ. 박홍식, 유교의 종교관
ⅳ. 사중명, 김기현 옮김(1998), 유학과 현대 세계, 서울 : 서광사
ⅴ. 조남욱 외(1999), 현대인의 유교 읽기, 아세아문화사
ⅵ. 최근덕(1992), 한국유학사상연구, 철학과현실사
ⅶ. 한국공자학회(1994), 공자사상과 현대, 서울 : 사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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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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